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렬 지지자들 펜스 앞으로…’ 청 경호실 요구에 길 터줘
지난 3월 1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자택 앞에 모인 지지자들. 청와대 경호실이 일부 열렬한 지지자들을 지목해 펜스 앞으로 나오게 하는 것을 경찰이 도와주는 모습이 포착됐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지난 3월 12일, 오후 5시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 강남구 삼성동 자택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헌법재판소의 파면 선고 이후 이틀 만이다. 전날부터 자택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한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은 소식이 전해진 직후 크게 늘어 인산인해를 이뤘다.
태극기를 든 지지자들은 ‘탄핵무효’ ‘박근혜 대통령’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오후 7시께, 박 전 대통령의 자택 복귀가 임박하면서 일부 지지자들이 취재진, 또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등 현장 분위기는 격앙됐다. 경찰은 좁은 골목길에 인파가 몰리면서 발생할 수 있는 돌발상황에 대비해 안전관리에 나서는 한편, 펜스를 치고 추가 경비인력을 투입하는 등 자택 주변 경비를 강화했다.
# 경찰이 ‘현장 그림’ 만들었다?
박 전 대통령을 태운 승용차가 반포대교를 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것과 동시에 펜스 밖 경비‧경호를 맡은 관계자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특히 승용차가 들어오는 길인 자택 정문 삼거리 골목에선 제복을 입고 빈틈없이 펜스 앞을 지키던 경찰관들만 제외하고 정장 차림의 관계자들이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 즈음 한 관계자가 자리를 잡은 직후 지지자들이 서 있는 펜스 안을 주목했다. 태극기 지지자들 틈에 섞여있던 기자 앞에 선 그는, 자신을 ‘청와대 경호실’이라고 소개하며 오열을 하며 박 전 대통령을 크게 외치는 일부 지지자들을 지목해 펜스 앞으로 나오게 했다. 그러면서 제복을 입은 경찰관에게 “승용차가 들어올 때 자리를 살짝 비켜달라. 대통령이 보실 수 있도록”이라고 말했다. 기자가 촬영한 사진을 토대로 확인한 결과 그는 청와대 경호실 소속 관계자였다.
이러한 장면은 가까운 펜스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현장 정리에 나선 관계자들 가운데 몇몇은 자신을 ‘경찰’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통령이 보실 수 있도록’ 열렬 지지자들을 펜스 바로 앞으로 세웠다. 지지자들이 앞으로 나오자 자연스레 경찰들은 자리를 비켜줬다. 박 전 대통령의 자택 도착을 앞두고 돌발상황을 우려해 경비를 강화한 상황에서 오히려 경찰이 펜스 바로 앞 길을 비켜준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발생했다. 경찰이 비켜선 틈을 타 체구가 작은 몇몇 지지자들이 경찰이 비켜 서면서 틈이 생긴 펜스 아래로 기어 나오는 일이 벌어진 것. 그러다 보니 경찰은 급하게 그들을 제지해야만 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 자택 경비에 병력을 투입했던 강남경찰서의 경비계 관계자는 “삼성동 자택 경비‧경호와 관련해 확인해 줄 수 있는 사항은 없다”고 잘라 말하면서도 “경찰은 상명하복으로 움직인다. 당시 현장 ‘그림’에 대한 공식적인 지시는 없었다”고 말했다. “당시 투입된 사복 경찰은 어디에 서 있었나” “청와대 경호실이 현장에서 협조를 요청한 경우에 경찰이 임의로 판단할 수 있느냐”는 등의 질문에 그는 “모두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경찰이 현장 ‘그림’을 만드는 걸 도왔다는 건데,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동안 박 전 대통령을 경호했던 청와대 관계자들이 의전 차원에서 몇몇 지지자들을 앞으로 보냈을 수는 있지만, 경찰이 함께 나섰다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소극적 대응 거센 비판
“정부 비판적인 집회에는 지나치게 가혹하고, 친정부 측 집회에는 상대적으로 관대하다.”
그동안 경찰에 대해 꾸준히 제기돼 온 ‘이중잣대’에 대한 비판이다.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진 이후 태극기 집회의 세가 확장되고, 특히 박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을 전후해 반대 집회의 폭력성이 도를 넘어섰지만 경찰이 정치권의 눈치를 보며 대응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지적이었다. 심지어 집회에 야구방망이 등이 등장하고 “죽창을 들고 나오자”는 주장까지 나왔지만 경찰은 선제적 제재에 나서지 않았다.
