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위에 청와대’ 자신감이 지나치면…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을 한 후 의원들과 악수하는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이참모의 말처럼 FA-50에 시승했을 때, 또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의 축하 에어쇼를 지켜볼 때 박 대통령의 표정은 말 그대로 ‘만개’했다. 블랙이글을 비롯한 공군 비행기들이 위용을 뽐내는 동안 박 대통령이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는 게 현장에 있던 인사들의 전언이다. 이 참모는 “VIP가 탄력을 받았을 때의 얼굴 표정이 있다”면서 “최근의 표정은 지난 대선 전 새누리당 혁신위원회가 착착 일을 진행하면서 선거 분위기가 뒤바뀔 당시 이후 가장 밝아진 것 같다”고 평가했다.
표정 변화와 맞물려 박 대통령은 최근 ‘광폭행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부쩍 거침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8일 김대중 전 대통령(DJ) 부인 이희호 여사를 청와대로 초청해 환담했고 다음날인 29일에는 국회를 방문해 내년도 정부 예산안 시정연설을 한 뒤 여야 지도부와 회담을 가졌다. 30일에는 강원도를 방문했다.
이런 일정은 자신감에서 나온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우선 DJ는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설명이 필요 없는 정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박 대통령이 먼저 이 여사에게 초청 의사를 밝혔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청와대와 김대중평화센터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이 여사를 초청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고, 이번에도 박 대통령은 차를 곁들인 환담이 아니라 식사를 모시고 싶다는 뜻을 전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통령은 북한 어린이 돕기 차원에서 방북하고 싶다는 이 여사에게 “기회를 보겠다”고 화답하기도 했다.
여야 당대표와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등과의 회담도 예상보다는 빨리 이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청와대는 최근 야당뿐만 아니라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 지도부와도 껄끄러운 사이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박 대통령은 1년여 전인 지난해 9월 16일 당시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국회에서 회동했다가 서로 얼굴만 붉히고 헤어졌던 기억을 갖고 있다.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를 방문하고 경기장 건설 현장 등을 둘러본 것은 동요하고 있는 강원도 민심을 다독이는 차원으로 해석되고 있다. 올림픽 경기장과 관련 인프라 건설이 지지부진한 데다 설상가상으로 최근에는 개·폐회식이 치러질 메인스타디움 건설부지를 둘러싸고 평창과 강릉이 맞서며 집안싸움까지 벌이는 양상이었다. 이런 점을 의식한 듯 박 대통령은 올림픽 관련 시설과 훈련장 건설을 서두르라고 지시하면서 올림픽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강원도 관광산업 활성화 방안까지 언급했다.
이런 광폭행보와 별개로 박 대통령의 ‘경제 올인’ 기조는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지난 29일 박 대통령이 200자 원고지 86장, 낭독에만 37분이 걸린 방대한 분량의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면서 ‘세월호’, ‘헌법 개정’, ‘전시작전통제권’ 등 최근의 핫이슈는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은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반면 ‘경제’는 59번이나 나와 최다 사용 단어가 됐다.
여야 지도부 회담. 사진제공=청와대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이번 시정연설문이 전체적으로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이행에 초점을 맞춰 작성됐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은 단적으로 “내년도 예산안은 경제혁신 3개년에 맞춰 편성된 첫 번째 예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은 박 대통령이 지난 2월 25일 임기 2년차의 문을 열어젖히면서 야심차게 발표한 경제살리기 청사진이었다. 하지만 곧 이어 세월호 참사가 터진 데다 최경환 경제팀 출범 후 소위 ‘초이노믹스’에 가려지면서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청와대 관계자들이 이번 시정연설에 대해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재조명과 복권”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원대한 계획이었지만 올 한 해 동안 표류했던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실행 단계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면서 “대통령이 임기를 3년 남긴 시점에 3개년 계획을 다시 꺼내든 것은 남은 임기 내내 경제살리기에 매진하겠다는 선언과도 같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이 개헌론을 비롯한 여러 가지 곁가지들을 쳐내고 앞으로도 로드맵에 따라 경제 올인 기조를 이어갈 것임을 시사한다.
청와대 안팎에서는 박 대통령이 자신감을 갖고 광폭행보와 경제 올인 기조를 강화하게 된 중대 분기점이 지난 21일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김무성 대표 공개 비판이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상당히 거칠고 위험부담이 큰 방식이었지만 예상을 뛰어넘은 청와대의 강공은 여권 발 개헌론과 공무원연금 개혁에 대한 회의론을 일거에 날려 버렸다는 것이다.
한 새누리당 고참 당직자는 “청와대가 의도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김태호 최고위원의 사퇴 선언까지 겹치면서 현재로선 김무성 대표가 완벽하게 청와대에 제압당한 모양새가 됐다”며 “개헌과 공무원연금 개혁을 둘러싼 논란을 정면돌파하기 위한 청와대의 승부수가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정국의 주도권을 쥐락펴락하는 현재의 양상이 과연 오래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내년도 예산안과 공무원연금 개혁안, 세월호특별법안, 주요 경제살리기 관련 법안 등이 올 연말까지 다 처리되고 나면 정치권이 다시 한 번 개헌 논의로 빠져들게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한 새누리당 초선 의원은 “‘개헌에도 골든타임이 있다’는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의 주장에 동조하는 여당 의원들이 무시할 수 없는 규모”라며 “인구편차가 1 대 3으로 돼 있는 현행 선거구제가 위헌 판결을 받은 것도 얼마든지 개헌론과 연결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