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 안타까워 끌어안고 잔 적도”
▲ 40여 년을 강력반에서 생활하고 은퇴 후에도 경찰청 수사연구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중락 고문. 아직도 많은 사건들이 그에게 현재진행형이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1950년 순경으로 경찰에 투신한 뒤 90년 12월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과장(총경)으로 퇴임하기까지 무려 40여 년을 강력반에 몸담았던 최 고문의 근황은 어떨까. 종영한 지 근 20년이 됐지만 다시 보고 싶은 프로그램 1위로 회자되고 있는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최불암이 분한 수사반장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최 고문의 요즘이 궁금했다. 지난 7월 30일 오후 에스원 본사에서 최 고문을 만났다.
“
이늙은 사람 소식을 누가 궁금해 한다고…. 허허.”
정장에 넥타이를 말쑥하게 차려입은 노신사는 함박웃음으로 기자를 반겼다. 젊은이 못지않게 단단한 체격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세월 강력반 형사로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낡은 점퍼와 운동화 차림으로 지냈던 최 고문에게 정장은 의외로 잘 어울렸다. 하긴 삼성그룹 고문으로 제2의 인생을 살아온 지도 벌써 18년째니 그럴 만도 했다. 호탕한 목소리와 또박또박한 발음, 반듯한 걸음걸이…. 팔순을 앞두고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최 고문은 건강해 보였다.
최 고문은 우선 현재 몸담고 있는 에스원에서의 생활에 대해 입을 열었다. 현재 그는 삼성그룹 전체 임직원을 통틀어 최고령이다.
“어느 기업에도 내 나이는 없어요. 삼성 같은 굴지의 그룹에서 나를 채용한 것은 그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 에스원에서 하는 일이 내가 해왔던 업무와 굉장히 연관이 많거든요. 공직이냐 사설업체냐는 차이가 있을 뿐 내 전문분야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죠. 또 40여 년을 공직에 몸담으면서 청렴하게 살아온 이미지를 그룹 측에서 좋게 봐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최 고문은 현장에서 익힌 노하우와 경험을 살려 회사에 재직 중인 전문가들과 함께 민간 치안·안전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사고 발생 시 고객들의 민·형사상 사건자문 및 영업지원, 사원교육과 고충처리까지 다양하고 폭넓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또 이건희 전 회장 및 가족 등 사주와 고위 경영진들의 안전과 신변보호를 책임지는 일에도 관여한다고 한다.
‘경찰과 연계한 방범체계 시스템’은 보안업계의 선두에 있는 에스원이 진행하고 있는 최고의 서비스라 할 수 있다. 특히 민·형사적인 문제를 신속하고 깔끔하게 해결하는 데에는 정통 수사관 출신인 최 고문만 한 전문가가 없다. 이에 최 고문은 지난 7월 25일 삼성 측으로부터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상금 500만 원의 대부분을 복지기금 및 장학금으로 내놓은 최 고문은 정작 수중에 남은 돈은 거의 없지만 더없이 뿌듯하다며 웃어보였다.
에스원 고문직 외에 최 고문은 경찰청 수사연구관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 고문의 기상시각은 새벽 4시 반. 그는 6시 30분이면 어김없이 경찰청으로 출근해 밤사이 발생한 사건사고를 체크하고 필요한 경우 그동안의 직감과 노하우가 총동원된 수사 스킬 등을 후배들에게 알려주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다. 또 이번 ‘강화 모녀 실종’ 사건처럼 강력사건 발생 시에는 직접 현장을 들러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다. 그리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 근무하는 후배 형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애정이 듬뿍 담긴 ‘밥값’을 찔러 넣는 일도 잊지 않는다. ‘아무리 바빠도 끼니는 거르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보통 퇴직한 수사경찰들이 맡을 수 있는 수사연구관은 61~65세에 해당할 경우 소정의 보수가 지급되지만 그 연령 범위를 벗어난 최 고문은 무보수다. 퇴임 후 18년 동안 무보수로 일하고 있는 이유는 최 고문의 생활이 넉넉하기 때문이 아니다. 총경까지 했지만 최 고문은 그 흔한 강남의 집 한 채 없이 서울 변두리의 오래된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오랫동안 공직생활을 하면서 재물을 모으지 못했고 자식들에게 남겨줄 것도 없지만 연금도 있고 삼성그룹에서 받는 보수도 있으니 노후 걱정은 없다는 것이 최 고문의 얘기다.
“수사는 제 인생이었어요. 제가 총경으로 퇴임할 때 주변에서 그랬어요. 40년간 현장에서 터득한 수사 스킬과 노하우는 몽땅 내려놓고 몸만 가라고…. 저 역시 아낌없이 주리라 마음먹었죠. 수사연구관 신분으로 매일 경찰청에 출근하는 이유도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예요. 경찰청 103호가 내 방이죠. 하하. 퇴임한 전 총경이 일선 수사현장에 드나들며 ‘감 놔라 배 놔라’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지나 않을까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현장에서 터득한 수사스킬과 사건 분석력만큼은 아직도 녹슬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경찰대학에서 강의를 워낙 많이 하다 보니 까마득한 후배들도 다 알아보고 대우해 주더라고요. 고마운 일이죠.”
