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마저 붕괴…이젠 털고 가자
청와대 인적쇄신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김기춘 비서실장과 비서관 3인방의 거취에 시선이 쏠리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 비서실장. 연합뉴스
그의 말처럼 시기와 방식, 규모는 불분명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결국 청와대 참모진과 장관 등 내각에 대한 개편에 나설 것이라는 데에는 청와대와 여권 관계자들도 별다른 이견을 제기하지 않고 있다. 최소한의 읍참마속이라도 필요하다는 여론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인적쇄신 전망을 묻자 “그 질문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이미 공은 대통령에게로 넘어가 있고, 대통령의 결정만 남았을 뿐”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최근 발표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를 이해할 만하다. 12월 19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12월 셋째 주(16∼18일) 데일리 오피니언 조사(성인남녀 1006명 대상, 휴대전화 RDD 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는지를 물은 결과 ‘잘 하고 있다’는 긍정평가는 37%, ‘잘못 하고 있다’는 부정평가는 52%로 나왔다. 지난해 박 대통령 취임 후부터 지속적으로 실시된 이 기관의 조사에서 박 대통령 국정수행에 대한 긍정평가가 40% 밑으로 떨어진 것도, 부정평가가 50%를 넘어선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더 심각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추이다. 이 기관 조사에서 박 대통령 국정수행에 대한 긍정·부정 평가는 지난 11월까지만 해도 44∼45%선에서 똑같이 정체돼 있었다. 하지만 12월 첫째 주 긍정평가 42%, 부정평가 48%로 격차가 6%포인트(p)를 기록하더니 둘째 주에는 7%p(긍정평가 41%, 부정평가 48%), 셋째 주에는 15%p로 급격하게 벌어졌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박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들에 비해 고정 지지층이 탄탄했던 점, 그리고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보수화된 점 등을 감안하면 이 같은 박 대통령의 지지율 급락은 예사롭지 않다고 분석하고 있다. 한 전문가는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40%대 중반의 지지율을 유지했던 점을 상기시키면서 “역대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차질이 발생하기 시작한 심리적 저지선이 지지율 30%였다면 박 대통령은 그 선을 40%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심리적 저지선’이 무너졌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에게 이제 인적쇄신을 포함한 전면적인 국정쇄신은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다. 실제로 19일 발표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18일, 성인남녀 500명 대상, 유·무선 RDD 조사,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4.4%p)에서 청와대에 대한 인적쇄신이 필요한지를 물은 결과 ‘필요하다’는 의견이 69.9%,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이 9.8%로 나타났다. 리얼미터 측은 새누리당 지지층의 49.7%, 대구·경북 거주자의 70.8%, 부산·울산·경남 거주자의 66.3%, 60세 이상의 59.6%, 50대의 62.8%가 각각 인적쇄신이 필요하다는 응답을 내놨다고 밝혔다.
‘문고리 권력 3인방’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왼쪽부터).
이에 따라 인적쇄신의 폭에 우선적으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 대통령이 돌아선 민심을 단시간 내에 되돌려놓을 수 있을지는 결국 쇄신의 폭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국민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만한 카드를 준비해야 할 처지다. 결국 관심은 김기춘 비서실장과 문고리 3인방(이재만 총무·정호성 제1부속·안봉근 제2부속 비서관)의 거취로 집중되고 있다.
