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잡은 그들이 바로 범인이었다”
당시 수원경찰서 강력반 형사였던 조광식 씨도 2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수사시작부터 구속까지 걸린 시간은 딱 열흘. 조 씨는 “그 열흘이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11년간 지켜온 경찰 신분을 한순간에 박탈당한 조 씨는 그동안 경비지도자로 변신, 강연을 다니며 지내왔다. 그런 조 씨가 침묵을 깨고 최근 당시 수사자료 등을 토대로 한 권의 수기를 펴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여전히 명 군 사망원인과 관련, ‘결백’을 주장하고 “그들은 범인이 맞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기에는 당시 용의자로 지목된 명 군과 정민수 군(가명·19)이 왜 수원 여고생 살인사건의 범인인지에 대해 자세히 기술돼 있다. 논란이 될 수 있는 내용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지만 조 씨는 “비록 21년이 지났지만 반드시 밝혀져야 할 것들”이라며 비난이나 법적인 분쟁도 감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를 만나 사건의 내막에 대해 들어봤다.
“그 일로 화병을 얻었습니다. 억울해서요. ‘운명’이라고 위로하면서 마음을 추스르지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조 씨의 수기는 용의자들과 나눈 얘기들, 진술서 등 그간의 모든 수사자료를 총동원해 엮은 것이다. 수기를 통해 조 씨는 ‘그들에게 구타나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끌어낸 적이 맹세코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이 범인임을 확신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들은 범인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상황들을 정확히 짚어냈고 분리된 상태에서 써내려간 자술서에서도 그들은 범행과 관련해 동일한 진술을 했다’는 것이다.
사건은 지난 1988년 1월 4일 수원시 화서동 193번지 논바닥에서 하의가 벗겨진 한 여성의 사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피살자는 현장에서 10분 거리에 살던 여고생 김순희 양(가명·18)이었는데 양 손과 목이 스타킹으로 결박돼 있었고 팬티로 재갈이 물려 있었다. 또 얼굴은 부어 있었고 강간당한 흔적이 있었다. 수사결과 김 양은 87년 12월 24일 저녁 어머니와 다투고 집을 나선 후 실종된 것으로 드러났는데 부검결과 그날 밤 11시에서 다음날 새벽 2시 사이에 살해된 것으로 확인됐다.
여섯 번째 화성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반년이 조금 지난 때였다. 수사에 투입돼 현장 주변을 탐문하던 조 씨는 한 주민에 의해 ‘동네 불량배 A 군(17)이 친구들과 현장 인근을 돌아 다니며 본드도 흡입하곤 한다’는 제보를 듣는다. A 군을 조사하던 수사팀은 “저녁 9시가 지난 무렵 현장에서 명 군과 정 군이 논바닥 쪽에서 불을 피우며 놀았다”는 진술을 확보한다. 대질결과 명 군으로부터 사실이라는 대답을 들은 조 씨는 나머지 한 명인 정 군의 소재파악에 나섰다.
하지만 현장에서 300m 거리에 살고 있던 정 군은 수사가 시작되기 전인 12월 29일부터 용인에 있는 외숙모댁에 가 있었다. 수사팀은 둘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행적을 캐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건발생 이후 갑자기 사라진 또 다른 동네 불량배이자 명 군의 친구인 B 군(18)을 조사하던 중 조 씨는 충격적인 증언을 듣게 된다. 명 군은 친구 B 군에게 12월 28일 밤 10시경 화서동의 오락실 앞에서 “사람을 죽였다. 수원을 떠나 도망가야겠다. 절대 얘기하면 안된다. 내가 입던 빨간 점퍼를 가져가 입으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 수원 여고생 살해사건의 용의자였던 명 군 사망 사건을 다룬 당시 신문 기사들. | ||
이들은 김 양이 입고 있던 옷과 운동화에 대해서도 같은 진술을 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서로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다. 정 군은 “목을 조르고 강간한 것도 명 군이다. 나도 강간하려했으나 기분이 좋지 않아 못했다”고 했으나 명 군은 “정 군이 목을 졸랐다”고 진술했다. 자백이 확보된 이상 남은 것은 증거확보였다. 그리고 추궁 끝에 수사팀은 김 양을 위협하는 데 사용된 칼과 스타킹을 자른 칼을 정 군의 외숙모 집과 정 군의 집 근처에서 발견했다.
이 정도로도 증거는 충분했지만 수사팀은 쐐기를 박기 위해 더욱 결정적인 증거를 찾는 데 주력했다고 한다. 바로 피해자 김 양이 차고나간 시계였다. 조 씨는 명 군에게 시계의 행방을 캐물었다. 이때 명 군은 “증거물을 찾으려는 거지요? 근데 우리가 범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어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현장 근처인 화서동 숙지산 중턱에 파놓은 비트(땅굴)에 대해 명 군은 “범행 후 숨어서 먹고 자고 본드도 마시고 그랬죠”라고 진술했다고 한다.