실제로 서울 중부서 형사계 근무를 시작으로 서울지방경찰청 강력계장과 형사과장 등을 거치며 40년을 강력사건(살인 강간 강도 방화) 수사에 매달렸던 최 고문은 재직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강력 엽기 사건들을 수두룩하게 해결하며 베테랑 수사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1300여 명의 강력범을 체포했으며 특히 변사사건을 유난히 많이 취급해 직접 다룬 사체만도 어림잡아 2700여 구에 달한다니 그의 일상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오랜 세월 ‘형사’로 살아온 흔적은 나이가 들어서도 지울 수 없는 것일까. 순경에서 총경까지 승진을 하면서도 이례적으로 단 한 번도 강력계를 떠난 적이 없었던 최 고문은 그 누구보다도 형사만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예리한 직감과 눈썰미, 판단력을 중요시해왔다. 그리고 현역시절 현장에서 익힌 그 기질들은 지금도 여전하다.
“제 일터는 오로지 수사현장이었죠. 서장도 한번 못해봤잖아요. 하하. 그래서인지 지금도 사체 감식이나 그런 것들은 자신 있습니다. 사체를 보면 죽은 지 얼마나 됐는지 정도는 기본이고요. 범인이 어느 쪽 손으로 어느 방향으로 찔렀는지, 오른손잡이인지 왼손잡이인지 다 알아낼 수 있어요. 또 웬만한 사건들은 발생 당시 상황도 추측할 수 있죠. 내가 40년 동안 해왔던 일이니까요. 사체는 말을 합니다. 모든 단서는 현장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현장을 누비며 익힌 실질적인 수사 스킬이 그만큼 중요한 거죠.”
“그 정도했으면 형사업무에 몸서리가 날 만도 한데 요즘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경찰청에 매일 들르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최 고문의 답변은 너무도 간단했다. “내 천직이기 때문에 그래요. 난 아직도 어떤 사건이 터졌는지가 궁금하거든요.”
특히 온갖 강력사건들이 총집결되는 서울청 생활은 심신이 고달팠지만 단 한 번도 경찰이 된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고 한다. 특히 각종 위험요소에 직면해 있는 강력반 형사는 최 고문에게 더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직업이었다고.
“집에도 며칠씩 못 들어가고 고생 고생한 끝에 ‘내로라’하는 악질 강력범들의 손에 ‘철커덕’ 수갑을 채웠을 때의 희열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정의는 불의를 이긴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들어줬으니까요. 하지만 범인들에게는 원수가 따로 없었겠죠. ‘두고 보자’는 말을 듣는 것은 예삿일이었어요. 심지어 내 손에 검거되어 사형수가 된 젊은이로부터 ‘지옥에서 만납시다!’라는 서슬 퍼런 절규를 듣기도 했죠. 하지만 증오와 원망으로 가득 찬 그 목소리와 살기 어린 눈빛은 지난 94년 11월 임파선 암을 선고받고 지독한 절망에 빠져있을 당시 오히려 나 스스로를 이겨내는 계기가 됐어요. 펄펄 날아다니던 내가 암 판정을 받았을 때 그 충격이 얼마나 컸겠어요? 자살을 생각하고 병원을 빠져나와 뒷산에 올라갔는데 그동안 내 손으로 잡았던 범인들의 얼굴이 떠오르더라구요. ‘내가 암에 걸려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아마 잘 죽었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이까짓 암 하나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가면 그들에게 지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길로 산을 내려왔죠.”
최 고문은 드라마 <수사반장>에 등장하는 형사 캐릭터만으로는 부족할 만큼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왔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극적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범인에게 맞고 터지고, 어디 한군데가 부러지고 하는 것은 그 시절 누구나 겪는 형사의 숙명이었다. 특히 범인이 휘두르는 일식집 회칼을 맞고도 살아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고. 하지만 첫 번째 암 선고를 받고 항암치료를 받았던 최 고문은 그로부터 꼭 10년 만인 2004년 11월 다른쪽 임파선에서 악성종양이 발견됐다는 통보를 받고 또다시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다. 또 재작년에는 한 모임을 주관하다가 3층 건물에서 떨어져 목뼈가 부러져 대수술을 받기도 했다. 하반신이 마비되는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극적인 수술 성공으로 인해 최 고문은 현재 거동에 거의 불편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정정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최 고문은 이렇게 얘기한다.
“그래도 내가 큰 욕심 없이 청렴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늘이 도와주신 것 같아요. 암이나 사고로 비참한 말로를 보낼 팔자는 아닌거지요. 특히 내가 잡아넣은 범인들과 지옥에서 만날 운명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최 고문은 얘기한다. 어떤 인생길을 걷든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아름답다고. 또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축복이자 행복이라고. 이 때문일까. “나는 다시 태어나도 경찰을 택하겠다”는 최 고문은 “경찰이어서 진정으로 행복했다”고 버릇처럼 말하곤 한다.
‘노마지지(老馬之智)’라는 말이 있듯 수사형사로 재직하면서 깨우친 소중한 경험과 지혜, 직관들을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있는 최 고문의 하루는 요즘도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수사현장을 헤집고 다니던 혈기왕성한 강력과장의 모습은 세월의 흔적에 떠밀려 빛바랜 추억이 되었지만 그가 썼던 책의 제목처럼 ‘우리들의 영원한 수사반장’인 최중락 전 총경의 ‘범죄와의 전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최중락 전 총경의 주요 강력사건 10
·1959년 서울 필동 일가족 몰살사건
·1970년 김포 고척면 여자 택시기사 피살사건
·1976년 육일사 전당포 살인사건
·1979년 서울 금당 골동품상 일가족 살인사건
·1982년 퇴폐이발소 면도사 독살사건
·1984년 을지병원 독살사건
·1987년 국일관 나이트클럽 종업원 살인사건
·1989년 논현동 대저택 강도사건
·1989년 운전기사 치정살인사건
·1990년 구로동 샛별 룸살롱 난자 살인사건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