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난 그물 사이로 고래가 달아났다
▲ 조씨는 달아나기 쉽도록 이동차량도 항상 3대 이상 끌고 다닌느 등 치밀함을 보였다. | ||
이른바 ‘조희팔 사건’으로 불리는 4조 원 다단계 금융사기 사건의 주인공인 조희팔 씨의 행적이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조 씨는 지난 12월 9일 새벽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어선을 타고 중국으로 밀항한 것으로 확인됐으나 그 후 행적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경찰 등 관계기관이 안이하게 대응해 희대의 사기꾼을 눈앞에서 놓쳤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밀항을 도운 선주의 제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 씨를 놓친 것은 경찰이 밀항을 방조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피해자들의 주장처럼 과연 경찰이 조 씨를 잡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 씨를 놓쳐버린 것일까. <일요신문>은 밀항을 도왔다는 선주 A 씨의 말을 토대로 조 씨의 밀항 과정을 되짚어봤다.
조희팔 씨의 측근들이 선주 A 씨에게 처음 접촉했던 것은 지난 10월 말이었다. 당시는 조 씨의 사기행각이 차츰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던 때였다. 조 씨 일당은 A 씨와 친분이 있는 B 씨를 통해 A 씨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A 씨에게 “자기들이 중국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는데 현재 사기혐의 때문에 출국금지가 돼 있어 나갈 수가 없다. 수배가 된 상태도 아니고 중국에서 급히 해결할 일이 있으니 밀항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밀항을 도운 일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던 A 씨는 이를 거절했으나 그들은 끈질겼다.
“도와줄지는 나중에 결정하고 일단 배를 보여주시오.”
배를 본 후 그들은 본격적인 흥정에 들어갔다. A 씨는 얼떨결에 1000만 원 정도가 든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1000만 원을 더 얹어주겠다고 했다. 얼마 후 그들은 2000만 원을 보내왔고 이 돈을 받은 A 씨는 본격적으로 밀항 작업에 착수했다.
밀항을 도와본 적이 없던 A 씨는 두려운 마음이 앞섰고 이에 인천과 광양 등에 있는 그 분야 선배(?)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본인이 하는 것보다 경험 있는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조 씨 일당은 A 씨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밀항하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고 심지어는 위조여권을 알아봐 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했다고 한다.
선주 A 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나름대로 알아본 결과 태안을 통해서 중국으로 밀항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밀항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행동은 마치 007작전을 방불케했다. 약속장소를 바꾸는 것은 다반사였다. 가지고 다니는 대포전화만 해도 수십 대였고 이동하는 차량도 항상 3대 이상이었다고 한다. 검문소에서 앞 차가 검문을 당하더라도 뒤차는 달아날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차량은 대부분 BMW, 렉서스 등 고급차였다.
굳이 자기를 통해 밀항을 하겠다는 하는 그들에 대해 A 씨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사기혐의로 출국금지됐다는 사람이 고급 외제차를 3대씩 몰고 다니고 건달 같은 수행원들이 여러 명 따라다니는 점도 석연치 않았다. 차 트렁크에 현금도 가득했다.
이후 A 씨는 조 씨 일당에 대해 의심이 점점 커져 결국 이들을 해양경찰에 신고했다. 그러자 경찰 측은 마약 운송일 가능성을 제기했고 본인을 미끼로 함정 수사를 제안했다는 게 박 씨의 주장이다.
그럼에도 A 씨는 내친 걸음이라 조 씨 일당을 태우고 첫 번째 밀항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 측 배가 나오지 않아 실패로 돌아갔다.
드디어 두 번째 밀항. 당시 바닷가에는 낚시꾼을 가장한 경찰들이 포진해 있었으나 파도가 너무 높아 배가 아예 뜨지도 못했고 조 씨의 검거도 실패했다.
마지막 세 번째 밀항 시도. 해경은 A 씨에게 ‘모 좌표지점에서 중국배와 접선을 하면 우리들이 일반적인 검문을 하는 것처럼 해서 조 씨를 체포하겠다’며 구체적인 계획을 알려줬고 A 씨도 이 지점을 중국 측 어선에 통보했다.
밀항 당일 A 씨는 조 씨를 태우고 드디어 접선지점에 도착했다. 중국배도 나타났다. 그러나 정작 인근에 보여야 할 해경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조 씨는 무사히 중국 측 어선으로 갈아타고 밀항에 성공했다.
A 씨와 조희팔 사기사건 피해자 모임 관계자들은 해경이 조 씨의 밀항을 사실상 방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조 씨가 첫 번째 밀항을 시도하기 전에 이미 서산경찰서에서 조 씨의 수배 전단을 곳곳에 뿌린 상태였다고 한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 씨는 변장을 하고 다녀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 그러나 A 씨가 조 씨를 해경에 신고했음에도 경찰은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 번째 밀항을 시도할 당시에는 변장도 하지 않은 채 해안가를 버젓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또한 A 씨가 조 씨에 대한 신원조회를 수차례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이를 묵살해버렸다고 한다. 반면 조 씨의 밀항을 신고한 A 씨는 오히려 조 씨의 밀항을 도왔다는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경찰 측은 “A 씨가 먼저 마약 운송인 것 같다며 제보를 해왔고 오히려 A 씨 때문에 조 씨를 놓쳐버렸다”고 반박했다. 또한 “수배 전단이 밀항 다음날 배포돼 조 씨인 줄 몰랐다”고 해명했다.
만약 조 씨가 밀항 당시 경찰에 의해 붙잡혔다면 피해자들 중 일부라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찰이 안이하게 대응했다는 비판이 나올 만한 상황인 것. 또한 검찰에서도 사기 사건에 대한 수사가 미진한 것으로 알려져 피해자들의 불만은 더욱 커지고 있다. 수만 명의 피해자를 양산하고 있는 희대의 사기사건은 갈수록 미궁에 빠져들고 있다.
태안=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