실제로 지난 2월 27일 이철성 경찰청장은 기자간담회에서 특정 개인을 지목하며 위협한 일부 친박단체들의 발언을 두고 “당사자가 고소하면 몰라도 경찰이 수사나 내사에 착수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말 싸움 하나를 일일이 수사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난 3월 6일 김정훈 서울지방경찰청장 역시 기자간담회에서 “말로 한 것은 실현가능성과 구체성을 토대로 위법 여부를 판단할 것”이라며 “집회 현장에 야구 방망이 등을 가져온 행위에 대해서만 내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2월 28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같은달 23일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살해하겠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린 최 아무개 씨(25)에 대해선 협박 혐의로 입건했다. 야구 방망이 시위는 내사 대상이지만 말로 하는 협박 등은 일일이 수사할 입장이 아니라던 경찰이 온라인이나 SNS에 협박성 글을 남긴 경우에는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것. 이처럼 집회와 온라인에서의 협박에 대처하는 경찰의 대응에선 전혀 연관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경찰의 느슨한 대응에 결국 우려하던 상황이 불거지기도 했다. 지난 3월 10일, 박 전 대통령 선고 직후 헌재 인근 반대 집회 현장에서 일부 지지자들이 미리 준비해온 죽창이 날아다녔고, 폭력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이 과정에서 한 집회 참석자에게 탈취된 경찰버스가 차벽을 들이받았고, 그 충격으로 떨어진 대형 스피커에 머리를 맞아 사망한 참석자도 나왔다. 앞서 경찰은 이날 탄핵 심판 결과에 상관없이 집회가 과열될 것으로 우려해 서울지역에 갑호 비상령을 내린 상황이었다. 헌재와 청와대 인근에 271개 중대 2만 1600여 명의 경비 경력이 투입됐지만 폭력사태를 막지 못했고, 현장에 나선 경찰 33명도 부상을 입었다.
경찰이 이날과 이튿날 주말 집회에서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검거한 인원은 총 16명이다. 경찰은 이들을 대부분 불구속 입건했다. 이 과정에서 유사한 상황이 벌어졌던 지난 2015년 11월 15일 민중총궐기 당시 하루에만 51명이 연행된 것과 비교하면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여기에 지난 2015년 말, 경찰은 집회에서 폭력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게 소요죄를 적용해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이 소요죄를 적용한 사례는 무려 29년 만이다. 지난 2016년 1월 배태선 조직쟁의 실장에게도 소요죄를 적용했다. 반면 태극기 집회 관계자들에 대해선 현재까지 소요죄가 적용된 바는 없다. 소요죄는 다중이 집합해 폭행·협박 또는 손괴의 행위를 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다.
경찰 대응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경찰청장이 직접 나서 지난 3월 13일 ‘엄정대응’을 예고했다. 박 전 대통령 파면 직후다. 이철성 경찰청장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열고 “탄핵반대 집회에서의 전반적인 발언, 채증자료, 현장 직원들 진술 등을 종합해 조만간 폭력시위 주동자에 대해 사법조치 하겠다”며 “폭력행위를 한 사람은 반드시 입건할 것이고 엄중히 사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덧붙였다.
이 경찰청장의 ‘약속’에도 논란은 가라앉지 않는다. 경찰이 박 전 대통령 삼성동 자택의 뒤편에 위치한 삼릉초등학교 인근에서 과격·돌출 행위로 불안감을 조장하는 지지자들의 행태를 “집회·시위의 자유”를 근거로 방조한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자택 인근에서 소란을 피우다가 경찰을 때린 시위 참석자들이 체포되는가 하면, 취재차량을 막겠다고 길에 드러눕고 불편을 호소하는 주민들에게 욕설과 폭언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주민·학부모 등의 민원이 인근 파출소에 쏟아지고 있고, 삼릉초등학교는 학생들의 등하교 안전을 우려해 지난 3월 13일 가정통신문까지 보냈지만 경찰은 아직까지 손을 놓고 있다.
이는 그동안 경찰의 집회·시위 관리 방침과는 다른 조치다. 경찰은 청와대 앞 세월호 집회에 대해선 ‘학교 주변’ 등이란 이유로 무차별 금지해왔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을 보면, 학습권을 침해당할 수 있는 학교 주변지역은 집회를 제한한다. 삼릉초등학교의 학부모들이 직접 나서 박 전 대통령 자택 앞 집회신고를 막아달라는 취지의 탄원서를 경찰에 제출할 예정이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