김기춘 실장에 대해서는 여권 인사들도 교체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김 실장이 고령에 가정사까지 겹쳐 이미 여러 차례 물러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었고, 이번 문건 유출 사건 등의 책임질 부분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친이계 의원은 “이번 사건을 통해 ‘과연 왕실장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김 실장은 존재감이 없었다. 사태가 악화되는 과정에서 관리책임을 다하지 못한 김 실장은 당연히 문책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며 “실세들의 국정농단 실체와 상관없이 최소한 ‘조응천(전 공직기강비서관) 대 문고리 3인방’, ‘박지만 대 정윤회’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이를 몰랐을 리 없는 김 실장이 왜 문제를 방치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문고리 3인방의 거취에 대해서는 청와대는 물론 새누리당 내에서도 전망이 엇갈린다. 객관적인 상황은 김 실장과 마찬가지로 교체하는 게 불가피해 보이지만 ‘문고리’라는 별칭이 보여주듯 이들은 박 대통령에는 수족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친박계의 한 의원은 “3인방은 박 대통령이 그 누구보다도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자식과도 같은 사람들”이라며 “김기춘 실장이라면 몰라도 박 대통령이 3인방을 내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3인방 전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부 교체는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특히 이재만 비서관의 교체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3인방 중 이 비서관은 가장 연장자로 문고리의 상징처럼 각인돼 있고 이번 사건을 통해 이미 상당한 문제점이 드러났다는 게 그 이유다. 우선 이 비서관은 정윤회 씨와 10년 넘게 만나지 않았다고 국회에서 증언한 것과 달리 이번 사건과 관련해 최소한 두 차례는 접촉한 사실이 드러났다. 또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통해 인사전횡 의혹에까지 휘말리게 됐다.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이 경찰 인사에 개입한 인물로 공개 비판한 안봉근 비서관도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 참모들 못지않게 주목받는 것은 정홍원 국무총리의 거취다. 박 대통령이 정 총리까지 교체할 경우 청와대를 넘어 내각으로까지 인적쇄신의 폭을 넓히는 의미가 있다. 쇄신의 진정성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에 더 유리하다. 정 총리는 이미 세월호 참사 부실 대응의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유임된 바 있고, 건강상의 문제점도 노출했던 만큼 교체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인적쇄신 카드를 뽑아들 경우 청와대를 넘어 내각으로 그 폭이 확대될지 주목받고 있다. 교체설이 제기되고 있는 정홍원 국무총리(왼쪽)와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등 일부 장관들도 함께 교체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만 청와대 참모들과 달리 국무위원들은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고, 특히 총리는 인준 투표까지 거쳐야 한다는 점은 부담이다. ‘인사청문회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박 대통령이 집권 3년차를 겨냥해 내각의 안정을 중시할 경우 인적쇄신 바람이 청와대에 국한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인적쇄신의 폭과 함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시기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지난 12월 17일 최고위원·중진의원 연석회의에서 “올해 안에 다 끝내야 한다. 다 털고, 잘못된 것에 대한 대처는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뭘 털고 가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국면이 신년으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만은 분명했다. 새누리당 일각에서는 김 대표의 발언 등을 거론하며 연말 인적쇄신 단행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청와대 관계자들은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며 고개를 가로젓고 있다.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아무리 은밀하게 진행한다고 해도 중요한 인사를 단행하려면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며 “현재는 주변에서 말만 무성할 뿐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없는 상태다. 지금부터 마음먹고 서두르더라도 실제 인사는 내년으로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년 초로 넘어갈 경우 고려해야 할 정치적 일정들이 있다. 1월 12~23일 정부 부처들의 신년 업무보고가 예정돼 있다. 공무원연금 개혁안 등을 처리해야 하는 12월 임시국회는 1월 13일까지 이어진다. 2월 25일에는 박 대통령이 취임 2주년을 맞는다. 이런 스케줄을 감안할 때 박 대통령이 임시국회 종료 즈음, 또는 정부 부처 업무보고 종료 이후 결단을 내릴 가능성이 제기된다. 박 대통령이 청와대와 내각 교체 등 국정쇄신안을 손에 쥐고 신년 기자회견에 나설 것이라는 얘기다.
새누리당 의원실의 한 고참 보좌관은 “신년 기자회견은 이번 문건 유출 사건 이후 박 대통령이 처음으로 국민 앞에 서게 되는 자리”라며 “어떻게 국정을 쇄신할 것인지 답을 제시하는 자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박 대통령은 1월 6일 신년 기자회견을 열고 10명의 기자로부터 질문도 받았다. 이와 동일한 형식으로 신년 기자회견이 진행된다면 박 대통령이 어떤 식으로든 쇄신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데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박 대통령의 결단이 임박했다는 이런 주장들과 달리 신중론을 펴는 목소리도 있다. 청와대의 한 행정관급 인사는 사견임을 전제로 “대규모 인사가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실제 인사를 단행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며 “지금 이 와중에 예전처럼 인사참사까지 겹친다면 집권 3년차 국정운영이 시작부터 완전히 헝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인사 대상이 최고위급인 만큼 더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