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튀는 전쟁보다 즐기는 축제로
▲ 유럽 콩그레스는 여름 휴가기간 느긋하게 바둑을 두고 즐기는 축제 같은 대회다. | ||
대회장은 처음엔 수백 명이 북적대면서 성황을 이루지만 한 판이 끝나면 절반이 탈락하고, 탈락한 사람들은 우르르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몇 회전을 거치고 나면 대회장은 그냥 썰렁해진다. 마지막 시상식 시간에는 입상자 몇 명과 그들의 지인들 몇 사람이 남을 뿐이다.
우승-준우승자만이 빛을 보게 되니 중저급자들은 대회라고 나가 봐야 재미가 없다. 상금을 바라고 출전하는 이른바 세미프로들의 들러리가 된다.
또 주말 이틀에 대회를 끝내야 하니 하루에 몇 판씩을 두어야 한다. 바둑의 본령인 차분히 생각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바둑TV가 중계라도 할라치면 TV 방영이라는 제약 때문에 부득이 속기전이 된다. 그런데 그런 바둑TV의 캐치프레이즈가 ‘생각의 힘’이다. 묘한 일이다. 바둑은 시간의 게임이다. 그건 바둑의 숙명 같은 것.
바둑대회의 모습이 변하고 있는 것은 이런 종래 대회의 폐단을 사람들이 느끼고 깨닫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대회’라는 명칭도 자연스럽게 퇴색하고 있다. 대회라는 이름을 달고서는 어차피 종래의 양태를 답습하게 되는 것. 그래서 이제 대회라는 이름은 점점 사라지고 그 양상은 ‘바둑 축제’가 되어가고 있다.‘바둑을 축제처럼 즐기는’ 것은, 유럽에서는 아주 익숙한 일. ‘유럽 바둑 콩그레스’는 하나의 좋은 견본이다. 어제 오늘 시작된 게 아니다. 올해로 52회째.
콩그레스는 앞에 유럽이라는 말이 붙기는 하지만 오픈전이다.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나 참가할 수 있다. 열리는 날짜가 유럽의 여름 휴가철, 매년 7월 마지막 주에서 8월 첫째 주로 일정하며 경치 좋은 곳, 역사적인 곳, 유럽의 각 도시를 순방한다. 누구나 짐을 꾸려 어디론가 떠나고 도시는 텅 비는 그 기간에 유럽의 바둑광들은 가족, 연인과 함께 바둑을 찾아 황금 같은 2주간의 휴가를 오로지 바둑에 바친다. 참가비가 우리보다는 비싸다. 우리는 보통 1만~3만 원선인데, 콩그레스의 경우 보통 10만 원이 넘는다. 그러나 참가해서 다양한 바둑 프로그램, 바둑의 ‘뷔페’를 즐겨 보면 그만한 값을 한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2주일 동안 하루에 한 판씩(중간에 하루는 관광을 하고) 모두 10판을 두는 메인토너먼트(이름에는 토너먼트가 붙었지만 실제로는 맥마흔시스템으로 진행하는 스위스식 리그다) 외에 위크엔드 토너(토·일 주말에 열리는 대회), 속기대회 9×9(9줄바둑)대회, 페어대회, 장기 대회, 주사위게임 같은 것도 있고 중간에 축구 대회, 디스코 경연대회 같은 양념이 있다.
대국이 끝나면 그 자리에서 또 한두 시간 복기를 하고, 상수를 찾아다니며 대국 한 판, 한 수 가르침을 청한다. 카페에도 테이블마다 대개는 바둑판이 놓여 있다. 마시면서 두고 얘기하면서 연구한다. 잔디밭에도 바둑판이다. 해바라기를 하면서 바둑을 둔다.
맥마흔시스템(Macmahon-System)도 그럴 듯하다. 우리처럼 급수를 높였느니 치수가 안 맞는다느니 할 게 없다. 참가자들은 자기가 신청서에 기록한 단급에 따라 아마 6~7단 실력의 최강조와 중-저단자, 고급자, 중저급자 등으로 나누어 대국을 하게 되는데, 한판 한판의 승패에 따라 자동으로 승-강단(급)이 이루어지면서 자기 조가 바뀔 수 있다. 강한 사람, 성적이 좋은 사람과 둘 경우와 약한 사람, 성적이 좋지 않은 사람하고 둘 경우 각각 점수도 달라진다. 강한 사람을 이기면 높은 점수를 받고 약한 사람을 이기면 이겨봤자 점수가 얼마 안 된다. 따라서 굳이 자기 실력을 감추거나 속일 이유가 없다. 바둑은 극동의 나라들이 강하지만 바둑 운영의 소프트웨어는 저들이 훨씬 앞서 있는 셈이다.
극동의 바둑 강국들에서도 요즘 이런 식의 콩그레스가 하나둘 생기고 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승부가 바둑의 본령이지만 그렇다고 승부가 바둑의 전부는 아니니까. 더욱이 아마추어에게는.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