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없고 채찍만 ‘안팎’으로 뿔났다
▲ 고 박진희 기수. 사진출처=부산경남기수협회 | ||
하지만 동료를 잃은 부경 기수들의 슬픔과 응어리는 쉽게 풀리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일요신문> 취재결과 박 씨 자살 이후 실시된 부경 경주(19일, 21일)에서 기수들이 K 조교사가 관리하는 마필에 기승하는 걸 거부해 K 조교사가 출전시킨 경주마들은 기승할 기수가 없어 출전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박 씨 자살사건으로 촉발된 부경 기수들의 보이콧 사태를 추적해봤다.
벌써 두 번째다. 2005년 박 씨의 동기인 이명화 기수가 체중감량 스트레스로 자살한 지 5년 만의 일이다. 공교롭게도 지금껏 발생한 여자 기수 자살사건은 모두 부경에서 벌어졌다. 부경은 한국마사회에서 운영하는 경마장 중 하나다(마사회는 서울, 제주, 부경 등 세 곳에서 경마공원을 운영하고 있다). 부경은 부산광역시 강서구 범방동과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면 수가리에 절반씩 걸쳐있기 때문에 부산경남경마공원으로 불린다.
박 씨는 부경에서 활동하는 조건으로 서울경마공원에서 잠시 활약한 바 있고, 기수면허 취득 1년 만에 우승하는 등 이변의 주역이기도 했다. 그 후 부경이 새롭게 개장하면서 동기생인 고 이명화 기수와 후배인 김서진 기수와 함께 부산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이 씨는 부경 오픈을 앞두고 체중감량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했고, 유망주였던 김 씨 또한 잦은 부상 등을 이유로 기수 생활을 포기했다. 부경 유일의 여기수로 외롭게 활약했던 박 씨가 선택했던 것도 결국 자살이었다.
박 씨는 “경쟁이 심한 부산경마장인 만큼 여자 기수로서 견뎌내기가 이제 힘에 부친다. 살다보면 분명 더 좋은 날도 있겠지. 하지만 그때를 기다릴 만큼의 여력조차 남아 있지가 않다”라는 말을 남기고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박 씨 유서는 그의 자살 배경과 맞물려 또 다른 논란의 불씨를 낳고 있다. 그는 유서에서 “친분도 있는 K 조교사는 왜 날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거지. 왜 혼자 견뎌내고 있는 나를 ‘또라이 같은 년’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있는지 모르겠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접한 일부 네티즌들은 K 조교사를 살인범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3월 24일 기자와 통화한 김해 서부경찰서 관계자는 “기수들이 K 조교사가 박 씨에게 직접 욕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다. K 조교사 역시 이를 부인하고 있다. K 조교사가 직접 욕을 한 것이 아니라 박 씨가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건너들은 것 같다”라며 “K 조교사 때문이라기보단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마음의 상처 때문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 씨가 심리적 부담 등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나면서 사태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듯했다. 하지만 부경 기수들이 이심전심의 집단행동을 하면서 사태는 새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부경 기수들은 3월 19일과 21일에 있었던 경주에서 K 조교사가 관리하는 마필에 단체로 기승을 거부했다. K 조교사 마필에 기승할 예정이던 5명의 기수가 부상 및 집안 사정을 이유로 출전을 포기한 것이다. 기수들이 경주 전날인 18일에 단체로 출전 포기 의사를 밝혔다는 점에서 의도적인 ‘기승 거부’로 해석되고 있다. 국내 기수들의 기승 거부로 얼마 전 원정에서 복귀한 외국 기수가 K 조교사가 관리하는 마필에 일부 기승했다. 그러나 K 조교사의 경주마 대부분은 기승을 원하는 기수가 없어 ‘기수변경 불가’라는 흔치 않는 이유로 출전하지 못했다.
기자는 3월 25일 사건 담당 형사와 전화통화에서 “기수들이 K조교사의 마필에 기승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담당 형사는 “기수들 사이에서 K 조교사의 마필에 기승하는 것은 곧 ‘배신’이란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들었다”며 “다른 기수들이 기승한 이유를 잘못 오해할까봐 걱정하는 듯 보였다”고 답했다.
여태까지 부경에서 기수들이 단체로 특정 조교사의 마필에 기승하지 않은 경우는 단 한차례도 없었다. 부상을 입더라도 이를 악물고 경주에 참가하는 기수들이 대부분이었다. 25일 기자와 통화한 부산기수협회 관계자는 “우리는 K 조교사 마필을 타지 말자는 담합을 한 적도, 논의를 한 적도 없다. 고인을 기리며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타지 않는 것”이라며 “K 조교사와 친분이 있는 기수가 단 한명이라도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지 말자’고 기수들을 설득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특정일을 정해놓고 ‘타지 말자’고 논의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타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자발적으로 말에 오를 것이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기수들이 K 조교사에게 대항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마사회의 부당한 시스템에 항거하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마사회는 부경 개장 초기부터 부산경남의 기수협회, 마주협회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서울, 제주의 경우 협회를 공식 인정하고 정당한 대우를 해주고 있는 것과 사뭇 다르다. 기수협회 관계자는 “마사회는 기수협회의 존재를 인정할 경우 중요한 결정 때 기수들과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 같다”면서 “우린 아무런 지원도 받고 있지 않다. 기수들끼리 조금씩 돈을 모아 사무실을 어렵게 운영하고 있다. 박 기수도 기수협회 총무를 맡아 일하면서 마사회의 왜곡된 시스템에 마음 아파했다”라며 기수들의 월급조차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마사회 측에 일침을 놓았다.
기수들의 기승 거부 사태가 지속될 경우 마주들이 입을 손해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3월 24일 기자와 통화한 한 마주는 “말 관리비로만 한 달에 150만 원의 비용이 들어간다. 출전을 못하게 될 경우 관리비만 낭비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100만 원에서 4000만 원까지 상금을 탈 수 있는 기회도 놓치게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마주는 금요일(19일) 경주를 앞두고 말의 관리를 K 조교사에서 다른 조교사로 변경하기도 했다. 25일 통화한 이 마주는 조교사 변경 이유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기승 거부 사태가 계속될 것 같아 변경했다. 물론 K 조교사와 합의 하에 결정한 일이다”고 답했다.
반면 K 조교사를 믿고 계속 마필을 맡기겠다는 마주들도 상당수에 달했다. 이들 마주들은 24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경주에서 우승하기 위해선 조교사의 역할이 매우 크다. K 조교사는 경륜과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며 “기승 거부가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원만히 해결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기자는 기수들의 기승 거부 사태와 관련해 K 조교사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여러 채널을 통해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