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드라마 싸모 저리가라 ‘찍히면 죽는다’
막장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재벌집 사모님들의 멘트다. TV 채널을 돌리며 “에이, 저런 사람이 어딨어”라고 한 번쯤 혼잣말을 내뱉어 봤겠지만, 현실 속 사모님들의 추태는 드라마 그 이상이다. 백화점에서 1년에 수억 원을 뿌리고 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물 뿌리고, 뺨 때리고, 무릎을 꿇리는 막장 3종 세트를 시전한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그 ‘우아한’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우아하기 그지없는 백화점 VVIP들의 세계, 그 이면에 감춰진 추태를 들춰봤다.
백화점에서 1년에 억단위로 돈을 쓰는 VVIP 고객 중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진상’이 많다. 드라마 <마이 시크릿 호텔>의 한 장면. 원 안은 명동 신세계 백화점 VIP 고객 라운지.
“VVIP들은 일단 사람을 종 부리듯 대한다. 다짜고짜 반말하는 건 약과다.”
한 백화점에서 1년여 일한 뒤 퇴사한 A 씨(26)는 이렇게 입을 뗐다. 퇴사한 이유도 이런 진상VIP고객들의 행각 때문이었다. 반말은 기본이요, 사소한 부분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네가 나를 몰라봐?”라는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A 씨는 “물론 친절한 VVIP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하대하는 건 기본이다. ‘응, 참하네. 몇 살이야? 내가 의사, 검사 소개시켜 줄까?’ 등 선심이라도 쓰는 말투에 기분이 상한다”고 말했다.
특히 VVIP의 클레임은 다루기 더 까다롭다. 그들은 본인이 원하는 바를 절대 얘기해주지 않는다. 그저 직원들이 알아차릴 때가지 곤혹스럽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등급에 따라 백화점 매출이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억대까지 갈리기 때문이다. VVIP는 한 명이라도 이탈했다간 지점 매출에 큰 타격을 입기에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때문에 직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말이 “나 백화점 옮길 거야”다. 이런 1%의 고객을 잡기 위해 직원들은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해야 하는 셈이다.
A 씨는 “한번은 동료가 VVIP의 민원성 전화를 받았다. 그 고객은 ‘말투가 마음에 안 든다’며 매일 저녁 특정 시간에 한 달 내내, 주말 관계없이 사과 전화를 하라고 요구했다. 상사 중 누구도 이런 요구를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동료는 한 달 내내 전화를 걸어 읍소했고, 마지막 날 전화를 끊고 오열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또 다른 백화점 직원 B 씨(26)는 더 황당한 일도 겪었다. 딸의 취업을 위해 진상 짓도 마다않는 VVIP 고객 때문이었다. 다음은 B 씨가 들려준 일화다.
“VIP라운지에서 급하게 전화가 걸려왔다. 한 고객이 딸과 함께 와서는 소리 지르면서 난리를 쳐 주변 고객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얘기였다. 급히 내려갔더니 그 고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내게 친한 척을 하며 ‘우리 딸이 이번에 이 백화점에 원서를 넣었는데 합격 비법을 알려 달라’고 말했다. 거의 한 시간에 걸쳐서 입사 과정을 얘기해줬다. 그리고 바로 인사팀에 가서 ‘절대 뽑지 말라’고 얘기했다.”
사소한 응대 실수에 엄청나게 폭발하는 고객들도 있다. B 씨는 VVIP 민원 관련한 얘기라면 무궁무진하다며 또 다른 일화를 들려줬다. “매장에 나갔다가 복귀했는데 사무실이 쑥대밭이 돼 있었다. 중년의 남성이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고 뒤에는 내연녀로 추정되는 여성이 말리지도 않고 조용히 서 있더라. 본인이 고급 여성복 브랜드 매장 앞에서 마네킹을 보고 있었는데 매장 직원이 얼른 나와서 마네킹 옷을 벗겨 보여주지 않았다며 어떻게 고객 응대를 이렇게 하냐고 노발대발했다. 그런 클레임이 들어올 땐 정말 어이없다”며 B 씨는 혀를 찼다.
