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도우미’ 월드컵 유치도 어시스트
▲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당시 필자(왼쪽)와 만난 사마란치 명예위원장(가운데), 라냐 ANOC 위원장. | ||
이러한 사마란치의 큰 공적 가운데에는 바로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자리 잡고 있다. 조그마한 분단국가가 12년 만에 동서진영에 의한 보이콧을 종식하고 가장 성공적인 올림픽을 개최했다. 88서울 올림픽은 고르바초프의 말대로 “독일통일, 동구권의 민주화, 소련의 붕괴 등 동서냉전종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 국민에게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다. 서울올림픽은 역사적 사건으로 우리 국민이 사마란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사마란치는 술, 담배를 전혀 안 한다. 그리고 저녁 9시경에는 반드시 침실에 든다. 아침에는 꼭 한 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일요일에는 어느 나라에 가 있건 미사에 참가한다. 그는 절제를 아는 사람이다. 세계의 지도자들 중에서 사마란치만큼 한국을 많이 찾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2005년 여름에 서울에서 있은 ANOC 총회에는 오지 않았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전후에서 세 번이나 베이징에 오고도 서울은 찾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친구이자, 올림픽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현역 IOC 부위원장을 한국정권이 정치적으로 범죄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88서울올림픽과 함께 한국이 치른 최대의 스포츠 행사로 꼽히는 2002년 한일월드컵도 사실 사마란치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한국이 월드컵 축구유치로 고전하고 있을 때 사마란치는 김영삼 대통령 부탁으로 아벨란제 FIFA 회장과 두 번이나 교섭해 공동개최를 이끌어낸 것이다.
좀 자세히 설명하면 1995년 운명의 FIFA 집행위원회가 있기 한 달 전 김영삼 대통령이 사마란치와 나를 청와대 오찬으로 불렀다. 김 대통령이 한국의 월드컵 개최 희망을 이야기했더니 사마란치는 “나는 한국에 30번이나 왔다. 한국이 제2의 고향 같다. 원하는 게 뭐냐”면서 “아벨란제는 완고한 사람이며 일본편이다. FIFA 위원들 이야기가 공동개최는 가능하다고 한다. 공동개최라도 좋으면 도와주겠다”고 답했다. 김 대통령은 “공동개최라도 좋으니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사마란치는 “정말이냐. 공동개최라도 원하느냐”고 다짐을 받더니 “곧 아벨란제를 만나니 설득하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최종 결정이 나면 ‘닥터 김’을 통해 대통령에게 공식발표 전에 알려주겠다고 했다.
사마란치는 5월 20일 아벨란제가 리우데자네이루의 2004년 올림픽 유치를 협의하기 위해 IOC 본부에 올 때 적극적으로 설득을 했다. 아벨란제를 만난 후 연락이 왔는데 “아벨란제가 완고하다. 말이 안 통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29일에 아벨란제가 올림픽 문제로 브라질 대통령과 함께 오기로 했다. 그때 다시 설득해보겠다”고 덧붙였다.
FIFA 집행위원회의 투표일 하루 전인 5월 29일, 나는 미스코리아 운영위원장으로서 저녁에 신라호텔에서 이상우(일간스포츠 사장), 신영균(예총 회장) 등 미스코리아 심사위원들과 저녁을 하고 있는데 집에서 전화가 왔다. 사마란치가 급하게 찾는다는 전갈이었다. 식사 중이니 조금 이따가 연락하겠다고 했더니 사마란치가 급하다고 했다. 사마란치는 이상하게도 꼭 밥 먹을 때 전화를 자주 한다. 그래서 호텔 1층으로 가 전화를 했더니 사마란치는 “아벨란제가 공동개최에 동의했으니 김영삼 대통령에게 알려드려라. 내일 FIFA에서 발표할 것이다. 뒷수습을 해야 하니 빨리 오라”고 했다. 청와대에 보고했더니 김 대통령이 특유의 차분한 말투로 “그래. 그것도 괜찮지”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지만 2002한·일월드컵 유치의 결정타는 김영삼 대통령과 사마란치가 날린 것이었다. 물론 일선에서는 정몽준 회장과 이홍구, 구평회 위원장, 김영수 장관 등이 큰 역할을 했다.
▲ 태권도의 올림픽정식종목 포함 통보문. | ||
1994년 9월 파리에서 열린 100주년 기념 IOC 총회는 ‘태권도의 날(9월 4일)’이 지정될 정도로 태권도로서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당연히 나는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위해 전력투구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태권도는 아직 준비가 덜 돼 있었고, 이미 프로그램위원회에서 정식종목 채택안이 부결되기도 했다. 여기에 ITF(국제태권도연맹), 가라테 등의 반대가 거셌다. 특히 북한 공작원이 포함된 ITF 관계자들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미행을 하기도 했다. 이때 박수남 사범(독일), 박선재 사범(이탈리아), 김용호 사범(프랑스) 등 유럽의 태권도 사범들이 자발적으로 내 경호를 맡아주기도 했다. 한 번은 중요한 회의를 마치고 몰래 뒷문으로해서 숙소로 돌아갔는데, 박수남 사범 등이 계속 남아 있으며 ITF 관계자들의 미행을 따돌린 적도 있다. 어쨌든 극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앞으로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나는 사마란치를 졸라서 태권도의 정식종목 채택을 계속 밀어 붙였다.