지나가는 여자를 상대로 범행을 했으며 정남면 쪽에서 한 명을 죽였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또 화서동에 살면서 화성까지 어떻게 갔느냐는 질문에는 “기찻길을 따라 가서 범행 후 기찻길로 되돌아오곤 했어요. 경찰 검문·검색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죠”라고 답했다는 것. 명 군이 무심코 내뱉은 말들은 조 씨가 명 군 등을 미제로 남아있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의심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정 군은 조 씨를 붙들고 “교도소 가면 어떻게 돼요?”라고 물었고 명 군은 “그 시계 안 찾으면 안되나요?”라고도 했다.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을 막기 위해서는 김 양이 차고 있던 시계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수사팀은 결국 명 군을 추궁해 시계를 묻었다는 수원시청 근처 88공원 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시계’에 대한 집착은 수사팀원들의 운명을 갈라놓고 말았다. 시계를 찾던 중 명 군이 수갑을 찬 상태로 산 밑으로 도망쳐버린 것이었다. 쫓아간 동료 형사가 명 군의 앞을 가로막았고 그를 잡던 중 두 손으로 밀쳤는데 명 군은 울퉁불퉁 꽁꽁 얼어붙은 땅 위에 후두부를 부딪히며 나자빠졌다.
명 군은 이날 밤부터 유치장에서 심하게 앓았는데 수사팀은 1월 12일 아침까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채 명 군을 방치해뒀다.결국 명 군은 뇌사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이 사건은 ‘청소년에 대한 고문·가혹수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때가 공교롭게도 박종철 군이 사망한 지 1년이 되던 날로 인권침해 고문경찰에 대한 소식은 사회의 공분을 샀다.결국 경찰 간부들이 줄줄이 직위해제됐으며 조 씨를 포함한 형사 3명이 실형에 처해졌다. 조 씨는 지금도 “내 양심을 걸고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끌어낸 사실이 없다.
명 군의 사인은 그날 도주하다 잡히는 과정에서 후두부를 부딪힌 것이다. 당시 부검을 실시한 서울대 법의학과 이윤성 교수가 ‘폭행으로 인한 사망이 아닌 것 같다’는 소견을 내놓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명 군을 붙잡을 때 협조했던 건설회사 간부의 증언도 있었지만 소용없었다”고 주장한다.어쨌거나 명 군은 37일 동안 인공호흡기에 의존하다 사망했고 조 씨 등은 ‘악질 고문 수사관’이라는 치욕스런 오명하에 죽은 듯 지낼 수밖에 없었다.
▲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의 한 장면. | ||
또 사건현장에는 범인의 대변과 모발·음모가 발견됐는데 추출된 혈액형은 B형이었다. 이들의 혈액형도 B형이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자백에 대한 보강증거가 확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외에도 너무 많다. 명 군이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확보한 증거만으로도 기소에 문제가 없었을 거라고 확신한다.”조 씨는 수사 중 명 군이 사망함으로 모든 수사가 백지화된 게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시 형사계장이었던 하승균 씨도 “서장 과장 계장이 모두 직위해제되고 관련 직원들이 사법처리되면서 수사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범인과의 싸움에서 완패한 꼴이었다”고 아쉬움을 나타낸 바 있다.
또 화성연쇄살인사건과 이들의 연관성에 대해 조 씨는 이렇게 말한다. “주민들 사이에서도 악명이 높았던 이들은 야산에 은신처를 만들어놓고 본드흡입 등을 하며 생활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화성사건 수사는 악질 전과자나 변태성욕자 등에만 집중됐다. 전과경력이 노출되지 않는 10대 불량배들을 배제했던 것이다. 설마 10대가 그랬을까 싶겠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다.”
하 씨도 “김 양 사건의 범인은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저지른 동일범”이라며 “범인은 화성시 태안읍과 정남면 일대에서 범행을 저지르다가 수사를 피해 수원 화서동에서 김 양을 살해한 것”이라며 범인이 화성사람이 아닌 수원거주자라고 확신했다. 또 화성사건을 종합적으로 분석하면 범인은 2~3명으로 보인다는 내용도 있다. 조 씨가 명 군 등을 범인으로 보는 또 다른 정황도 있다. 수감 당시 조 씨는 재소자 C 씨로부터 “명 군과 정 군이 범인이오. 우리가 알고 있소”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87년 12월 중순에 발생한 떼강도 사건으로 수원교도소에 수감됐던 C 씨는 유력한 용의자 중 한 명이었던 정 군과 함께 미결수 방인 1동상 18방에 같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 방에는 18명의 미결수들이 함께 있었는데 정 군은 이들 앞에서 “명 군과 함께 여고생을 흉기로 위협, 논바닥으로 유인해 강간했고, 스타킹으로 목을 조르고 각목으로 머리를 때렸다. 피묻은 각목과 팬티는 야산에서 태워버렸다”고 자세히 털어놨고 재소자들은 “형사들이 폭행·고문해서 허위자백한 것이라고 우겨야 한다”고 ‘코치’해준 적이 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결국 정 군은 검찰조사과정에서 돌연 범행사실을 부인했고 이후 무혐의로 풀려났다.조 씨는 “이들이 화서역 인근에서 땅굴을 파놓고 은신했다는 점, 검문을 피해 화서역 철길을 따라 태안읍과 병점역·정남면 등을 오갔으며 지나가는 여성을 상대로 범행을 했다는 자백, 범인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범행 수법과 정황 등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며 “주변인들의 진술과 발견된 흉기, 현장에서 채취한 혈액형, 또 명 군의 집에서 발견된 의문의 여성 손목시계줄들이 그들이 범인임을 밝혀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80년대 온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은 공소시효마저 만료돼 사실상 영구미제사건으로 분류돼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