백화점 관계자들은 “일반 고객들의 ‘진상짓’은 상품권으로 무마되는데, VVIP고객들의 진상짓은 어떤 것으로도 수습하기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서울 시내 한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는 C 씨(30)는 “직원들 무릎 꿇리게 하는 건 일도 아니다”고 말했다. “VIP라운지에서는 음료를 고객들에게 한 잔씩 무료로 제공한다. 동반고객의 수, 제공되는 음료 등을 안내하는데 한번은 어떤 VVIP가 ‘내가 공짜 음료 얻어먹으러 온 줄 아느냐’며 안내하는 직원에게 퍼부어댔다. 욕설까지 해가며 해당 직원을 무안을 주더니 사태를 수습하러 내려온 직원들에게 ‘너희 다 고소할 줄 알아라. 내 이름 걸고 너는 반드시 자르겠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진상 레전드’에 대해 말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팔아주기에 이런 ‘행패’를 부리는 걸까. VIP의 등급은 백화점별로 기준도, 이름도 다르다. VIP 중 가장 매출을 많이 올려준 고객은 상위 0.1%의 VVIP로 구분된다. 대부분 영업점별로 기준이 다르지만 VVIP고객이 되려면 최소 1년에 ‘억’은 써야 한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누군가는 1년 연봉을 다 합쳐도 못 버는 금액을 백화점에서만 지출하는 셈이다.
롯데백화점은 VIP 고객관리를 위해 MVG(Most Valuable Guest) 제도를 도입했다. VIP고객은 MVG-A(Ace), MVG-C(Crown), MVG-P(Prestige)로 나뉘는데 이중 MVG-P는 연 매출 6000만 원 이상을 쓴 고객에게 주어지는 VVIP회원 자격이다. 여기에 롯데백화점의 명품관 브랜드인 애비뉴엘은 VVIP등급을 따로 두고 있다. 최고급 등급인 LVVIP의 경우 연간 명품 구매 금액만 1억 원이 넘는 고객에게 부여된다.
명동 신세계 백화점 직원들이 VIP고객 차를 발레파킹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현대백화점은 블랙쟈스민, 블루쟈스민, 클럽쟈스민 세 등급으로 나뉜다. 블랙쟈스민 등급은 연간 최소 5000만 원 이상 구매하는 VVIP들에게만 주어진다. 다른 백화점과 달리 현대백화점은 VVIP 선정 기준 매출액을 대외비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현대 백화점 관계자는 “압구정 블랙쟈스민의 경우 연 매출 1억 원 이상은 돼야 하는 걸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신세계 백화점은 백화점 3사 중 유일하게 ‘상대평가’로 VVIP를 선정한다. 매년 매출 상위 999명을 트리니티 회원으로 구분한다. 때문에 해마다 연말이면 자신이 트리니티에 들었는지 문의하는 고객들의 전화가 넘쳐난다. 이외에 일반 VIP는 퍼스트프라임(연 6000만 원), 퍼스트(연 4000만 원)로 나눠 각종 혜택을 제공한다.
신세계를 제외한 백화점들은 지점별로 VVIP를 선정하기 때문에 고객들 사이에 뒷말이 무성하다. VIP등급에 따르는 혜택은 가장 많이 팔아준 지점에서만 누릴 수 있지만 VVIP의 혜택은 전 지점에서 누릴 수 있다. 경기도 한 지점의 VVIP가 압구정점 VVIP라운지에 들어갔다가 항의를 받았다는 건 백화점 직원들 사이에 도는 유명한 일화다. 압구정점은 전국 매장 중에서도 매출액이 톱이기에 억 단위는 써야 VVIP에 선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VVIP가 받는 혜택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백화점을 운영하는 재벌 2세인 현빈이 하지원을 데리고 매장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니며 옷을 사주는 장면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진짜 VVIP는 매장을 돌아다니는 수고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백화점에 도착하는 즉시 발레파킹 서비스와 함께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돼 그 자리에서 옷을 입어보고 쇼핑하면 된다. VVIP가 원하는 쇼핑 목록에 맞춰 평소 선호하는 브랜드의 ‘신상’으로만 진열된다. 도착하자마자 “겨울 코트가 사고 싶은데…” 한 마디면 모든 게 준비되는 방식이다. 지인들을 초대해 개인 파티도 열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반인들은 접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세계다.
또한 진짜 VVIP는 관리직 직원의 이름을 안다. 이런 고객들은 매장 직원들이 상대하지 않고 관리직의 부장급 이상 직원들이 바로 나온다. 게다가 지점별 최고 VVIP가 ‘뜨면’ 점장이 나와 쇼핑을 돕고, 대화를 나눈다.
각 백화점들은 종종 VVIP를 초대해 파티를 연다. 갤러리아 백화점의 경우 상위 1% 고객만 초청한 살롱파티를 최근 열었다. 세계 5대 보석 브랜드로 꼽히는 반클리프아펠의 새 주얼리를 공개하고, 한 병에 수백 만원씩 하는 최고급 샴페인도 제공했다. 앞서의 A 씨는 “이런 파티에는 초대 가수도 신경을 많이 쓴다. 인순이, 성시경 등 40~50대 중년 여성 취향에 맞춰 ‘몸값’이 가장 많이 나가는 가수들을 초청한다”고 귀띔했다.
