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16일 열린우리당 의원 워크숍에서 참석한 신기남 당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 최근 당 안팎의 악재로 지도부의 영이 안 서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4·15 총선에서 ‘과반 여당’의 위상을 자랑하던 때도 잠시, 정체성 논란에 당 지도부의 리더십 부재, ‘108번뇌’로 불리는 초선들의 돌출 행보에 영·호남 갈등이 이어지는 등 그야말로 ‘바람 잘 날 없는’ 나날이 이어지면서 나타난 결과다. 전통적 지지기반의 급격한 이탈과 지도부-소속 의원, 중진-초선, 의원-당원간 갈등이 겹쳐지면서 핵심 당직자들조차 “개혁에 둔감해진 몸집만 거대한 초식 공룡”(김현미 대변인)이라며 지도부를 비판할 정도다.
한때 40%대를 웃돌던 당 지지율은 20%대 후반으로 하락해 한나라당에 1위 자리를 내주는가 하면 영구불변한 ‘텃밭’으로 여겼던 호남에서는 6·5 전남지사 보궐선거 패배에 이어 “호남 민심은 이미 열린우리당을 떠났다”(김재석 광주 경실련 사무처장)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 여기에 전국정당화의 관건인 영남지역에선 ‘열린우리당=호남당’이란 인식이 굳어지고 있어 당 지도부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고전’은 총선 전 47석의 ‘미니 여당’에서 일거에 1백52석의 ‘거대 여당’으로 변모하면서 예상됐던 일이다. 일부에서는 내부 혼선에 대해 “덩치가 갑자기 커지면서 불가피하게 겪는 ‘성장통’”(신기남 의장)으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외부에서 바라보는 평가는 ‘무책임 여당’으로 요약된다. ‘사분오열’의 양상 속에 벼랑끝으로 치닫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위기를 진단해 봤다.
열린우리당 한 중진은 반복되고 있는 당내 분란의 배경을 한마디로 ‘중심의 부재’로 표현했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DJ) 등과 함께 여러 당에 몸담아 봤지만 열린우리당 같이 무질서하고 근본이 없는 당은 처음이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당 전체가 방향성 없이 표류하고 있어 걱정이다. 지도부는 물론 구성원들 대부분이 ‘여당은 무엇이며, 어떻게 움직여야 하나’라는 기본 인식 자체가 없이 ‘독불장군’마냥 행동하는데 당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고 말했다.
실제 당내에선 신기남 의장-천정배 원내대표의 ‘말’에 무게가 실리지 않은 지 오래됐다. 당원과 평의원은 물론 주요 당직자까지 지도부의 의중에 아랑곳없이 행동하는 경우가 허다한 상황이다. 가장 최근의 예로는 “정부가 국가 정체성을 계속 흔들면 야당이 전면전을 선포해야 할 시기가 올 것”이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언급(7월21일)에 대한 신 의장과 민병두 기획위원장-김현미 대변인의 ‘따로국밥’식 대응을 들 수 있다.
문제의 발언이 전해진 다음날 김 대변인은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삶도 없는 사람들의 정치공세이자 색깔논쟁”이라며 유신체제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 문제까지 들먹이며 박 대표를 강력비판했다. 민 위원장도 박 대표의 행동을 ‘아프리카 반군’ ‘남미 민족해방전선’ 등에 비유하며 “어젯밤 ‘전면전한다’고 해서 전쟁이 일어난 줄 알고 잠을 못잤다. 과거 정당지도자가 전면전이란 용어를 쓴 적이 과연 있느냐. 박 대표가 지금까지 보여줬던 안정기조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고 가세하고 나섰다.
반면 신 의장은 김 대변인, 민 위원장의 ‘강성’ 발언내용이 알려지자 부랴부랴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진화에 나서 대조를 보였다. 신 의장은 “언론에 보도되는 정치인 말은 시간을 두고 음미하면서 구체적인 현상을 보고 판단해야지, 말 한마디 했다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삼가야 한다. 한나라당 지도부 선출과정에서도 드러났지만 한나라당이 변화될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박 대표가 상생의 정치란 화두를 가지고 있다고 기대한다”며 다른 코드로 발언했다. 기자들이 서로 엇갈린 얘기에 황당해 하자 급기야 김부겸 의장 비서실장은 “대변인과 의장이 사전 조율을 못해 죄송하다. 열린우리당에 여러 기류가 있다”며 사과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신 의장은 그러나 이 일이 있고 불과 사흘 뒤인 25일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히 박 대표를 강하게 비판해 기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신 의장은 열린우리당 홈페이지에 올린 글을 통해 “최근 한나라당과 박 대표가 ‘전면전’이니 ‘간첩천국을 만들려 한다’느니 하며 구태의연한 색깔론까지 들먹이며 정치공세를 펴는 것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다. 과거사를 규명한다고 국가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흔들릴 게 있다면 친일과 독재의 전통뿐일 것이다”고 밝혔다. 한 초선 의원은 “며칠 사이에 오락가락하는 신 의장의 태도는 현 당 지도부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고 혹평했다.
