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린 ‘비박 잠룡’ 황우여가 오버랩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김 대표가 의원 전원의 서명을 받느라 분투했다고 한다. 과거 당대표실이나 원내대표실에서는 소속 의원 전원의 도장을 모아놓고 당론 발의 법안이 있을 때에는 전화나 문자메시지로 통보한 뒤 도장을 알아서 찍어 제출했다. 하지만 언론 지적이 잇따르면서 도장은 각 의원실로 회수됐다. 그 뒤로는 대표실이나 원내대표실에서 각 의원실로 연락해 직접 도장을 가지고 오도록 하고 있다.
한 의원실 보좌관은 “김 대표의 최측근인 한 의원이 대표발의하기 전날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전화해서는 ‘빨리 도장 가지고 오라’고 독촉했다. 어찌나 서두르는지 도장을 가지고 뛰어 갔는데 그렇게 두셋씩 모여들더라”며 “오던 길에 ‘김 대표가 청와대 마음에 들기 위해 참 애쓰네’ 하는 대화를 나눴다”고 전했다. 정계 정보통으로 유명한 한 인사는 “요즘 김 대표 태도는 청와대 십상시에 더해 십일상시의 모습이라고 비꼬는 사람들도 꽤 있다”까지 했다.
당론 발의는 소속 의원 가운데 단 한 명 예외 없이 전원 발의하는 것으로, 김 대표 체제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의원총회장에서도 김 대표는 “다음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손해를 좀 보더라도 미래 세대의 행복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다. 현장에 있던 한 의원은 “청와대의 십자가를 내가 지겠다는 뜻으로 들리더라”고 했다.
최근 분위기 탓인지 김 대표를 바라보는 의원들의 일부 시선도 싸늘하다. 당의 한 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의원은 “김 대표가 할 말은 하고, 또 별 사심 없이 정치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개헌 이야기를 하루 만에 주워 담는 걸 보고는 저 사람도 참 별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며 “전당대회 때 김 대표가 ‘우리가 만든 박근혜 대통령의 성공이 곧 우리 모두의 성공’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자기의 성공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략적 밀월 기간으로, 일종의 숨고르기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김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정부’, ‘정부는’ 등의 표현을 다수 사용한 것을 두고 일종의 책임전가용 대표연설이라 빗대는 이도 있었다. 여권의 전략 쪽 한 관계자가 들려준 말이다.
10월 2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내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기 위해 입장하며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등 의원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김 대표는 (박 대통령과의 사이에서) 기선을 잡았다고 생각한다. 개헌이라는 다소 시의성 없는 이야기를 꺼내놓고 실수라고 둘러대고는 있지만 개헌은 살아있는 불씨고, 박 대통령으로선 골치 아픈 주제다. 지금은 반성하는 모드지만 언제든 김 대표는 이슈를 끄집어낼 수 있다고 본다. 당에서 무대(김무성 대장의 줄임말)를 심판하는 어떠한 말도 없지 않은가.”
친박계에서는 사무총장을 지낸 홍문종 의원이 김 대표의 개헌론에 직격탄을 날렸지만 전체 의원은 고사하고 친박계조차 집단적으로 말을 받지 않았다. 김 대표에게는 이미 당내에서 그만큼 세력이 생겼다는 이야기였다. 친박계 사정을 잘 아는 정가 인사의 얘기다.
“올해 말 내년 초는 박 대통령으로선 마지막 승부를 걸 시점이고 국민도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있다. 김 대표가 거기에 힘을 실으면서 청와대 협조모드로 돌아선 것으로 분석한다. 하지만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초이노믹스’가 내수진작에 실패하고 공공요금이 인상되는데다 서민증세까지 이뤄지면 김 대표는 언제든 각을 세울 수 있는 사람이다. 친박계에서는 한 번 배신한 사람은 또 그럴 것으로 본다.”
김 대표가 낮은 자세로 돌아왔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전언이다. 당대표 당선 이후 청와대가 대표로서 제대로 예우하고 있지 않은 까닭이 크다. 최근의 예로, 박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 시정연설 이후 당 소속 의원들과 악수를 하며 퇴장했다. 김 대표가 출입구에 있었는데 박 대통령이 그냥 스치듯 인사만 하고 지나갔다. 이를 보던 국회 기자실에서는 안타까움과 탄식, 고소함과 야유 등이 섞인 웃음이 일제히 터졌다. 공식석상에서 박 대통령이 김 대표를 ‘원 오브 뎀’, 즉 다수 의원 중 한 명 정도로 대우했다는 것이다.
관료 출신의 한 의원은 이를 두고 “영수회담은 고사하고 청와대나 국회에서 여당 지도부와 만날 때 박 대통령은 김 대표를 독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원내수석부대표까지 앉혀 놓고 이야기를 한다”며 “대표로서는 참 모욕적일 것”이라고 했다.
최근 김 대표는 사석에서 청와대와의 화해모드가 조성된 것을 꽤 기분 좋게 이야기한다고 전해졌다. 일부 언론은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당론 발의한 김 대표에게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감사 메시지를 전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일 뿐, 정기국회가 끝나면 전략적 밀월관계도 수정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폭풍전야일 수 있다는 얘기다.
선우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