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가면 학살 피할 수 없다”
친박 핵심부가 ‘김무성 대항마’를 찾기 위한 비공개 모임을 추진 중인 정황이 포착돼 관심을 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9월 16일 청와대에서 새누리당 지도부를 접견하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 10월 22일 오후 김무성 대표가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보수혁신특별위원회 회의장에 예고 없이 나타났다. 당시 자리에 있던 기자들과 당 관계자들 이목이 김 대표에게로 쏠렸다. 중국 방문 기간 개헌론 언급으로 정치권을 발칵 뒤집어놓은 데 이어 공무원연금 개혁 시기를 놓고 청와대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치권 주변에서는 21일 청와대로부터 ‘경고장’을 받은 김 대표가 반격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적지 않았었다. 김 대표 측근 역시 22일 오전 기자들에게 “김 대표는 파이터 기질이 있다. (청와대가) 걸어온 공격을 피하진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예상을 깨고 ‘백기’를 들었다. 김 대표는 “대통령과 나를 싸움 붙이려 난리인데 절대 싸울 생각이 없다. 공무원연금 개혁은 선거에 큰 지장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하지 않으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는 생각으로 당·정·청이 의기투합해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공무원연금 개혁 시기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진 않았지만 ‘역사의 죄인’과 같은 표현을 써가며 사실상 연내 처리를 원하는 청와대에 동조하고 나섰다. 김 대표는 공무원연금 개혁안을 대표 발의할 것으로도 알려졌다. 또 개헌론에 대해서는 “나는 ‘어’라고 얘기했는데 언론에선 ‘아’라고 보도가 됐다. 억울하다”며 책임을 언론에 돌리기도 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김 대표가 박 대통령과의 힘겨루기에서 밀린 것이란 관측에 무게가 실린다. 21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김 대표의) 개헌 발언을 실수로 보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한 이후에 김 대표가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란 얘기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해당 멘트는 박 대통령이 직접 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된다. 박 대통령 의중이 100퍼센트 담겨 있다”며 “집권당 대표가 외국에 나가 대통령과 엇박자를 내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해 VIP(대통령)가 상당히 언짢아했던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더군다나 최근 여의도를 중심으로 김 대표를 겨냥한 표적 사정설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다는 점도 김 대표에겐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가 김 대표를 향해 정면 대응에 나선 것은 그만큼 현 상황을 위기로 받아들이고 있는 까닭에서다. 김 대표가 ‘인사 참극’을 지적하며 여러 차례 김기춘 비서실장을 공격했을 때도, 친박계 의원들이 김 대표 독주를 저지하기 위해 SOS를 보냈을 때도 침묵했던 청와대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김 대표 정치 일정은 2017년 대선에 맞춰져 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체급을 키워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현직 대통령과 카운터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이를 청와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김 대표에 대한 ‘무시 작전’을 썼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결국 청와대가 ‘폭발’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상당히 정제된 수준으로 발언했지만 내부에선 김 대표를 향한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나왔다고 한다. 집권당 대표가 대통령 임기 초반 원활한 국정운영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사사건건 딴죽을 걸고 나서는 것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다. 앞서의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집권 여당 대표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키는지 본인도 잘 알 것이다. 김 대표가 사과를 하긴 했지만 진심은 아니지 않겠느냐. 김 대표가 본인의 대권만을 위한 정치 행보를 계속할 경우 묵과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청와대는 2016년 총선 공천을 좌지우지할 당협위원장 인선과 관련 김 대표 측이 친박 인사를 물갈이하려는 움직임(<일요신문> 1171호 ‘친박 대학살 논란 김무성 살생부 실체’ 보도)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김 대표 정치적 입지에 타격을 주는 동시에 흐트러진 친박 진영을 재정비하겠다는 구상도 여기에서 비롯됐을 것이란 관측이다.
친박계 중진 의원은 사석에서 “박 대통령은 ‘나를 따르라’ 리더십형이다. 그동안 여러 번 위기를 앞장서서 헤쳐 나갔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없으니 친박 의원들이 좌충우돌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청와대 고위 관계자를 통해 친박 의원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 같다”면서 “박 대통령 지원사격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친박 의원들이 예전처럼 김 대표에게 당하고만은 있지 않을 것”이라고 점쳤다.
이처럼 박 대통령의 ‘완승’이란 평이 나오고 있긴 하지만 김 대표 역시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는 반박도 적지 않다. 오히려 ‘대권주자로서의 김무성’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효과를 거뒀다는 얘기도 나온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김 대표 취약점은 대중성이다. 그런데 대통령과 싸우면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김 대표는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라면서 “지금 당장은 현직 대통령에게 꼬리를 내리며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청와대에 할 말은 하겠다’는 취임 당시의 말을 실천했다는 것은 향후 김 대표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핵심 친박 인사들 역시 김 대표가 한 발 물러서긴 했지만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 전략을 구사했을 뿐이란 반응이다. 김 대표가 대권을 꿈꾸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든 비슷한 상황이 반복될 것이란 우려도 팽배하다. 친박 홍문종 의원은 김 대표의 개헌 발언에 대해 “김 대표가 차기 대권 스케줄에 비춰볼 때 정치적인 어젠다를 선점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변에서 말하니 유혹을 참지 못한 것 같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얼마 전 당·청 핵심 친박 인사들이 은밀히 모임을 가진 것도 김 대표에 대한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차원으로 전해진다. 10월 중순경 서울 광화문 인근 음식점에서 처음 만난 이들은 주요 현안뿐 아니라 차기 대권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이를 전해들은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대통령 집권 2년차에 주류 실세들이 벌써부터 차기 대권을 논의한다는 것은 이례적”이라면서 “이는 그만큼 김무성 대표 체제 하에서 친박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차례 정기적으로 만나 차기 대선과 관련해 수집한 정보를 교환, 축적할 예정이다. 특히 김 대표에 맞설 수 있는 인적 데이터를 모으는 데 중점을 둘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모임에 참석했다는 한 친박 관계자는 “지금 친박엔 이른바 ‘선수’가 없다. 박 대통령 후계자를 빨리 키워내는 게 급선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학계를 비롯해 다양한 직업군을 접촉하기로 했다”고 털어놨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친박에서 차기주자로 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최 부총리로는) 약하다. 김 대표와 치고 싸울 수 있는, 전투력 있고 대중성 높은 정치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최 부총리 역시 원점에서 경쟁해야 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