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를 위한 열정으로” 예술가를 위한 변명
“여기 와보니까 산에 널린 게 대마초네.”
밥 먹을 때 청년은 싱글벙글하면서 소리쳤다. 청년은 인근 산을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대마초를 따서 그늘에 말리고 있었다. 고량주를 구해 입에 머금었다가 대마초 잎에 ‘푸’ 하고 뿌리기도 했다. 그래야 효과가 좋다는 것이다. 며칠 후 그 청년은 내게 전리품처럼 담배 한 갑을 내보였다. 담배가루를 다 털어내고 그 자리에 대마초 가루를 채운 대마담배였다.
“대마초를 피우면 기분이 좋아?”
내가 호기심으로 청년에게 물었다.
“붕 떠서 천국에 가는 기분이죠. 한번 해볼래요?”
청년이 물었다. 그날 밤 청년이 내 방으로 건너왔다. 청년은 티셔츠 포켓에 있던 담뱃갑에서 꽁초 하나를 꺼냈다. 이미 낮에 피우다 남은 것 같았다. 옆방에서 공부하던 장준호라는 고시생을 내 방으로 불렀다. 그는 2년 후 판사가 됐다.
“자 내가 하는 걸 잘 보고 따라하세요.”
청년은 꽁초에 불을 붙였다. 끝에서 탁한 회색의 연기가 실같이 공중으로 올라갔다. 청년은 그 연기마저 아까운 듯 코에 대고 깊이 마셨다. 청년의 눈에 붉게 실핏줄이 돋아났다. 이윽고 청년은 방바닥에 스르르 엎어져 버렸다. 싱거웠다.
“나중에 환각제를 처벌하는 판사가 되려면 먼저 해봐야 할 거 아이가? 한번 해보제이.”
훗날의 장 판사가 내게 권했다. 우리는 청년이 보물같이 여기던 담뱃갑에서 대마초를 다 꺼내 분배했다. 장 판사는 9개비, 나는 10개비였다. 우리는 그걸 앉은 자리에서 줄담배처럼 다 피워버렸다. 가죽 타는 악취만 가득 들어왔다. 장 판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와 우리는 뻗지 않노?”
장 판사가 그렇게 말했다. 굳이 담배와 구별해서 처벌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오히려 그런 환각이 필요한 경우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대학교 때까지 그룹사운드에 속해 음악을 한 적도 있었다. 연주를 하다보면 멜로디의 바다를 유영하는 감정이어야 했다. 어떤 때는 도무지 그런 감정이 잡히지 않았다. 딱딱하게 기계적인 손놀림만 있을 뿐이었다. 그건 음악이 아닌 것 같았다. 다른 친구들은 무대 뒤에서 슬쩍 대마초를 피우는 경우도 있었다. 어쩌면 그건 영혼 깊은 곳에 있는 음악적 감흥을 뽑아 올리려는 행위일지도 몰랐다.
20년이 흐른 어느 날 오후였다. 가수 전인권 씨가 내게 변호를 의뢰했다. 그 무렵 매스컴은 환각제를 복용한 혐의로 조사받는 그에게 여론의 기관총을 난사하고 있었다. 연예인들은 검사와 언론의 밥이었다. 수사관들은 환각제 판매책을 잡으면 물 좋은 고기 한 마리만 불라고 사정을 했다. 그 낚시에 걸린 게 전인권 씨였던 것 같았다. 전인권 씨를 곤란에 처하게 했던 친구는 내게 이렇게 말하며 힘들어했었다.
“제가 나쁜 놈입니다. 인권이가 창을 연습하다가 목에 피가 터지는 걸 보고 제가 몰래 히로뽕을 먹이려고 했습니다. 딴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전인권은 죄가 없습니다.”
나는 진정한 예인들에게 있어 환각제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창조를 위한 매개체일 수도 있다. 남의 집에 방화를 하고는 작곡을 하는 문학작품 <광염소나타>는 예술인의 그런 창조열정을 형상화한 작품이기도 했다. 예술이란 사회통념이나 법을 일탈하는 면이 있다. 또 그런 틀을 벗어나야 맞기도 하다. 당시 나는 모처에서 전인권 씨를 만났다. 무대 위에서 볼 때와는 다르게 긴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있었다. 대중 앞의 모습은 일부러 만든 흐트러진 연출의 결과 같았다.
“예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해 줄래요?”
내가 물었다. 난 항상 그들의 세계와 삶이 궁금했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작은형에게 기타를 배웠죠. 그리고 바로 음악에 미쳤어요. 기타 하나를 달랑 메고 스승을 찾아 나섰어요. 통기타를 치는 이일호 씨를 찾아가 제자가 되어 화성학을 배웠어요. 한 스승에게서 공부가 끝나면 또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밤무대에서 생활비를 구했어요. 밤무대에서는 노래는 좋은데 생긴 게 그렇다면서 출연을 거절하기도 했어요. 안경을 썼다고 퇴짜를 놓고 목소리가 큰 것도 탈이었어요. 하고 싶은 음악이 있어도 도대체 무대에 세워주지를 않더라고요. 제가 아내와 얻으려던 전세방 보증금 200만 원을 가지고 낙원동 악기상가에서 오르간과 드럼을 사가지고 동해로 떠났죠. 나이트클럽에서는 댄스곡을 요구하는데 내 음악을 고집하다 한 달 만에 쫓겨나기도 했어요.”
그는 희랍인 조르바 같은 자유인이었다. 그런 고행을 겪어야만 진짜 음악이 나올 것 같았다. 그가 계속했다.
