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왼쪽부터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 한나라당 이재오 박성범 의원(왼쪽부터) 등 수도이전반대시위 참석자들. 청와대사진기자단 | ||
행정수도 이전은 정치적으로 2002년 대선 당시 이를 공약으로 내건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승리함으로서 당위성을 획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참여정부 출범 후 2003년 12월 여야 합의로 ‘신행정수도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추진의 법률적 요건도 갖춘 상태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이 같은 정치적-법률적 근거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이전 문제가 처음 제기됐던 2002년 대선 때보다 찬반 논란이 훨씬 더 거세지고 있으며, 여야 모두 명운(命運)을 걸고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제2의 대선 불복’이라 주장하는 여권과 50%를 넘는 반대여론을 내세워 ‘민심은 천심’임을 강조하는 한나라당이나 서로 물러설 기세는 커녕 ‘일전불사’의 의지를 다지고 있는 형편이다.
여권은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나서 “(행정수도) 이전 반대론을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 또는 퇴진운동으로 느끼고 있다”(8일)며 초강경 입장을 천명한 이후 반대세력에 대한 공세강도를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의 ‘이전 반대론=재신임·퇴진 운동’ 발언이 특유의 ‘편가르기’ 수법으로 최근 연이은 악재로 발생한 여권의 위기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여야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양측 진영 내에서 행정수도 공방을 당장의 정국 주도권 장악을 위한 ‘전술적-일과성’ 쟁점이 아닌 차기 정권 재창출 또는 탈환과 연계짓는 ‘전략적-지속성’ 사안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4·15 총선 직후부터 “20~30년 집권을 위한 토대 구축”(열린우리당 정동영 전 의장, 4월23일)을 강조해 온 여권이나, 서울 염창동 새 당사 화단에 2007년 대선 승리를 다짐하는 뜻에서 ‘기다림 2007’이라 명명한 소나무를 심은 한나라당 모두 집권이라는 ‘창(窓)’에 비춰 행정수도 문제에 대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행정수도 공방을 “차기 정권 쟁탈전의 서막”으로 규정짓고 총력전에 나선 여야의 속내를 들여다 봤다.
먼저 여권은 노 대통령이 자신의 진퇴 문제와 직결시킨 것에서 드러나듯 행정수도 이전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강행하겠다는 단호한 입장이다. 그런 만큼 내세우는 논리가 무엇이든 간에 이전에 반대하는 세력과의 타협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면에는 행정수도 이전 반대를 주도하는 집단은 2002년 대선에서부터 3·12 탄핵사태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노 대통령-참여정부에 적대적인 반감을 유지해온 세력들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여권의 강경입장은 핵심인사들의 입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은 “(행정수도 이전 반대론엔) 대통령과 참여정부에 대한 거부감 내지는 지난 대선결과에 대한 불인정 같은 것이 들어 있다. 노 대통령을 후보 때부터 반대하고 탄핵에 찬성했던 분들이 연계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전 반대론=재신임-퇴진 운동=제2 탄핵세력’이란 ‘삼단 논법’이라 하겠다.
여권 핵심부는 또 이전 반대론자들이 정치적으론 극단적 ‘반노(反盧)세력’, 경제-사회적으론 ‘수구-기득권 세력’임을 강조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이를 “지금 행정수도 반대 여론이 모아지는데 이를 앞장서서 주도해 가고 있는 기관들은 서울 한복판에, (정부)중앙청사 앞에 거대한 빌딩을 갖고 있는 신문사가 아니냐. 수도권의 집중된 힘은 막강한 기득권과 결합돼 있다”고 표현한 바 있다.
천정배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는 한술 더 떠 이전 반대론의 지역적 배경을 거론하고 나섰다. 천 대표는 11일 기자들과 만나 “행정수도 이전 반대는 ‘정권 흔들기’다. 지역주의적 배경이 존재하며, 그 저변에는 수도권의 부유층 상류층의 기득권 보호적인 측면이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천 대표가 지역주의의 구체적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서울 강남 등 수도권 부유층 중 영남 출신의 비율이 높고 한나라당의 절대적 기반이 영남권이란 점을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여권은 같은 맥락에서 일부 보수언론이 총대를 메고 제기한 이전 반대론에 한나라당이 가세한 배경을 차기 정권 장악을 위한 전략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수도권 유권자들을 타깃으로 행정수도 이전시 자산가치 하락을 우려하는 보수 부유층은 물론 막연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는 중간층을 지지층으로 견인, 기존의 핵심 지지기반인 영남권과 결합시켜 정권 탈환의 토대를 구축하려 한다는 것이다.
