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꿔치기·업어치기… 두판 다 ‘반집 역전극’
3국은 박영훈 9단의 ‘작품’이었다. 포석에서는 흑을 든 박정환이 과감하게 큰 곳을 선점하며 앞서나갔다. 박영훈이 흑의 모양에 뛰어들어 변화의 물꼬를 트려고 했으나 백을 공격하는 박정환의 용병술이 빛을 발했다. 한국 랭킹 1위이자 세계 랭킹 1위의 면모가 약여했다. 백은 우상 일대와 우하-하변에서 양곤마가 되어 쫓겼고, 우상 대마는 살아갔지만, 우하-하변의 대마가 빈사지경에 처했다. 박정환의 추궁은 정확하고 신랄해 백 대마는 활로를 찾기 힘들 것으로 보였다. 절체절명이었다. 설상가상 시간에서도 몰렸다. 박정환은 15분이나 시간 여유가 있었으나 박영훈은 마지막 1분 초읽기였다. 박영훈은 이중의 적과 싸우며 연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나 궁즉통, 박영훈이 결단했다. 대마를 포기했다. 돌 숫자만 18개에 주변 공배가 20여 곳인 60집짜리를 버린 것인데, 버리자 길이 열렸다. 대마를 버리는 대신 좌중앙 일대 전부를 순식간에, 깨끗하게 통으로 거두어들인 것. 거기에는 흑돌 5개가 흩어져 있었고, 공배는 무려 40개가 넘었다. 해설자 최명훈 9단이 깜짝 놀랐다. “대마가 잡히면 무조건 끝인 줄 알았는데 미세합니다. 아니, 어떻게 된 겁니까? 백이 나쁘지 않아 보이네요!” 60집을 주고받은, 초대형 바꿔치기가 끝나자 바둑은 미세해져 있었던 것. 그리고 최종 결과는 백의 반집승이었다.
1국은 박영훈의 백 불계승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계가를 했으면 반집이었다. 그 바둑도 박영훈의 역전극이었다. 박영훈이 집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때도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시간 연장책으로 간단한 응수타진을 띄웠다. 박정환이 그걸 낚아챘다. 응징의 한 수로 대답했다. 결정타 같았다. 그러나 그때도, 바로 거기서 박영훈의 업어치기 묘수 한 방, ‘절묘한 찝기’가 작렬했다. 결정타를 날리려던 박정환은 오히려 손해를 보았고, 형세는 크게 흔들렸다. 바둑을 다 두고 공배 메우기만 남은 상황, 계가 직전에 박정환은 돌을 거두었다. 지려야 질 수 없는 바둑을 반집으로 역전패한 박정환으로서는 확인하기가 싫었을 것이다.
박-박 대결의 전전(戰前)예상은 ‘박정환 우세’였다. 두 사람 사이의 전적은 박정환이 10승 4패로 차이가 좀 있었고, 그렇다고 박영훈이 쉽게 지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요즘의 대세는 박정환이니까. 그러나 이창호 9단의 대를 이어 ‘신산(神算)’ 소리를 들었던 끝내기의 귀재 박영훈은 반집, 한 번은 사실상 반집, 또 한 번은 실제 반집으로 ‘대세’를 넘어 결승5번기 무대에 진출했다. 2010-11년 시즌 ‘명인’을 연패했던 인연도 있다. 이번 5번기 시리즈의 상대는 먼저 올라가 있는 이동훈 3단. 박영훈이 나이 아직 서른도 안 넘은 스물아홉이지만, 이동훈은 이제 겨우 열여섯이니 어느덧 ‘신-구 대결’인 셈이다. 지금까지 두 사람은 두 번 만나 두 번 모두 박영훈이 이겼는데, 과거는 과거, 열여섯 소년은 성큼성큼 크고 있고, 특히 이번 명인전 준결승에서는 이세돌 9단을 2 대 0으로 아웃시켜 기세충천해 있다. 한동안 뜸했던 박영훈도 올 시즌에 들어오면서 다시 힘을 내고 있으니까. 박정환을 제친 것에 새삼 자신감도 붙었으리라. 그래서 예측불허다.
이광구 객원기자
<1도>는 제1국 종반. 좌상귀쪽 백1로 젖힌 것이 시간 연장을 위한 간단한 응수타진이었고, 흑이 담담히 잇지 않고 2로 껴붙인 것이 백1을 무위로 만드는 결정타 같았던 그 수이며, 여기서 백3으로 찝은 것이 바로 박영훈의 업어치기 묘수였다. <2도>는 실전진행. 흑1로 몰자 백은 흑이 껴붙여 온 곳에서 2로 내려섰다. <1도> 백1을 응징하려던 흑의 껴붙임이 거꾸로 응징 당하는 순간이었다. 흑3에는 백4로 연결하고 비로소 흑5로 잊자 백6으로 보강했다. 흑은 A로 따내는 것을 남겼으나 백도 B로 단수치는 게 생겼다. 이걸 비겼다 치면 결국 백2의 엄청난 이득만 남은 것. 이래서는 역전이었던 것. <1도> 백3으로 그냥…. <3도> 백1로 내려서면? 흑2로 끊는 수가 있다. 백3으로 몰 수밖에 없을 때 흑4가 기다리고 있는 것. 박정환이 본 것이 이거였다. 그렇다면 <2도> 흑1로 단수치지 않고 그냥…. <4도> 흑1로 이어 백의 연단수를 방비하면? 백2로 내려선다. 흑3으로 끊으면? 백4 이하로 두 점을 버린다. 대신 백10~14로 여기를 정리하고, 저 아래로 내려가 백16으로 움직인다. 흑17밖에 없는데, 백18로 뚫는다. 흑19로 끊기를 기다려 백20으로 같이 단수친다. 흑21이면? 백22로 나간다. 흑A로 몰면 백은 축으로 잡히는데? 그렇다. 그러나 흑A면 백은 B쪽을 끊고, 흑은 여기가 끊기면 좌하에서 중앙을 거쳐 상변까지 이어진 거대한 흑말이 함몰하는 것. 백22 때 흑C로 지키면? 백A로 올라간다. 여기서는 흑이 한 집을 낼 수 없다. 전판을 엮는 무서운 수읽기인 것인데, 1분 초읽기 속에서 이런 길고 복잡하고 난해한 수읽기를 끝내고, <1도> 백3으로 찝은 사람이나 <2도> 흑1로 단수친 사람은 역시 귀신들이다. <5도>는 3국의 하이라이트. 흑1이 양곤마를 위협하는 양수겸장의 한 수. 백2로 위쪽 대마가 살아가자 흑3으로 들여다보고 5로 빗장을 건다. 백6으로 따내고 흑7로 ▲자리에 먹여쳤다. 백 대마가 사는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백8의 건너붙임? 이게 무슨 효험이 있을까? <6도> 흑1~5에 이르자 대마는 잡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백의 대 사석작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백6으로 젖혔다. 흑7로 끊어 놓고 9로 막았다. 이제 대마는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 절망 같았다. 그랬는데…. <7도> 백1, 3으로 몰고, 잇고, 7로 틀어막자 허허벌판이던 좌변과 중원이 순식간에, 통으로 백의 영토가 되어 버린 것. <8도>는 종국 장면이다. 이 바둑의 승부가 반집이다. [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