▲ 지난 2001년 무대에서 열창하고 있는 가수 전인권. | ||
이어서 그는 ‘그것만이 내 세상’, ‘세계로 가는 기차’같이 만드는 노래마다 히트했다. 그제야 그는 자기 기타와 녹음실을 가지는 소원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
그런데 말이죠, 성공이 끝은 아니더라고요. 성공하니까 더 불안해지는 거예요. 한번은 록음악의 고향인 뉴욕 브로드웨이로 간 적이 있어요. 거기 밴드들을 보고 좌절감을 느꼈어요. 삼류밴드라도 나보다는 나은 것 같더라고요. 뉴욕의 밴드들을 보니까 나름대로 무장된 음악이론들이 다 있었어요. 그런데 난 한국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아무것도 아닌 느낌이었어요. 나는 뭔가 하는 회의가 들더라고요. 고민하던 그때 선배한테서 대마초를 받아 피우다가 걸려 혼났죠.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음악꾼들 사이에는 그런 걸 칼같이 거절하지는 못해요. 그게 분위기죠.”
그는 기나긴 음악꾼들 내부의 여러 사정을 얘기했다. 그는 선배들의 명예를 위해 자기 이외 사람의 얘기는 비밀을 지켜 달라고 했다. 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아침이슬’의 작곡가 김민기 씨가 재판장에게 내 달라고 이런 내용의 기나긴 편지를 보내왔다.
“주제넘게 이런 글월을 올리게 된 것은 제가 너무도 아끼는 음악 후배인 가수 전인권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제 가슴에 그대로 묻어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흔히 대중음악인들을 ‘딴따라’라고 불러 폄하하지만 저는 전인권 씨를 감히 예술가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그의 음악 속에는 여느 상업적인 대중가요와는 다른 ‘인간과 자연에 대한 한없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예술가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일탈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유쾌한 것일 때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회규범을 해치는 경우도 더러 보았습니다. 저는 예술가들의 모든 일탈을 두둔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전인권 씨의 경우 죄가 있다면 그것은 그를 너무도 아끼는 선배인 바로 저의 죄입니다. 그가 세상에 진 빚을 보다 높게 승화된 그의 음악을 통해 세상에 되갚을 수 있도록 했으면 합니다. 퇴폐와 장삿속으로 미쳐 돌아갈 대로 돌아간 이 땅의 대중음악 판에 전인권은 정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전인권의 못난 선배 김민기 올림.”
김민기 씨는 전인권이 예술가임을 증명했다. 그는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그렇게 변호해 주었다. 양희은, 이문세 등 가요계뿐 아니라 문학계에서도 나서서 전인권을 살려달라고 했다. 나중에는 강금실 변호사가 변호를 나서 그의 예술을 대변했다. 한 개인의 쾌락을 보지 말고 그의 예술적 기질을 봐달라고들 했다.
나는 미국의 클럽에서 밤늦게 밴드연주자들을 한참 보곤 한 적이 있었다. 라이브공연 때 가수는 수시로 앞의 의자 위에 놓인 작은 병을 들고 뭔가 핥기도 했다. 각성제 같았다. 음악적 감정이 살아야 하고 체력적으로 버텨야 하는 그들의 수단이었다. 흑인가수 레이 찰스도 음악과 마약을 떼지 못했다. 예술세계를 위해 그들은 일반규범과 도덕의 강을 넘어가고 있었다. 단순한 일시적 환각을 위해 하는 환각제와 예술인들의 창조를 위한 몸부림은 구별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일반법의 잣대만으로는 그걸 이해하기 힘들었다. 변호사가 한 발 나아가 그걸 설명해야 했다.
“재판장 앞에서 당당히 말하세요. 나의 예술을 위해 그랬다고. 음악꾼으로 창조를 위해 그럴 수 있는 거라고 말이죠. 세상 법대로 처벌 받으면 될 거 아니냐고.”
나는 전인권 씨에게 그렇게 권했다. 예인으로서의 긍지와 동시에 처벌을 당당히 감수하는 자존심이 있어야 했다.
진짜 나쁜 건 이런 연예인들을 괴롭히는 인간기생충들이었다. <애마부인>의 김부선에게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대마초를 피운 약점을 한 번 잡히니까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체포가 되면 언론은 죄수옷을 입은 여배우를 방영하기에 혈안이 된다는 것이다. 여배우는 방송사 간부 앞에서는 또 고양이 앞에 쥐였다. 소송은커녕 숨쉬기도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내가 본 스타들은 실제론 약하디 약한 존재였다.
전인권 씨는 따뜻한 동료들의 도움을 얻어 용서를 받았다. 1년 후 우연히 인터넷에서 전인권 씨가 강금실 변호사와 내게 감사했다는 말을 한 인터뷰 내용을 보게 됐다. 기뻤다. 다시 1년쯤 세월이 흘렀다. 나는 고교 동창 법조인 모임에서 전인권 씨 사건의 재판장을 했던 부장판사와 한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후배였다. 그가 사건을 의식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재판을 했던 전인권 씨 노래를 듣고 싶어서 미사리에 있는 카페를 집사람하고 찾아갔었어요. 법정에서와는 달리 전인권 씨 대단하더라고요. 노래도 좋고요. 앞쪽 구석자리에 앉아서 얼굴을 가리고 음악을 들었죠. 혹시 전인권 씨가 객석에 있는 날 알아보고 불쾌해 할까봐요. 역시 잘하긴 잘하더라고요.”
예전의 재판장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