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안게임·월드컵 밀어붙인 체육대통령
▲ 김영삼 대통령(맨 앞줄 가운데)이 태릉선수촌에서 국가대표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해 새벽 러닝훈련에 동참했다. | ||
해금이 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치활동을 재개하고 있을 때 서울올림픽 개최가 임박해오고 있었다. 또 남북체육회담이 진행되면서 올림픽 반대 내지는 남북공동개최 움직임 등이 재야에서 일어났다. 이에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야(野) 3당 총재를 예방하고 싶다고 나에게 요청했지만 당국의 반대로 난항을 겪었다. 그러자 사마란치는 야당 총재와의 만남을 직접 표명해, 뜻을 관철시키려고 했다.
결국 정부로부터 신라호텔에서 오찬 형식으로 하는 것은 무방하다는 ‘허락’를 받아내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야3당 총재, 그리고 여당을 뺄 수 없다고 해 윤길중 민정당 대표를 사마란치와 회동하게도록 주선하게 됐다. 물론 이 자리에는 박세직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과 필자가 포함됐다. 당시 민정당이 윤길중 대표를 상석에 앉히라는 압력을 가해왔는데 박세직 위원장은 이를 해결하지 못했고, 공이 필자에게로 넘어왔다. 즉 민정당의 박준병 사무총장이 직접 필자에게 요청해온 것이다. 이렇게 곤란한 문제가 내게 맡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사마란치와 상의했더니 “3김 씨는 총재고 윤 씨는 대표다. 그리고 내가 만나고 싶은 분은 야 3당 총재다. 상황이 그렇다면 내가 호스트자리를 내놓고 제일 말단석에 가겠다”고 말했다. 사마란치의 뜻대로 야 3당 대표를 존중하는 순서대로 좌석이 배치됐고, 결과는 국내 정치권에서 서울올림픽 성공을 위한 단결과 융화로 이어졌다.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김영삼 내외와 사마란치 부부, 우리 내외가 신라호텔에서 조찬을 하면서 국제정세를 논하는 자리가 있었다. 이때 김영삼 대표가 나한테 “(어디 가서) 같은 일가라고 말하지 말라 큰일 난다”고 조언해 준 일이 생각난다. 당시만 해도 김영삼 대표 등 야당 당수에 대한 집권층의 견제가 심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울올림픽 개회식의 로열박스에 3김 총재들이 초대되었고, 만찬도 열렸고, 부인들만의 오찬이 있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한국과 공산국가와의 교류가 ‘국교수립’으로 내닫고 있을 때였다. 당시 소련과의 교류 및 수교가 제일 가시적이고 중요한 과제로 떠올라 정치인들이 앞다퉈 경쟁을 하곤 했다. 이때 김영삼 총재는 민정당과 통합 민자당의 대표가 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의 소련친구인 타스(TASS)통신사의 이그나텐카(Ignatenka)가 프리마코프(Primakov) 소장의 초청장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필자는 김영삼 대표를 초청해 한국식 만찬을 베풀었다. 그런데 며칠 있다가 김영삼 대표가 국기원으로 전화를 해왔다. ‘소련에서 오라는데 언제 가는 것이 좋으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빨리 가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했는데 결국 김영삼 대표는 당시 북방외교라는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소련을 다녀왔다. 특히 김 대표가 소련에 갔을 때 프리마코프가 국회의장이 된 까닭에 그때로서는 드물게 후대를 받았고, 소련의 많은 요인들을 만났다. 필자의 친구 이그나텐카도 곧 고르바초프의 대변인으로 발탁되고, 부수상이 되었다. 이때만 해도 필자가 정초에 아내와 함께 YS의 상도동 자택에 가면 작은 응접실에서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커피를 타서 끊인 물을 부어주곤 했다. 그의 삶이 아주 검소하고 자상하다고 느꼈다.
▲ 월드컵 성공개최 1주년 모임. 왼쪽부터 필자, 이홍구 전 위원장, 김영삼 대통령, 구평회 위원장, 박관용 비서실장. | ||
청와대의 식사 초대를 받고 가보면 대부분 YS가 혼자서 말하고 식사를 굉장히 빨리 하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은 먹다가 나오기 일쑤였다. 메뉴는 국수.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밥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때는 남북협력과 대화기운이 무르익어 남북정상회담도 예정돼 있다가 김일성이 사망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무산됐다. 또 당시 서울에서는 삼풍백화점,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YS는 “오래전에 지어놓은 것이 무너져도 대통령 탓이라고 그런다”고 푸념한 적이 있다. IMF외환사태도 아시아공황 및 헤지펀드의 공격에 의한 것이지만 YS가 비판을 받았다. 억울해도 국익을 추구하고 국민의 안전과 번영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리에서는 감수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YS는 1993년부터 1997년까지 다섯 번에 걸친 전국체전에도 직접 참석해서 국민통합과 체육발전을 유도했다. 체육은 국민의 것이지 군사정권의 선전물이 아니라는 것이 YS의 생각이었다. YS가 가끔 태릉선수촌에 격려하러 나올 때면 새벽에 있는 선수들의 러닝훈련에 앞장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400m트랙을 25바퀴나 도는데 대통령이 맨 선두에 선 것이다. 필자도 중학교 때 5000m 달리기 선수였는데 ‘조깅’으로 유명한 YS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당시 칠순의 나이인데도 YS는 막판 스퍼트까지 했다.
