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대권 사이 ‘엉거주춤’
성소수자 인권단체 회원들이 지난 11일 서울시청 로비에서 서울시가 외부 시민위원으로 구성해 만든 인권헌장을 중도 폐기한 데 대해 규탄하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이시대 고난받고 억울하고 힘든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지난 2009년, 당시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된 뒤 이같이 말했다. 그런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있어 지난 12월 둘째 주는 ‘가장 고난받고 억울하고 힘든’ 한 주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월요일인 지난 8일, 박 시장은 아들인 박주신 씨 병역 의혹을 제기했다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이들의 첫 번째 공판을 지켜봐야 했다. 이날 피고소인 7명은 재판부를 상대로 “주신 씨를 불러 MRI를 다시 찍어야 한다”며 자신들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이와 함께 국민참여재판 의사를 밝히는 등 재판을 ‘여론전’으로 이끄는 시나리오도 제기됐다. 끝난 듯 끝나지 않은 싸움이다.
이에 앞서 6일부터는 LGBT, 레즈비언(Lesbian), 게이(Gay), 양성애자(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 등 성소수자를 중심으로 시청 점거 농성이 시작됐다. 서울시가 외부 ‘시민위원’으로 구성해 만든 인권헌장을 중도 폐기한 데 반발해 기습적으로 점거 농성을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 반대를 명시한 인권헌장 선포를 요구하는 한편 끈질기게 박 시장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진보진영에서는 “박 시장이 소수자 목소리를 외면하고 보수·기독교계 표를 의식한다”는 원색적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서울시청에서 만난 한 농성 참여인은 “인권헌장 제정은 박 시장의 공약이었다. 우리를 바깥으로 불러 일을 키워놓고 내팽개친 것”이라며 “박 시장을 끝까지 지지할 쪽이 원하는 바를 분명히 알릴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들이 문제 삼은 것은 박 시장의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발언이었다. 지난 1일 한국장로교총연합회(한장총) 임원진과의 간담회에서였다. 이날 박 시장은 “성전환자에 대한 보편적인 차별은 금지되어야 한다”면서도 “동성애는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혀, 지지나 반대가 성립하지 않는 생래적 특성을 정치쟁점화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이 같은 상황은 박 시장이 자초한 면이 있다. 올해 미국의 한 지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시아 최초로 한국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길 원한다”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해당 인터뷰 내용 중에는 “한국은 기독교의 힘이 매우 강하다. 정치인들에게 쉽지 않은 문제”라며 고민을 토로한 대목이 있긴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벌집을 쑤신’ 격이라는 반응이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고참 당직자는 이렇게 일갈했다.
“쿨한 모습을 보이려다 자충수에 빠졌다. 서울시 정무팀에서 저런 일정과 발언을 왜 컨트롤 못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박 시장 주변에 486세대와 시민사회 세력이 너무 득세하는데, 이들이 사실상 서울시를 운영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초대 정무부시장인 김형주 전 의원, 기동민 전 부시장, 그리고 현 임종석 부시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486 운동권 출신이다. 똘똘 뭉쳐서 행정가 모습만 보여도 모자랄 판인데, 이번 일로 대권에 욕심낸다는 이미지만 얻게 됐잖느냐.”
새정치연합 소속 한 서울시의원은 “서울시 정무라인에서는 운동권 티를 못 벗었는데, 홍보라인에서는 세련된 뉴욕 정서로 포장하려니 뭐 정신을 차리겠느냐. 지금 박 시장 시정은 새정치연합보다 새누리당에서 더 좋아한다는 말까지 나온다”며 “큰 그림을 봐야 한다. 아직도 광화문에 세월호 농성장이 세워져 있고, 시청을 일주일이나 점거하는데도 그냥 우리 편이니 예쁘게 봐준다. 서울시를 도대체 어떻게 운영하고 있는 것이냐”고 덧붙였다.
이번 시청 농성에서는 비단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다산콜센터 직원과 서울시 수도검침원, 씨엔앰 해고노동자들 이슈까지 재론되면서 박 시장의 정치력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기도 했다. 이들 사이에서는 ‘최후의 보루’인 박원순 시장이 변했다는 성토가 들끓었다. 평소 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격의 없는 소통을 보이던 박 시장은 농성이 시작된 6일 이후 SNS를 끊다시피 하고, 출근도 지하주차장을 통했다.
결국 농성 5일째인 지난 10일 박 시장은 “서울시 인권헌장 제정과 관련해 심려를 끼쳐드린 점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며 ‘진정성 있는’ 후속 조치를 약속했다. 다음날 성소수자들은 “우리가 승리했다”며 시청 점거 농성을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서울시는 인권헌장을 선포하지 못하고 있다.
시사평론가 공희준 작가는 “박원순 시장은 더 이상 인권변호사가 아닌 천만 시민의 대변인이다. 인권변호사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없지만 행정가이자 정치인이라면 주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며 “성소수자 문제는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는 아니다. 인권헌장 전체를 봐도 성소수자는 부분적이다. 문제는 박 시장이 여전히 인권변호사 타이틀을 지키려고 하면서 대권주자 타이틀과 거리감이 생기고 일관성 없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새정치연합 한 재선 의원은 “그래도 박 시장이 나름 잘 대처를 했다. 배운 게 많을 것으로 본다. 진보는 어차피 같이 가야 하는 것이고, 시장으로서 보수세력을 끌어안으려는 시도를 나쁘게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옆에서 이 의원 보좌관이 ‘(박 시장은) 서울깍쟁이 정치를 한다’고 말하자 그는 “똑똑한 거지, 그게 뭐 나쁜 거야?”라고 되받아쳤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