▲ 행정수도 예정지인 충남 연기군 남면 일대. | ||
열린우리당내 대표적인 ‘기획통’인 이강래 개혁기획단장은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은 행정수도 문제를 계속 끌고 가서 지방선거 때 활용하고, 대선 때 수도권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인 것 같다. 이들은 그런 상황이 되면 행정수도 이전을 좌초시키고 노무현 정부도 좌절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이대로 가면 행정수도 이전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여권 내에선 행정수도 이전 논란을 조기에 매듭짓지 못할 경우 향후 정치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우려가 적지 않다. 열린우리당 한 의원은 “내년 4~5월께로 예상되는 재·보선 때까지 행정수도 이전 반대론을 완전히 제압해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전통적으로 재·보선에 강한 한나라당이 이를 선거전 이슈로 삼아 승리하게 되면 논란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2006년 지방선거 때까지 부정적 영향이 올 것이고, 지방선거에서 패배한다면 이듬해 대선도 힘들어진다. 여권이 행정수도 문제에 총력대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고 말했다.
여권은 이 같은 인식하에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찬반을 ‘개혁 대 수구’의 구도로 끌고 가기 위해 전력을 경주하고 있다. 특히 최근 이탈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전통적 지지층의 재결집을 위해 ‘개혁 드라이브’를 강화해 핵심 전선인 행정수도 공방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가 가시화되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언론개혁과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 신설과 불법 국고자금 환수법 제정 등을 뼈대로 하는 반(反) 부패 입법, 친일진상규명법 제정 및 KAL기 폭발사건(87년), 군 의문사 사건 진상조사 등 이른바 ‘과거사 바로잡기’ 등 최근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고 있는 개혁 프로그램 등이 대표적이다.
한나라당 역시 행정수도 공방에 밀릴 경우 정권 탈환이 난망하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긴 마찬가지. 대선 2연패에, ‘탄핵 역풍’으로 몰락 위기에서 기사회생한 한나라당으로선 2002년 대선에 그야말로 존망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자신들의 지지기반 약화-여권의 입지 강화로 이어질 행정수도 이전에 사활을 걸고 반대할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무엇보다 여권의 행정수도 이전계획에 브레이크를 걸지 못할 경우 차기는 물론 차차기 대선에서도 승리할 수 없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한나라당 한 의원은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장기집권을 위한 여권의 정략이 뚜렷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입지 선정은 올해 하반기에 확정되지만, 부지 조성과 청사 신축 등은 대선이 있는 2007년 하반기 부터 시작된다. 대선이 있는 해에 수도 이전이 가시화되면 국민적 관심은 이 문제에 쏠릴 수밖에 없고, 그러면 야당으로선 속수무책의 상황을 맞게 된다. 여기에 주요 국가기관의 이전도 18대 대선이 있는 2012년부터 진행된다. 지난 대선에서 행정수도 이전 공약으로 재미를 본 여권이 향후 두번의 대선에서도 이 사안으로 승부를 걸려고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은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 추진에 담긴 여권의 의도를 이같이 분석하면서도 ‘전면 반대’에 나서지는 못하고 있다. 충청권 표를 의식해서다. 97년 대선에선 ‘DJP 연합’으로, 2002년 대선 땐 신행정수도 문제로 충청권 때문에 연패한 한나라당으로선 ‘행정수도 이전 반대=충청권 버리기’를 명확히 하기가 쉽지 않은 탓에서다.
하지만 당내에선 수도권, 영남권 의원들을 중심으로 이미 여권의 핵심 지지기반이 된 충청권을 포기하고, 대신 수도권에서 지지층을 넓혀가자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홍준표 의원은 “반대다운 반대도 못하고 중간지대에서 여론의 눈치를 봐서는 안된다. 과감한 지방분권 대책을 내놓고 수도 이전을 반대해야 하며, 그래도 안되면 노 대통령의 신임을 걸고 수도 이전에 대해 국민투표를 실시하자”고 제안하고 나섰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당내 중진들을 중심으로 행정수도 공방과 맞물려 한나라당 내에서 내각제 개헌으로 정권 장악을 도모해야 한다는 견해가 고개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내년이면 개헌문제가 공론화될 가능성이 크고, 박근혜 전 대표-이명박 서울시장-손학규 경기지사 등 당내 차기 주자들론 대선 승리를 낙관하기 어려운 현실을 염두에 둔 주장이다.
한 중진은 “대통령제의 폐해가 드러났고 여권의 ‘바람몰이’ 능력을 감안할 때 한나라당이 선택할 수 있는 안정적 집권방안은 내각제 개헌밖에 없다. 특히 내각제로 방향을 잡으면 행정수도 이전 공방에서 ‘소수’인 충청권 눈치 볼 필요 없이 ‘다수’인 수도권을 껴안기가 수월해진다. 박근혜 전 대표도 이제는 자신의 대권욕망에서 벗어나 냉철하게 내각제 개헌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여권발’ 내각제 추진 가능성을 거론하는 이들도 적지않다. 정형근 의원은 이해찬 총리와 정동영 통일부 장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등 여권내 차기 주자들의 입각에 대해 “(노 대통령의) 내각제에 대한 열망과 준비, 테스트다. (내각제를 위한) 실험 무대로 삼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평가해 주목을 끌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