1995년에는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유치를 놓고 한국은 대만의 카오슝과 격돌했다. 정치적 기반이 부산인 YS는 필자에게 “내가 부산에 해준 게 하나도 없단 말이야”라고 말했다. 카오슝은 대만정부가 국력을 총동원해 1억 달러라도 내고 훈련비, 항공료 부담조건으로 맹공을 가했다. YS는 서울에 온 아시아 각국 NOC 위원장들을 모두 초청해 부산의 합리적 명분을 강조했다. 한 번 정해진 일은 뒤를 보지 않고 밀어붙이는게 YS의 정치 스타일인데, 이때가 바로 그랬다. 외국사람들을 상대하면서도 눈치조차 안보고 밀어붙였다. 결국 표결 끝에 부산이 이겼다.
부산아시안게임과 관련해 개인적으로 밝히고픈 내용이 하나 있다. 1995년 5월 부산이 아시안게임 유치에 성공하자 조직위원회를 구성하는데 김기재 부산시장이 당연히 수장자리를 맡길 원했다. 그러나 부산은 당시 국제 대회를 유치해본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다. 그래서였는지 YS는 IOC 부위원장인 필자를 조직위원장으로 지명했다. 그래서 1997년 동아시아게임을 치렀고,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은 6년간 책임을 지고 준비했다. 이후 DJ 시절에 대한체육회장과 부산조직위원장을 그만두는 것이 어떠냐는 DJ의 직접권고로 자리를 내놨다. 그런데 사정을 모르는 부산 측으로부터 ‘대회를 앞두고 무책임하게 사퇴했다’는 욕을 많이 먹었다. 2009년 기회가 있어 허남식 부산시장에게 처음으로 그 내막을 설명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라는 반응을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모르는 내용이다.
▲ 청와대에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올림픽훈장 금장을 전수하고 있다. | ||
어쨌든 YS는 국가적으로 월드컵유치 운동을 펼쳤고 내가 경험한 YS의 추진력은 정말 놀랄 만했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월드컵유치 과정에서 FIFA 임원이 오면 YS는 청와대로 직접 불러 오찬을 열고 당위성을 설명하곤 했다. 한번은 실사관이 왔을 때 만찬을 하고 YS는 유치 당위성을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이 실사관은 한참을 듣다가 “대통령님, 우리는 기술적 실사관이라 기술적 능력만 실사, 보고를 하지 결정에는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YS의 열정에 미안했는지 솔직히 직분을 밝힌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공들인 끝에 부산아시안게임과 월드컵 개최를 따냈는데 정작 YS는 부산아시안게임, 2002FIFA월드컵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다만 대회 1년 후 박관용 국회의장공관에서 열린 성공개최 1주년 축하만찬에 참석했다. 당시 박관용, 이홍구, 구평회, 필자 등이 참석했는데 정몽준 전 대한축구협회장은 보이질 않았다. 이때 YS가 서명해 나누어준 기념 축구공은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은 YS가 대통령이 되고 처음 있는 올림픽이었다. 한국은 은메달이 많고 금은 8개밖에 안 됐지만 그래도 종합 10위, 메달수로는 8위를 하고 돌아왔다. 귀국 후 청와대에서 선수단을 위한 오찬이 열렸다. 나는 대통령 옆 테이블에 앉았고, 대통령 테이블에는 방수현(배드민턴) 등 금메달리스트들이 있었다. YS가 방수현에게 애로사항이 무엇이냐고 묻자 방수현은 “연습장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순발력 있고 통이 큰 YS는 다들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옆 테이블의 필자에게 묻었다. “김 회장, 배드민턴 연습장을 짓는데 얼마나 듭니까?” 필자는 ‘이 때다!’하고 “지금 핸드볼 경기장을 막 짓기 시작했는데 두 개에 300억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YS는 바로 “내가 지어줄게”라고 선수단에 약속했다. 그 후 나는 150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아 허물어진 실내육상장을 개축, 배드민턴 12면과 핸드볼경기장의 관중석을 지었다. 그 덕에 핸드볼 국제대회도 가질 수 있었다.
YS 덕에 배드민턴과 핸드볼연습장을 ‘쉽게’ 지은 후 필자는 내친김에 태릉의 400m 오픈빙상트랙을 헐어서 춘천빙상장에게 기부하고, 400m 실내빙상장을 250억 원에 지었다. 좋은 하드웨어가 있어야 좋은 선수가 나온다는 확신에서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이다.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은 이승훈 모태범 이상화 등의 쾌거로 세계 빙상 역사를 새로 썼다. 여러 신문기사에도 언급됐듯이 이 실내빙상장에서 세계스프린트 빙속대회가 열렸고, 선수들은 훈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사마란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올림픽금장을 전수했다. 88올림픽 때의 협조, KOC에 대한 지원, 태권도의 올림픽정식종목 채택, 아시안게임유치, FIFA 월드컵 유치, 서울 IOC 총회 유치 등 스포츠에 대한 공헌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학실히’ 대한민국 체육 발전에 크게 공헌한 국가원수였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