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입술로 눈물을 닦아줘
▲ 영화 <연애의 목적> | ||
며칠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섹스 충동이 일었다면? 누군가 ‘쾌락만 쫓는 불효막심한 년’이라고 나를 욕해도 딱히 반박할 말은 없지만 내가 성욕이 일었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술기운 때문은 아니었고 고인이 된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온 멋진 남자에게 반해서는 더더욱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남자를 좋아해도 몰려드는 문상객 중에서 연애 상대를 고를 만큼 속물도 색골도 아니다. 다만 평소 나를 쫓아다니던 B를 보는 순간, ‘B의 품에 안기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헛헛한 마음을 살의 접촉으로 위로받고 싶었다면 허울 좋은 변명일까. 하지만 사실이다. B를 보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그 누구도 아닌 B라면, 그날 밤 섹스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하고 싶었다.
왜 B였을까. 사실 나는 연애와 섹스는 게임 같은 것이라 생각하는 모험가 스타일이다. 이른바 ‘나쁜 남자 증후군’을 앓고 있어서 나를 좋아하는 남자에게 흥미를 못 느끼고 나에게 별 흥미가 없어 보이는 남자를 좋아한다. 반면 나에게 잘해주는 남자,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남자, 만날 때마다 섹스 제안을 하는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러니 지난 5년간 나를 향해 지독한 순애보를 펼친 B는 나에게 자극을 주지 못하는 남자 중 하나였다.
새벽 3시에 술에 취한 내가 “홍대 앞인데, 나와”라고 전화를 하면 곧바로 나왔고, 모처럼 전화를 해서 불러놓고도 변덕이 일어 “오는 중이야? 미안. 나 집에 갈래”라고 통보해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B는 언제나 나의 부름에 즉각적으로 달려왔다. 그나마 지난 3년간은 그가 나에게 전화를 하는 것조차 귀찮게 느껴져서 아예 받지도 않았다. 전화를 하다가 지친 그는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자라고 내가 친절했을 리 없다. 2년간 지속적으로 그의 문자에 답하지 않았고 최근에는 그의 끈질긴 성의에 지쳐 “뭐해? 저녁 같이 먹자”라고 문자를 보내면 “선약”이란 두 글자의 짧은 거절을 보내곤 했다. 이렇게 홀대했던 B와 섹스를 하고 싶다니, 사실 나 자신조차도 매우 놀라웠다.
울고 싶은 날의 섹스는 다른 때와 다르다. 남자가 얼마나 섹시한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쾌락을 탐하는 섹스보다는 마음을 위로해주는 섹스를 원하기 때문이다. 현란한 애무 테크닉이나 화려한 체위 변화보다 중요한 것은 여자를 받아줄 수 있는 넉넉한 가슴이 아닐까 싶다. 슬픔에 빠진 여자를 무너뜨리는 것은 따뜻한 포옹과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낼 수 있는 치열한 섹스니까.
그런데 남자는 부친상을 당한 여자에게 섹스 제안을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일까. B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조용하다. 나의 손을 잡지도, 누군가 보지 않는 틈을 타서 입맞춤을 하지도, 물론 은밀히 섹스 제안을 하지도 않았다. 내가 B와의 섹스를 상상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바로 지금이 B에게 나와 섹스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그는 모르는 듯하다.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있나. 나의 마음을 눈치 채지 못하는 그도 안타깝고 이 세상 누구도 아닌 B와의 섹스만 가능할 것 같은 지금의 나도 안타깝다.
그러고 보니 3년 전쯤인가, 아픈 실연을 당한 직후의 원 나이트 스탠드가 떠오른다. 사랑했던 남자와의 이별 직후 친구 C가 위로 차 우리 집을 방문했는데 그날 나는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나는 C를 한 번도 이성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 C와 나는 형제처럼 지내는 죽마고우였다고 할까. 아마 C 역시 한없이 약해진 나를 보기 전까지는 나를 형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나에게 C가 키스했고 우리는 첫날밤을 보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알고 보면 C와 내가 인연이 아닐까. C와 맺어지기 위해 내가 이렇게 먼 길을 돌아왔는지도 몰라’라고 말이다.
C와 나는 여전히 친구 사이다. C와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 외모는 딱 내 이상형인데 가치관이 서로 맞지 않았다. 그러니 C가 섹스 중 이런 저런 얘기를 시작하면 나는 그와의 섹스할 맛이 똑 떨어졌다. 그래서 C가 얘기를 시작하려고 하면 나는 그의 입에 키스를 퍼붓곤 했다.
사실 B도 마찬가지다. B 역시 몸으로 위로 받을 수 있는 친구 중 하나이지만 그와 연인으로 지내라면?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나는 ‘내가 왜 얘랑 사귀지?’하는 후회에 빠질 것 같다.
내 말을 들은 친구 D가 명언을 남겼다. “그에게 너와 섹스할 때는 입을 다물라고 해”라고 말이다. 적어도 섹스할 동안에는 그의 외모와 피스톤을 즐겨보라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다. 머지않아 나는 B를 호출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명령할 것 같다. “아무 말 말고 나 좀 안아줘. 제발 아무 말 하지마”라고 말이다.
박훈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