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참총장은 사열받던 중 옷 벗어”
1993년 3월 대한민국에 ‘별’이 우수수 떨어지며 지축이 뒤흔들렸다. 하나회 숙정은 문민정부 출범 이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빠르게 진행된 개혁 조치였을 뿐만 아니라 30년간 이어진 군부 정권의 종말 선언과 같았다. 지금까지도 YS(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 중 하나로 하나회 숙정을 꼽는 이들이 많다. 김현철 고려대 연구교수는 이에 대해 “측근 누구도 YS의 정확한 의중을 꿰뚫지 못한 ‘1인 기획·실행 작전’이었다”라고 전했다. 김 교수와의 인터뷰에 자료를 더해 회고 형식으로 정리한다.
‘하나회’는 육군사관학교 동기(11기)인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군대 내 사조직이다. 군내 사조직은 엄연한 불법이지만 박정희 정권은 이를 암암리에 묵인해 왔고, 결국 하나회 출신들은 12·12 사태를 일으킨 뒤 정권을 찬탈했다. 역사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하나회 숙정은 문민정부의 당면 과제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YS)이 하나회 숙정을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이 1990년 삼당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총재를 맡으면서부터였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러나 ‘더 오래된 생각’이었다. YS는 정치 입문 때부터 군에 대한 개혁적 마인드를 가졌다. 1954년 3대 국회 때 자유당 공천을 받은 뒤 처음 배정된 상임위가 국방위원회였다. 이후에도 국방위와 자주 인연을 맺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보문동에 살던 때였는데 옆집에 지체 높은 군 장성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매일 밤마다 누군가 장성 집 안으로 기름통을 실어다 나른 것이다. 알고 보니 군용 기름을 몰래 빼내 팔아먹고 있었다. YS가 이를 국회에서 문제 삼았는데 당사자가 집으로 찾아와 거의 빌다시피 해 사태가 커지진 않았다.
1986년 ‘폭탄주 사건’도 빼 놓을 수 없는 계기였다. 그 해는 전두환 정권 치하, 직선제 개헌 이전이었기에 정치군인들의 위상이 하늘 높은 줄 몰랐다. 특히 하나회 출신들은 주기적으로 여야 중진들과 국방위 소속 의원을 요정에 불러들여 술판을 벌이곤 했다.
고 김동영 정무장관이 신민당 원내총무를 맡고 있었을 때다. 김 전 장관은 내가 ‘아저씨’라 부르며 어린 시절부터 따르던 분이다. 폭탄주가 몇 순배 돌면서 동영 아저씨가 거나하게 취한 상태에서 한마디하고 말았다.
“거물은 안 보이고 똥별들만 왔구먼.”
실언이었다. 당시 참석자를 떠올려 보면 12·12 주역인 박희도 전 육군참모총장과 성질이 불같기로 유명한 정동호 전 육군참모차장, TK(대구·경북) 출신 이대희 인사참모부장 등 전두환 사단의 핵심 멤버들이 다 모인 자리였다. 설상가상 이세기 민정당 원내총무가 한 시간이 넘도록 자리에 나타나지 않자 이들의 심기는 더 불편해졌다.
93년 5월 긴급소집된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왼쪽)와 1997년 단행된 군 정기 인사.
폭탄주 사건 이후 YS는 하나회 숙정에 대한 더욱 확고한 생각을 갖게 됐다. 오랜 측근인 민주계 인사들 역시 YS의 하나회 숙정 의지를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계획과 거사일자는 철저히 불문에 부쳤다(박관용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훗날 “YS의 군 개혁구상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은 나를 포함해 3명이 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개혁의 전조는 1993년 3월 5일 육사 49기 졸업식으로 기억한다. YS는 축사에서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는 일에 앞장설 것을 다짐한다”며 개혁 의지를 슬며시 드러냈다.
당시 축사는 육사 측에서 써 보내는 관례를 깨고 청와대에서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군 수뇌부 역시 YS의 복심을 읽기 위해 기무사령부를 적극 가동하기 시작했다. YS는 한 발 빨랐다. 불과 3일 뒤인 3월 8일, YS는 권영해 당시 국방장관과 독대한 자리에서 “내가 오늘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하려고 한다”고 선언했다.
공교롭게도 3월 8일은 내 생일이다. 저녁에 지인들과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는데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김진영 당시 육참총장은 영내에서 사열을 받던 중 갑작스럽게 옷을 벗었을 정도였다. 같은 날, 김진영 육참총장과 함께 경질된 서완수 기무사령관은 오전에 월례회의를 주재해 “새로운 대통령을 맞아 기무사도 본연의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훈시까지 했던 터였다. 두 장군 모두 영문도 모른 채 봉변을 당한 셈이었다.
하나회 숙정을 실무적으로 진두지휘한 것은 김희상 국방비서관이었다. 김 비서관은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국방비서관실에 있으면서 군내 사정을 잘 아는 학구파였다. YS는 청와대 입성 후 없는 자리까지 만들어 김 비서관을 발탁한 뒤 군내 정보 수집 및 동향 보고를 맡겼다. 하지만 그런 김 비서관조차도 정확한 실행날짜는 몰랐을 것이다.
하나회 태동의 주역들인 육사 11기생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부터 노태우, 전두환 생도. 일요신문 DB
하루 저녁에 육참총장과 기무사령관을 교체한 YS는 다음 타깃으로 안병호 수방사령관(육사 20기)과 김형선 특전사령관(육사 19기)을 전격 경질했다. 12·12 당시 수도권 세력이 반란에 대거 동원됐기 때문이다. 그 뒤부터는 사단장급에 이어 영관급까지도 정리를 해 나가면서 두 달 사이 ‘별’ 40여 개가 우수수 떨어졌다.
