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 부대는 가라~ 내부출신 중용 대세!
‘하영구 조직 갈아타기’ 파문으로 금융권에 내부 출신 선호 현상이 확고해졌다. 사진은 씨티은행 본사 입구와 하 전 씨티은행장. 임준선·이종현 기자
경기고-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하 전 행장은 1981년 씨티은행에 입행해 한국씨티금융지주 회장, 한국씨티은행장까지 33년간 금융 외길을 걸어왔으며 씨티은행에는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또 2001년 한미은행장에 오른 이후 한미은행이 한국씨티은행에 인수된 뒤에도 계속 은행장을 맡은 우리나라 최장수(14년) 은행장으로 기록돼 있다.
그런 하 전 행장이 KB금융 회장에 도전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이 하 전 행장은 임기가 남아 있는 현직 은행장이었다. 현직 은행장이 경쟁 은행 수장에 도전한다는 것이 의아했던 것. 금융권뿐 아니라 재계에서도 이 같은 사실을 믿기 힘든 눈치였다. 재계 관계자는 “일반 직장인도 현직에 있으면서 경쟁업체 경력사원 모집에 응모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곤란해 할 정돈데 하물며 CEO(최고경영자)에 해당하는 은행장 신분에 그럴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같은 점들을 의식했는지 하 전 행장은 회장 후보 명단이 발표될 당시 본인 이름이 노출되기를 꺼려했으며 알려진 후에는 “KB금융 회장과 상관없이 이사회에 이미 사임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하 전 행장은 최종 2차 투표까지 접전을 벌인 끝에 윤종규 신임 KB금융 회장에 패배했다. 씨티은행장에서 물러난 그는 이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유인’이 됐다.
그러나 하 전 행장이 금융권에 남긴 파문은 크다. 우선 하 전 행장으로 인해 금융권에 내부 출신 선호 현상이 확고해졌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KB금융 내분 사태가 발단이 되기는 했지만 하 전 행장의 KB금융 회장 도전과 실패가 내부 출신 인사를 우선시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 전 행장은 치열한 접전 끝에 결국 KB금융 회장 자리를 내부 출신으로 분류됐던 윤종규 회장에 내주고 말았다.
KB금융 회장 후보 명단이 발표되면서 금융권 일부에서는 ‘하영구 내정설’이 나돌았다. 뭔가 믿는 구석이 없는 한 현직 은행장으로서 경쟁 금융사 수장에 공개적으로 도전할 리 없다고 풀이됐다. 때마침 신제윤 금융위원장과 친분, 조윤선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과의 관계가 알려지면서 하 전 행장에 무게가 실리는 듯했다.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하 전 행장은 지난 10월 16일 KB금융 회장 후보 2차 명단에 포함됐으며 김옥찬 전 국민은행 부행장, 이동걸 전 신한금융투자 부회장 등 유력 후보들이 낙마하면서 하 전 행장이 유리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금융권 다른 관계자는 “하 전 행장이 신임 회장으로 선임됐다면 KB금융이 더 깊은 나락으로 빠질 수도 있었다”면서 “하 전 행장이 비록 민간 금융인이지만 관치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KB금융 내부 한 인사는 “윤 회장이 내정된 직후부터 KB금융의 앞날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확 늘었다”면서 “내부에서는 하 전 행장이 선임되면 큰일이라는 의견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하 전 행장의 일로 확고해진 금융권 내부 출신 우세 현상은 증권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KDB대우증권이 대표적이다. 현재 대우증권 차기 사장 후보로는 이영창 전 부사장, 홍성국 부사장, 황준호 부사장 3명으로 압축돼 있다. 이 3명이 모두 내부 출신인 데다 대우증권 공채 출신으로서 이들 중 한 명이 차기 사장에 선임되면 대우증권 창사 이래 처음으로 ‘공채 출신 사장’이 탄생하게 된다. 대우증권 관계자는 “그동안 내·외부 출신 사장들이 거쳐 갔지만 공채 신입사원으로 출발해 사장에 오르는 경우는 창사 이래 처음”이라고 말했다.
4개월째 공백 상태에 있는 대우증권 사장 자리는 당초 지난 10월 30일 이사회를 열어 결정할 예정이었지만 11월 14일로 연기된 후 12월 12일로 다시 한 번 연기됐다. 사장 선임 절차가 계속 지연되는 이유에 대해 대우증권 관계자는 “산업은행 국정감사로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신중하고 철저히 하기 위해서라는 의미를 띠었다.
내부 출신 강세가 ‘하영구 효과’로 변화된 점이라면 하 전 행장이 남겨둔 숙제는 금융권의 ‘줄서기’가 여전하다는 점이다. 하 전 행장의 뒤를 이어 씨티은행장에 선임된 인물은 박진회 행장이다. 박 행장은 경기고-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 하 전 행장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직계 후배다. 게다가 한미은행 시절부터 부행장을 지내며 ‘하영구 행장-박진회 부행장’ 체제를 10년 넘게 이어온 하 전 행장의 오른팔로 불린 인물이다. 하 전 행장 역시 씨티은행 차기 행장이 선임되기 전 “차기 행장은 박진회 부행장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금융권의 줄서기와 자기 사람 챙기기의 전형적인 예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임직원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금융의 외길을 끝내려 한다”던 하 전 행장은 전국은행연합회 차기 회장 후보에 올라 있다. ‘관치의 상징’처럼 돼 있는 은행연합회장 후보에 하 전 행장은 당초 물망에 오르지 않았으나 KB금융 회장 도전에 실패한 후 곧바로 유력 후보로 떠올랐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연합회는 산업 쪽에 빗대자면 전국경제인연합회 같은 역할을 하는 단체”라며 “당초 후보 명단에 없다가 KB금융 회장 선임이 끝나자마자 유력 후보로 떠올라 놀랐다”고 말했다. 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KB금융 회장에 도전할 때부터 금융당국이 밀어준다는 얘기가 많았는데 그게 안 되니 은행연합회장으로 돌렸다는 얘기가 있다”면서 “여기저기 될 때까지 찔러보는 식인 것 같다”고 전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