천 대표 역시 과반 여당의 원내사령탑으로선 지나치게 ‘가벼운’ 처신으로 당 안팎에서 구설에 오르고 있다. KAL기 폭발사고(87년)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사 필요성을 언급한 것이나 청와대-정부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고위공직자비리조사처에 기소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당내에서는 천 대표가 여권 내 반발이 거세지자 자신의 주장을 유야무야시킨 것과 관련해 “되지도 않을 일을 꺼냈다가 당의 체신만 구겼다”는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도부의 리더십 부재는 당 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주요 원인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한나라당 박창달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을 놓고 의원들과 당원들 간에 반대투표자 색출 파동이 일어난 데 이어 이번에는 열린우리당 노조가 소속 의원 보좌관들 중 일부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 출신 보좌관들의 경질을 요구하는 이른바 ‘살생부’ 파문을 일으켜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이강률 노조 사무국장은 “열린우리당 의원 보좌진 중엔 탄핵안이 가결되던 순간 국회 복도에서 환호하던 사람이 상당수다. 야당 출신이라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탄핵안 가결시의 ‘만세파’를 인정할 경우 탄핵 반대 촛불시위에 나섰던 지지자들이 납득하겠느냐”며 이들의 퇴진을 요구해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한 재선 의원은 노조의 요구에 대해 “여당에 노조가 결성된 것도 상식밖의 일인데, 이제는 개개인이 독립된 헌법기관인 의원의 의정활동까지 관여하려 하니 큰 일이다. 지도부의 말도 안 듣는 의원들이 당원 눈치보는 것도 모자라 이젠 노조 비위까지 맞춰야 한다는 말이냐”며 불쾌감을 표현했다.
기간당원의 요건을 완화하는 문제를 놓고서는 신 의장 등 당권파와 개혁당 계열의 당원들 간에 인신공격도 마다 않는 논쟁이 붙은 상태다. 특히 기간당원 요건 강화를 주장하는 일부 당원들은 ‘전국 당헌당규개악저지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당 지도부를 상대로 ‘전면 투쟁’을 선언하고 나서 당내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다.
‘개잡는 중’이란 ID를 쓰는 당원 윤득종씨는 기간당원 요건 완화를 추진하고 있는 당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린 글을 통해 이강래 정치개혁추진위원장에 대해 “이강래를 따르는 중앙당의 무리들의 가슴에 이제 댓창을 겨눌 때입니다. 개혁을 후퇴시키는 자들은 우리의 동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적입니다. 그들을 죽이지 아니하고는 우리당은 미래가 없읍니다”란 주장을 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당내 ‘영남권 대 호남권’의 반목도 서로를 적대시하는 단계까지 이르러 내부 균열의 핵심요인이 되고 있다. 전통적 지지기반인 호남권과 전국정당화의 관건인 영남권에서 서로 여권 핵심부가 자신들을 ‘홀대’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하면서 양측 모두에서 “이럴 바에야 차라리 분당하는 것이 낫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올 정도다.
우선 6·5 재-보선을 전후해 표면화되기 시작한 ‘호남 소외론’은 최고조에 달했다는 평가다. 지난 23일 민심탐방 투어차 광주를 찾은 신기남 의장은 지역 시민단체 대표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우리당과 광주는 별거 상태”(윤장현 광주 YMCA 이사장)라는 등의 비판에 단단히 홍역을 치러야 했다.
‘호남 소외론’은 인사-예산면에서의 푸대접이 뼈대다. 참여정부 출범 후 청와대 비서관과 검찰의 검사장급 이상 고위 간부 인사에서 호남인사들이 ‘물을 먹은’ 반면 영남권 출신은 약진했고, 군내에서도 광주 출신인 신일순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등 호남 출신 장성들이 연이어 옷을 벗은 사례 등을 꼽는다.
호남권에 대한 예산 지원이 너무 인색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우리당 전남도당 대표인 주승용 의원은 “대선과 총선 때 우리당을 그렇게 지지해줬는데도 돌아오는 게 하나도 없다”며 “사회간접자본(SOC)이 영남은 잘된 반면에 호남은 걸음마단계로 낙후돼 있는데도 정부에서 내년도 호남쪽 신규사업 예산을 싹 잘라버려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호남의 다른 의원은 “여권 핵심부가 앞으로 조금만 더 지금처럼 호남을 대한다면 ‘호남 사람 표 받아 영남사람들에게 퍼주는 정권’이란 인식이 급속히 확산될 것이다. 그러면 호남 민심이 여권에 완전히 등을 돌리고, 그럴 경우 노무현 정권은 사실상 붕괴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호남 동료 의원 중에는 ‘이렇게 대우받느니 차라리 당을 깨고 나가는 것이 낫겠다’라는 얘기까지 나온다”고 말했다.
반면 우리당 영남권 인사들은 호남권의 이 같은 주장에 “진짜 소외받는 것은 영남”이라며 반박한다. 한 의원은 “열린우리당 의장과 원내대표, 국회의장과 부의장을 호남 출신들이 다 차지하고 있는데 무슨 ‘호남 소외’냐. 청와대에 영남사람이 좀 많다고 문제삼을 게 아니라 왜 여당 핵심포스트엔 전부 호남 사람뿐인가를 먼저 고민해 보라”고 일갈했다.
이 의원은 “호남 의원들의 ‘반(反) 영남’ 정서가 심각한 상태다. 얼마 전 호남의 한 의원이 ‘한전이 다른 지역에 가면 몰라도 영남에 가면 호남에서 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해 개탄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분당 전 민주당 시절이 지금보다 영남권에 대한 배려가 더 많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2006년 지방선거까지 호남의원들과 당을 함께 할 수 있을지 지극히 의문이다”고 말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