처음 사마란치가 ‘남녀 한 체급이 어떠냐’고 하기에 나는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낫겠다고 버텼다. 이후 남녀 2체급까지 사마란치의 오케이를 받는 데 성공한 나는 집행위원회에서는 3체급씩으로, 그리고 총회에서 4체급씩 슬쩍 금메달 개수를 늘리며 밀어붙였다. 결과는 85 대 0 만장일치 통과였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사마란치의 조언과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사마란치의 힘 없이는 태권도는 아직도 올림픽에 못 들어갔을 것이다. 한국이나 태권도에게 그는 잊지 못할 은인인 것이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남북선수단 동시 입장을 성사시킴으로서 세계인의 시선을 잡아끈 것도 필자의 구상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사마란치의 도움 없이는 어려웠던 작품이다.
▲ 2000년 시드니올림픽 태권도경기에 시상자로 나선 필자와 사마란치 모습(위)과 1995년 제14차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총회 대표단 만찬(오른쪽은 세이크 파하드 OCA 회장). | ||
사마란치는 늘 “김 부위원장이 없으면 일이 안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나를 신임했다. 한국이 정치적 격동기에 처했거나, 갑작스런 사태가 예상될 때에는 꼭 전보를 치거나 안부 확인 전화를 거는 인정이 많은 사람이다.
사마란치는 정치와 스포츠는 분리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거꾸로 스포츠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와의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지론을 가졌다. 자신은 스포츠 지도자지만 만나는 사람의 70% 이상이 각국의 정치 지도자들이고 그가 종사하는 일의 70% 이상은 정치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항상 말했다.
그는 남북이 아직 대치상태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 서울올림픽 전에 4차례의 남북체육회담을 주선했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남북동시입장을 적극 지원해주었다.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는 전 서계에 올림픽 기간 중 휴전을 제의했다. 그는 아마추어와 프로의 구별을 없애고 돈 없이는 스포츠가 안 된다는 상업주의 수용을 통해 재정파탄 빈사상태에 있는 IOC를 구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나친 자신감에 의해 만연돼 버린 올림픽의 상업주의, 그리고 승리지상주의에서 비롯된 올림픽의 국수주의라는 숙제를 남기기도 했다.
여기에 IOC 위원장 임기만료 직전에 보여주었던 그의 이중적인 행태는 큰 오점을 남겼다. 그러한 행동이 솔트레이크 사건을 일으켜 세계의 공격을 받아 자칫 IOC가 붕괴될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많은 IOC 위원들이 그 때문에 희생됐다. 또 내가 그렇게 가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사마란치는 미국의회의 청문회에 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1997년 사마란치의 세 번째 임기가 끝나고, 스위스 로잔의 IOC 총회에서 위원장선거가 예정된 때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게는 그때 신출내기였고, 부위원장을 지낸 캐나다의 파운드와 필자 싸움으로 압축되고 있었다. 그런데 겨울에 갑자기 사마란치의 특사자격으로 세네갈의 음바예 위원(후에 IOC 윤리위원장)이 왔다. ‘사마란치가 4년 더 하려고 한다. 한 번 더 기회를 주면 4년 후에는 김 위원을 지원한다고 약속하니 그러면 서로 아무 일 없지 않느냐’는 내용이었다. 속수무책이고 사마란치의 권모술수와 힘에는 당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나중에 2001년 선거 때 여실히 증명되었다. 사마란치는 뭉갤 수 있는 적은 완전히 뭉개고 그것이 안 될 때는 안에 끌어들여 옆에 놓는 원칙을 갖고 있다. 95년 부다페스트 총회 때 이미 헌장을 개정했고 그 앞잡이가 음바예였다. 음바예는 서울에 올 때마다 나의 재정지원을 받았는데 사마란치의 특사를 맡았을 때는 확실하게 보스를 편들었다. 파키스탄의 와지드 알리 위원은 사마란치의 ‘노골적인 로게 편들기’를 지켜본 후 “아시아인 IOC 위원장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는데 IOC는 이제 망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참고로 음바예 위원은 어느날 나에게 서신을 보내서는, 자기 장남이 세네갈에 은행을 세우려고 하는데 삼성에 이야기해서 400만 달러를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었다. 이를 사마란치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무슨 은행?’이라며 화를 낸 적이 있다. 이런 음바예가 나중에는 IOC 위원들의 청렴문제를 책임지는 윤리위원장이 된 것이다.
결국 사마란치는 그의 훌륭하고 찬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오점 또한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즉 학같이 고고했던 그가 IOC 권좌에 대한 지나친 욕심, 그리고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속으로 간직하고 있던 백인, 특히 유럽 우월주의는 그의 업적을 퇴색시키는 효과를 낸 것이다.
김운용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