‘서버저장+영장남발’…못살겠다 갈아타자
텔레그램을 설치하자마자 메시지가 쇄도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사이버 망명자’라고 불렀다. 묘한 동질감을 주는 단어였다. 특히 기자, 경찰 등 보안에 신경 써야 하는 이들, 혹은 정치적으로 진보성향인 친구들의 이름이 목록에 올랐다. 카카오톡(카톡) 친구 수에 비하면 3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지만 매일 꾸준히 텔레그램은 새로운 친구 가입 소식을 알려준다. 카톡 사찰 논란에 이은 사이버망명 사태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 도를 넘었다”는 발언에서 시작됐다. 검찰은 대통령의 발언 이틀이 지난 지난달 18일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수사팀’을 서울중앙지검에 설치하겠다고 나섰다. 여기에 지난 1일 정진우 노동당 부대표가 “경찰이 카톡 대화내용과 채팅방에 속한 약 3000명의 카톡 친구들의 개인정보 등을 사찰했다”고 폭로하면서 ‘카톡 엑소더스’는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있다.
당국의 카카오톡 사찰 논란으로 메신저 이용자들이 텔레그램으로 갈아타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작은 사진은 텔레그램 리뷰 글들.
당국의 검열·사찰 논란 속에 메신저 이용자들은 사이버 망명으로 대응했다. 텔레그램은 현재 애플 앱스토어 무료 애플리케이션 다운로드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안드로이드 구글플레이에서도 공식 한국어 버전 다운로드 순위 8위, 오픈소스로 개발된 버전이 11위를 차지했다.
다운로드 리뷰에서도 카카오톡 사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읽을 수 있다. 앱스토어에는 10월 9일 현재 1700건이 넘는 리뷰가 달렸다. 대부분의 내용이 이용소감이 아닌 정부의 검열을 성토하는 내용이었다. 텔레그램 유저들은 “검열국가에서 살아남는 필수 어플이다”, “민주주의의 후퇴다”, “이것도 한번 검열해봐라” 등의 반응을 보였다.
기자가 텔레그램을 이용해본 소감은 깔끔하고 편하다는 느낌이었다. 150만 명이 가입했다고는 하나 거의 모든 스마트폰 유저들이 사용하는 카톡을 따라가기엔 한참 부족하다. 하지만 만약 사이버망명 열풍이 지속돼 텔레그램에서 대화할 수 있는 친구들이 늘어난다면 ‘갈아 탈’ 의향도 충분히 있다.
이런 인기에 부응해 텔레그램은 한국어 번역 전문가를 모집하고, 7일 안드로이드 버전 한국어 공식 앱을 출시했다. 공식 홈페이지의 FAQ페이지에서도 한국어 서비스를 추가했다. 텔레그램은 지난주에만 150만 명의 한국인 이용자가 새로 가입했다고 밝혔다.
텔레그램은 자사의 메신저가 무엇보다 보안에 중점을 둔 프로그램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대화내용을 암호화해 전송하는 것은 물론, 서버 자체를 독일에 두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사정기관의 압수수색이 불가능하다. 2억 원의 상금을 내걸고 해킹대회를 열었으나 성공한 해커가 없었을 정도다. 이밖에 사용자가 설정한 기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대화내용이 삭제되는 기능, 비밀 대화방 기능 등 보안 강화 장치를 겹겹이 두고 있다.
반면 카톡은 수세에 몰리고 있다. 다음카카오의 주가는 정 부대표의 폭로가 있던 1일 이후 연일 하락세다. 1일 17만 2600원을 기록했던 주가는 8일 14만 원대로 내려앉았다. 또 새정치민주연합 전병헌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9월 넷째 주에는 전 주에 비해 카톡 하루 이용자가 40만 명 넘게 줄었다. 이에 비해 텔레그램 이용자는 같은 기간 20배 이상 증가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다음카카오 측도 뒤늦게 방어에 나섰다. 카카오는 8일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보안 업그레이드 계획과, 지금까지 있었던 수사기관의 감청 요청 건수를 발표했다. 카카오가 받은 감청 요청은 2013년 86건, 올해 상반기만 61건이다. 또 압수수색영장을 통한 자료 요청 건수는 작년 한해에는 2000건이 넘었고, 올해는 상반기에만 2100건이 넘었다. 이에 대한 처리율은 각각 83.1%, 77.48%였다.
지난 5월 다음-카카오 합병 모습. 이종현 기자
다음카카오는 초기 대응 당시 “감청 요청 자체를 받은 적 없다”고 발표해 논란을 키웠다. 이어 곧 “정확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발표한 내용이었다”고 감청자료 제공 사실을 인정했다. 또 늦은 감이 있다는 걸 의식한 듯 보안강화 계획인 ‘외양간프로젝트’를 발표했다. 10일 남짓이었던 대화내용 보관기간을 2~3일로 축소하고, ‘프라이버시 모드’를 도입해 서버에서 대화내용 분석이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겠다는 내용이다.
카카오가 이번 해명에서 가장 강조하는 지점은 실시간 감청에 대한 부분이다. 기술적으로 서버에 남아있는 기록만 수사기관에 제공할 수 있을 뿐, 대화가 오가는 중에는 암호로 전송되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사적인 대화내용은 들여다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실시간 감청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맞섰다. 영장을 수시로 발부받아 온다면 저장기간을 줄여도 소용이 없다는 얘기다. IT보안전문가인 김인성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문자 그대로의 ‘실시간’ 감청은 불가능해도 하루, 이틀 간격으로 감청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카톡은 이런 논란에 대해 “매일매일 영장 발부받아 올 수 있을 정도로 영장 발부가 쉽게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해명했다. 실제로 새정치민주연합 임내현 의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통신감청 영장 기각률은 4%다.
여당의 시대착오적인 접근도 사이버 망명 가열에 한몫하고 있다. 권은희 새누리당 대변인은 8일 “사이버 망명, 국민 개인의 통신자유 보장과 국익이 우선이다”는 제목의 논평을 발표했다. 권 의원은 논평에서 “익명성을 앞세워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퍼뜨리거나 사회불안을 조장하고, 국론을 분열시키는 행동들을 방지하기 위한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앞서 두 차례의 사이버 망명 바람은 오히려 해외 인터넷 기업의 국내 시장 잠식을 부추기는 계기가 됐다”면서 사이버망명을 “불필요한 정쟁이 부른 국익 저해 행위”로 규정했다.
카카오의 뒤늦은 대응과 정부의 검열 강경책이 이어지면서 사이버망명에 대한 관심은 커져만 가고 있다. 텔레그램을 이용하고 있다는 김 아무개 씨(40)는 “사적인 대화 공간도 보장해주지 않는 게 무슨 민주국가냐. 아무리 카톡 친구가 훨씬 많다고는 하지만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텔레그램을 이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