하나회 출신은 배제하니 새로운 사람을 임명하는 문제가 남게 됐다. 주목할 것은 기무사령관으로 ROTC 3기 출신 임재문 장군을 앉힌 것이다. 당시 군에서는 육사 출신이 아니면 진급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지만 ROTC 출신을 발탁하면서 앞으로의 비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임재문 장군은 문민정부 내내 기무사령관으로 일하면서 권영해 장관과 함께 핵심 참모가 됐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영관급까지 대대적인 숙군 작업이 진행되면서 비 하나회 출신 인사들마저 피로를 호소했다. 나 역시 그런 사정을 전해 듣고 대통령께 직접 말씀드린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 도중에 백승도 대령이 하나회 출신 명단을 언론에 공개한 일이 있었다.
백승도 대령이 청와대와 교류해 의도적으로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언론에 명단까지 공개된 마당에 완전히 뿌리 뽑지 않으면 안 됐던 부분이었다. 당신 성격상 한번 시작한 일이니만큼 발본색원해야 한다는 생각도 강하셨던 것 같다.
YS는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하나회를 해체하지 않았다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하나회 숙정은 YS가 군을 잘 몰라서 한 일”이라며 전투력 약화, 삼류급 인사들의 지도부 발탁, 하극상 사건 등 부작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전직 대통령들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하나회 숙정은 문민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회자됨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김현철 교수가 밝힌 ‘사찰 피해’
“회사에서 나에 대한 ‘일보’ 안기부에 제출”
하나회 숙정을 비롯한 문민정부 초반을 이야기하던 중, 김현철 교수는 “국정원 개혁 역시 하나회 때와 같이 전광석화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대선이 끝난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정원 정치개입 의혹 수사는 오리무중. 그에게 국정원 개혁 문제에 대해 잠시 물었다.
―문민정부 당시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개혁은 어떠했나.
“당시 안기부는 지금의 국정원보다 정치개입이 더 심했다. 문민정부에서도 정보기관 개혁을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외국어대 출신 김덕 교수를 안기부장으로 보냈던 것이다. 모두가 깜짝 놀랐던 인사였고 당시 안기부도 초긴장했다. 김덕 안기부장을 통해 북한정보 수집기능을 강화하고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조직 장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본인 역시 안기부 사찰에 의한 피해를 봤던 것으로 알고 있다.
“MBA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87년 9월 쌍용증권에 막 입사했을 때였다. 하필 3개월 뒤가 대선이었다. 불가피하게 휴직을 하고 대선을 도왔다. 대선이 끝나면 다시 복직을 하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사 인사과에서 나에 대한 데일리리포트(일일 보고)를 안기부에 제출하고 있었다고 하더라.”
―때마다 불거지는 정보기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대통령 의지만 확고하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30년 권위주의 정권 이후 ‘문민정부-국민의정부-참여정부’ 15년간 정보기관 내부가 상당부분 리빌딩(재건)이 이뤄졌다. 그럼에도 국정원이라는 곳이 워낙 세고 비밀스런 조직이기 때문에 획기적으로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을 끌면 절대로 될 수가 없는 사안이다.”
하지만 문민정부의 안기부 운영은 실패로 평가된다. 1995년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안풍’, 또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벌인 ‘북풍’ 공작엔 어김없이 안기부가 등장했다. 대선을 열흘 앞두고 안기부 감찰실 직원이 양심선언을 하려고 하자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은 선거가 끝날 때까지 그를 감금하기도 했다. 만일 문민정부에서 대대적인 개혁이 있었다면, 20년 뒤 국정원 정치개입 의혹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회사에서 나에 대한 ‘일보’ 안기부에 제출”
―문민정부 당시 안기부(지금의 국정원) 개혁은 어떠했나.
“당시 안기부는 지금의 국정원보다 정치개입이 더 심했다. 문민정부에서도 정보기관 개혁을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외국어대 출신 김덕 교수를 안기부장으로 보냈던 것이다. 모두가 깜짝 놀랐던 인사였고 당시 안기부도 초긴장했다. 김덕 안기부장을 통해 북한정보 수집기능을 강화하고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지만 하루아침에 조직 장악이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본인 역시 안기부 사찰에 의한 피해를 봤던 것으로 알고 있다.
“MBA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87년 9월 쌍용증권에 막 입사했을 때였다. 하필 3개월 뒤가 대선이었다. 불가피하게 휴직을 하고 대선을 도왔다. 대선이 끝나면 다시 복직을 하려고 했는데 회사에서 받아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사 인사과에서 나에 대한 데일리리포트(일일 보고)를 안기부에 제출하고 있었다고 하더라.”
―때마다 불거지는 정보기관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대통령 의지만 확고하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30년 권위주의 정권 이후 ‘문민정부-국민의정부-참여정부’ 15년간 정보기관 내부가 상당부분 리빌딩(재건)이 이뤄졌다. 그럼에도 국정원이라는 곳이 워낙 세고 비밀스런 조직이기 때문에 획기적으로 조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간을 끌면 절대로 될 수가 없는 사안이다.”
하지만 문민정부의 안기부 운영은 실패로 평가된다. 1995년 총선을 앞두고 벌어진 ‘안풍’, 또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벌인 ‘북풍’ 공작엔 어김없이 안기부가 등장했다. 대선을 열흘 앞두고 안기부 감찰실 직원이 양심선언을 하려고 하자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은 선거가 끝날 때까지 그를 감금하기도 했다. 만일 문민정부에서 대대적인 개혁이 있었다면, 20년 뒤 국정원 정치개입 의혹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