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행렬 인도하는 꺼지지 않는 ‘횃불’
▲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점화된 촛불집회가 지난 6월 10일 6·10민주항쟁 21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100만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등 최고조에 올랐다. 사진은 서울시청 광장을 수놓은 촛불들. 사진공동취재단 | ||
이번 촛불정국에서 놀랍고도 무서운 결집력을 보여주며 시위를 주도한 디지털 세대의 힘을 일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다소 과장이 섞인 건 사실이지만 그만큼 촛불집회는 기성세대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번에 보여준 10~20대의 ‘좌’도 ‘우’도 아닌 새로운 정치적 성향과 그들이 디지털로 공유하고 있는 새로운 문화는 기성세대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지만 거부할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이었다. 작은 내가 모여 거대한 강물을 형성하듯 각종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형성된 그들의 뜻은 오프라인에서 하나가 되었고 이는 기성세대의 호응으로 이어졌다. 유모차를 끄는 아줌마부대도 넥타이를 맨 직장인도 합류했고, 급기야 80년대 돌과 화염병으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386세대들도 ‘무장’만 하지 않은 채 모두 뛰쳐나왔다.
수많은 촛불들을 결집시키고 기성세대까지 촛불 아래로 불러모으고 정국을 주도한 디지털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리고 디지털세대는 앞으로 어디로 향할것인가.
사상 최대 규모의 인원이 참석한 6월 10일 촛불문화제. 집회 사회자가 밤 8시 30분경 인터넷으로 집회를 지켜보는 시민들에게 “청와대 홈페이지에 동시에 접속해 국민의 뜻을 보여주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자 곧바로 청와대 홈페이지는 다운이 되었다. 집회 참가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중계를 지켜보고 있었고 이들이 집회 사회자의 제안에 따라 동시에 행동에 옮긴 것이다.
한 달이 넘게 진행되는 ‘촛불 정국’에서 네티즌들의 힘은 그야말로 가공할 만한 것이다. ‘청와대 홈페이지 다운 사건’은 수없이 많은 디지털 파워의 한 가지 예에 불과하다.
캠코더와 노트북, 그리고 와이브로로 무장한 시위대는 촛불문화제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수백 개의 1인 미디어의 시위 현장 생중계는 시민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시켰다. ‘여대생 군홧발 폭행 동영상’이 민심을 자극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인터넷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쌍방향 소통이라는 디지털의 고유한 특성이 이번 시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다”고 평한다.
촛불시위 생중계로 인기를 끌고 있는 진보신당 칼라TV 조대희 총괄 PD(35)는 “경찰이 물대포를 쐈을 당시, 집에서 생중계를 보고 있던 시민들이 우비를 들고 나왔다. 또 김밥이나 먹을 것을 들고 나오는 시민들도 많았다”고 회고했다.
▲ 촛불집회 기간 동안 인터넷 시민광장 역할을 한 다음의 토론 게시판 아고라. | ||
이미 네티즌들은 광우병과 쇠고기 협상에 관한 정부와 기존 언론의 정보를 검증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내놓고 있었다. ‘대운하 양심선언’을 했던 김이태 연구원은 자신의 고백을 ‘아고라’에 털어놓은 이유에 대해 “기존 언론은 내 이야기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을 것 같아서”라고 얘기한 바 있다. 이미 인터넷 공간은 게시판이나 토론장에서 ‘집단지성’을 갖추고 있으며 때론 해당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쇄도한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아고라’는 인터넷 여론의 정점으로 부상했다. 수많은 사이트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제는 아고라에 집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음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욕설이나 실명으로 인격을 훼손하는 일 외에는 어떠한 규제도 하지 않는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다양한 의견이 자유롭게 토론되는 공간인 아고라에서 네티즌들은 마음껏 소통하고 있는 셈이다.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네티즌들의 특성 중 하나는 이들이 애초에 정치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사실이다. ‘마이클럽(여성 포털 사이트)’, ‘소울 드레서(패션 동호회)’, ‘MLB PARK(메이저리그 동호회)’, ‘SLR클럽(사진 동호회)’ ‘82cook(요리 동호회)’, ‘동방신기 팬클럽’ ‘엽기혹은진실(연예인 가십 카페)’ 등 회원 수가 수만 명에 달하는 다양한 커뮤니티가 집회에 참석한다.
사진 동호회는 시위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고 요리 동호회는 밤을 새워 시위를 벌이는 이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기도 한다. 따로 ‘전공을 살려’ 집회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커뮤니티는 돈을 모아 자신의 주장을 신문 광고로 낸다. 또 보수 언론에 광고를 싣는 기업에 ‘항의 전화’를 줄기차게 하고 있다. 이들 때문에 현재 보수 언론은 광고 매출에 상당한 타격을 받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디지털 세대의 맹활약은 종종 아날로그 세대와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경찰이 시위대를 강경진압했을 때 네티즌들은 “구시대적인 대응으로는 절대 디지털 게릴라를 막을 수 없다”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또 문화부에서 “뉴스를 생산하거나 유통하는 모든 인터넷사이트들을 언론에 포함시켜 통제하겠다”고 밝히자 “웹2.0 시대의 웹1.0 시대적인 사고”라고 비꼬았다.
문화부의 이런 발표에 대해 한 인터넷전문가는 “현재의 인터넷 여론을 정부에서 통제해서도 안되지만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며 “오히려 정부는 이러한 열린 공간을 지원하면서 공공성을 확보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정부의 섣부른 통제는 오히려 네티즌들의 반발을 살 뿐”이라고 덧붙였다.
기성세대들이 디지털 세대들의 활동에 당황스러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들이 주도하는 촛불정국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향할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보신당 칼라TV 조대희 PD는 “현재로선 촛불정국의 향방은 정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며 “정부가 만족할 만한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면 촛불 정국은 쇠고기에서 민영화, 대운하 정국으로 옮아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또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 허경 씨는 “현재 네티즌들은 그동안의 시위를 통해 더 성숙되고 준비된 상태이기 때문에 앞으로 이전과는 또 다른 디지털 세대의 활약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류인홍 기자 ledh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