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숭 떤다고 너도 그러기야?
▲ 영화 <페어 러브> | ||
신혼부터 섹스리스? 하하. 나는 ‘그래도 명색이 신혼인데 섹스리스라니, 그럴 리가 있어?’라고 의심했지만, 결혼 3개월 차의 A는 “결혼 전에는 누가 피곤해서 섹스 못한다고 하면 안 믿었거든요. 그런데 사실이더라고. 모처럼 휴일이 되어도 인사 다녀야할 곳도 많으니 섹스보다 잠이 더 좋던데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게 “처녀 때 많이 하세요. 결혼하면 더 못해요”라고 덧붙였다. 신혼 때만이 아니다. 시부모님을 모시는 친구 B는 “우리 시부모님은 흔한 여행도 한 번 안 가셔. 그러니 맘 놓고 섹스 할 수가 없잖아”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애가 생긴 이후로는 더 못하지. 아직 너무 어려서 애기랑 같이 자는데, 아이가 깰까봐 남편과 자지도 못해. 하고 싶어도 못하는 실정인 거지”라면서 말이다. 그래도 남편과의 섹스를 그리워하는 B는 나은 편이었다. C는 “우리 아들은 잠을 안자. 아들 재우고 나서 보면 남편이 이미 자고 있는 거야. 그러다보니 내가 어느새 말로만 듣던 섹스리스 커플이 되었더라고. 시부모님이 은근히 둘째를 원하시기에 내가 말했어. ‘어머니, 하늘을 봐야 별을 따죠’라고. 그랬더니 그 후로 불평이 쏙 들어가셨어”라며 푸념을 했다. C의 표정에는 ‘나, 요즘 욕구불만이야’라고 쓰여 있었다. 그러니 안 물어볼 수가 있나? “너, 느껴본 적은 있어?”라고 말이다. 마치 이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 C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아니, 나는 아직 남편과 섹스할 때마다 긴장이 돼. 남편이 ‘몸에서 힘을 좀 빼봐’라고 말을 하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고. 섹스가 좋은지도 모르겠어. 나 불감증인가봐”라며 어김없이 불감증 타령을 했다. 신기하게도 섹스 트러블을 겪는 여자들의 90%가 불감증 타령을 한다.
C는 전형적인 불감증 타입이었다.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남편의 리드에 따르기만 했고, 섹스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것조차 쑥스러워했다. 감성보다 이성이 앞서는 타입으로 섹스할 때도 이성을 잃지 않았는데, 무엇보다 그녀는 남편과 섹스할 때조차 체면을 차렸다. “말도 안 돼. 내가 어떻게 69를 해? 나는 남편이 먼저 오럴 섹스를 해달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움직이는 게 잘 안돼”라고 말했던 것. 그런데 C의 남편 D는 그보다 한술 더 떴다. “우리, 오늘 밤에 한 번 할까?”라고 말하면서 C의 가슴을 파고들다가도, C가 “저리가, 민수가 본다”라고 말하면 “농담이야”라고 돌아서서 자버렸던 것. 그 순간, 연애시절에 C가 한 말이 생각났다. “어제 점심 먹으러 갔다가 싸우고 돌아왔잖아. 배가 고파 죽겠는데 D가 점심 메뉴를 안 정하는 거야. 자꾸 나보고 ‘너는 뭐 먹고 싶어?’라고 묻기만 하더라고. 1시간 동안이나 점심 메뉴를 못 정해서 결국 싸우고 집에 와서 밥 먹었잖아”라고 했었나. C와 D는 둘 다 소극적인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섹스할 때도 마찬가지였다니!
섹스를 잘하는 남자는 여자의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섹스킹은 여자가 ‘No’라고 거절해도 자격지심을 갖지 않고, 다음 기회를 노린다. 때로 ‘No’를 ‘Yes’로 만들기 위해 갖은 애교를 부리기도 하지만, 여자가 끝내 ‘No’ 한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은 거의 없다. ‘다음에 하면 되지, 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체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자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체위를 시도하고, 여자가 “이, 변태!”라고 비난해도 마음에 상처받지 않고 다른 체위로 전환한다. 내가 만난 한 카사노바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 많은 여자들을 유혹하는 데 성공했냐’고 물어. 그런데 나는 성공률이 낮은 편이야. 90%를 성공한 게 아니고, 1만 명에게 시도해서 겨우 1000명에게 ‘Yes’를 받은 것뿐이거든”이라고 말하면서 히죽히죽 웃었다.
모르긴 몰라도, D는 소극적인 남자일 확률이 높다. 결혼 5년차의 C가, 아들까지 낳은 C가 아직도 섹스를 논하면서 ‘부끄러움’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부부 사이에 “내가 어떻게 항문을 애무해?”라고 묻는 것은 D가 한 번도 C의 항문을 애무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남편이 이렇게 점잖을 떨고 있으니, 아내 역시 내숭을 떨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C가 먼저 나서서 D에게 과감한 애무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 그런데 만약 D가 섹스에 적극적인 타입이었다면? C를 상대로 다양한 체위와 다양한 형태의 애무를 시도했을 것이고, C 역시 ‘D가 오늘은 또 어떤 섹스를 시도할까’라고 상상하는 여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은 내가 먼저 시도해볼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 적어도 C처럼 섹스할 때마다 긴장해서 몸이 굳어버리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C가 부끄러움의 벽을 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D의 과감한 시도가 아닐까.
박훈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