이밖에도 VVIP들이 받는 혜택은 더 있다. 매년 명절 때마다 백화점 지점장의 이름으로 값나가는 명절선물 세트가 제공되고, 상시 할인혜택도 있다. 또 할인행사를 거의 하지 않는 명품의 경우 VVIP들만 별도의 공간으로 초대해 많게는 50%까지 이월상품을 할인해준다. 대구의 한 백화점의 VVIP인 D 씨는 “고급 화장품 브랜드에서는 뷰티클래스를 열어 신제품도 소개하고 각종 뷰티 관련 정보도 알려주고 한다. 또 패션 브랜드도 신제품을 론칭할 때마다 미리 초대해 구매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말했다.
앞서의 A 씨는 “물론 VVIP고객들이 쓴 만큼 돌려받는다는 의식이 있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 이외에 인간적인 모멸을 주는 고객을 만날 때마다 어떤 보람도 찾기 힘들다. 일하기 전에는 사람 만나는 걸 참 좋아했는데 백화점에서 일한 후로는 말이 없어져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만 두고 나온 거다”고 말했다. B 씨 역시 “이곳에선 모든 게 돈으로 등급이 정해진다. 하지만 요즘은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매장 곳곳에 ‘직원들도 누군가의 가족입니다. 친절하게 대해주세요’라는 요청문이 붙어있다”고 말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전설의 ‘진상’ 퍼레이드 모자 속에 한우 숨기고 피 ‘뚝뚝’ 가장 힘든 일은 사람 대하는 일이라고들 한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만들 만큼 진상짓을 일삼는 고객들 때문이다. VIP룸에 찾아오는 고객들 중에는 기본적인 본인확인 처리를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도 했다. 김 씨는 “다른 사람 명의의 예금통장을 가져와서 해지해달라고 하기에 안 된다고 하니 ‘내 얼굴이 보증서인데 왜 안 해주냐’고 따지는 고객도 있었다”고 말했다. 또 고객 편의를 위해 비치해놓은 사탕, 커피믹스를 모조리 가져가거나 심지어 보온병을 가져와 원두커피를 담아가는 고객도 있다. 김 씨는 “돈 있는 사람이 더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공항이나 비행기도 유난히 대접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공간이다. 얼마 전 최 아무개 씨(26)는 일본여행을 갔다가 한국인 진상 고객을 발견하곤 얼굴이 화끈거렸다. 최 씨는 “수화물 무게를 재는데 커다란 트렁크를 4개나 들고 와서 추가요금이 발생하니까 ‘그런 규정이 어딨었냐’며 소리 지르고 말 그대로 드러누웠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창피할 지경이었다”고 설명했다. 비행기 안은 더하다. 탑승권 확인을 요구하는 승무원에게 ‘나 모르냐’며 탑승권을 집어던지는 승객부터 심지어 승무원의 얼굴을 때리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기내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난동을 부리며 먹지 않겠다고 버티는 승객에게 비즈니스석용 식사를 갖다 주니 그제야 맛있게 먹는 승객도 있다. 마트는 듣도 보도 못한 고객 민원이 몰리는 곳이다. 마트 식음료부에서 일하는 한 직원은 전설처럼 내려오는 한 고객의 기행에 대해 들려줬다. “모자를 쓴 남성고객이 계산을 하는데 캐셔가 얼굴을 보니까 피를 흘리고 있더라. 너무 놀라서 의무실에 데려가야 하나 허둥대던 차에 손님의 모자가 벗겨졌다. 알고 보니 머리 안에 감춘 한우 등심 두 덩이에서 핏물이 흐르는 거더라” 지방의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박 아무개 씨(26)는 “중년 여성 고객이 주로 많은데 물건을 반품하면서 아이 핑계를 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한 번은 1년 전 구입한 아동 신발을 가져와 ‘1년 만에 아이 발이 얼마나 크겠냐. 신발이 줄어든 거니 반품해 달라’고 요구한 고객도 있었다”고 말했다. 박 씨는 “이 밖에도 아이가 음료를 뱉어 낸다고 문제 있는 게 아니냐며 바꿔달라는 손님, 입던 속옷을 가져오는 사람, 거의 다 마신 와인을 가져와 코르크 찌꺼기가 발견됐다고 바꿔달라는 손님, 다 먹은 쌀 포대를 가져와 벌레가 있었다며 반품하는 손님까지 이루다 말할 수 없다”며 한숨지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