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를 살해한 후 사체를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는 범인(왼 쪽)이 경찰 입회 하에 당시 상황을 재연하고 있다. | ||
경찰 강력반에서 잔뼈가 굵은 한 형사의 경험담이다. 살인사건이 보고되면 해당 경찰서의 핵심 수사력은 일시에 집중된다. 사건관련자들의 통화내역 분석이나 주변 탐문도 3일이면 모두 끝난다.
이 이야기를 거꾸로 풀이하면 발생 이후 3일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살인사건의 경우 ‘미제’로 남을 확률이 그만큼 높다는 말도 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케이스. 얼마전 경남 통영에서 발생한 사건처럼, 때로는 잊혀진 사건이라도 희미한 실마리 하나에서 결정적 열쇠가 얻어지기도 한다.
지난 5월29일 통영 앞바다 외딴섬에서 심하게 부패된 변사체 한 구가 발견되면서 시작된 이 사건.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어 자칫 미궁으로 빠질 수 있었지만 우연히 발견된 ‘세탁소 꼬리표’ 덕분에 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지난 5월29일 오후 2시께 경남 통영시에 있는 조그만 섬 사량도를 찾은 김성미씨(가명·40·여). 가족들과 함께 사량도 지리망산을 등산하고 내려오던 김씨는 참아 왔던 소변을 보기 위해 급히 화장실을 찾았다.
그러나 외딴 섬에서, 그것도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서, 공중화장실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사람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을 찾아다니던 김씨는 2부 능선쯤에 위치한 지름 1m짜리 배수관 하나를 발견했다.
이곳에서 일을 보고 있는 순간 김씨는 어디선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이때 조용하던 섬 사량도에 카랑카랑한 여인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김씨가 발견한 것은 다름아닌 변사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패된 사체가 배수관 안쪽 2.5m 지점에 버려져 있었다. 놀란 김씨 일행은 즉시 인근 사량파출소에 이 사실을 신고했다.
곧이어 출동한 통영경찰서 형사들은 일단 현장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다. 결과는 비관적이었다. 일단 신분증 등 신원을 알 수 있는 소지품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사체의 전면부가 이미 완전히 부패해 머리카락이나 치아, 손톱이 모두 빠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손가락에 남아 있던 희미한 지문도 국과수 부검 결과 ‘확인불가’. 다만 발견 당시 18K 반지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사체의 주인공을 20∼30대 여성으로 추정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경찰은 고민에 빠졌다. 답답한 마음에 형사계 사무실로 가져온 변사체의 옷가지를 무심코 뒤적거리던 경찰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사체가 걸치고 있던 반코트의 품질표시 태그 안쪽에 뭔가가 붙어 있었던 것. 거기에는 ○○○이라는 이름이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 범인이 아내의 사체를 유기했던 장소는 울창한 숲에 가려 있어 인적이 거의 없는 곳이었다. | ||
이 과정에서 경찰은 부산에 사는 ○○○로부터 “내 반코트를 빌려 입은 친언니(26)가 지난 2월19일 형부와 싸우고 가출했다”는 결정적 증언을 얻을 수 있었다. 당연히 실종된 여인의 남편 강동민씨(가명·27)가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랐다. 게다가 강씨의 본적은 사체가 발견된 통영시 사량도.
결국 지난 2일 남편 강씨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받은 경찰은 다음 날 그를 살인 및 사체유기 혐의로 구속할 수 있었다. 경찰에서 확인한 사건의 전모는 이랬다.
강씨 부부가 함께 살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지난 95년부터. 워낙 젊은 나이에 살을 맞대고 살다보니 다툼이 벌어지면 이들 부부는 서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지난 2001년에는 이혼까지 했다가 극적으로 화해해 다시 합친 일도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지난 2월11일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날 활어 운반일을 마치고 술을 한 잔 걸친 강씨는 새벽 3시에 뒤늦게 귀가했다. 부인이 귀가한 것은 그보다도 늦은 새벽 4시.
부인의 늦은 귀가에 격분한 강씨는 “여편네가 지금 이 시간까지 뭐하다가 들어왔냐. 다른 남자랑 놀다온 것 아니냐”며 구타를 시작했다. 자신의 친구들과 놀다온 부인 역시 “내가 뭘 잘못했냐”며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강씨는 이 과정에서 부인을 마구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막상 부인을 살해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내 정신을 차린 강씨는 뒷일을 걱정했다.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스쳤다. 어떤 경우든 ‘잡히면 끝’이라는 결말은 너무도 뚜렷했다.
숨진 아내의 사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씨는 모종의 결심을 한 듯 옷을 챙겨 입었다. 숨진 아내에게도 외투 한 벌을 입혔다. 그리곤 자신의 활어운반차 조수석에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내를 앉힌 뒤 안전벨트를 채웠다. 강씨가 이렇게 차를 몰아간 곳이 바로 자신의 고향인 통영시 사량도였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인 지난 2월12일 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량도를 몰래 찾아간 강씨는 평소 한적하기로 소문난 지리망산으로 향했다. 그리곤 이곳 배수관 깊숙한 곳에 사체를 숨겼다. 이것으로 자신의 범행이 영영 드러나지 않기를 바란 강씨.
그러나 치밀한 강씨의 사체 유기 시도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서 들통나고 말았다. 숨진 아내에게 무심코 입혔던 반코트 안쪽에 세탁소에서 붙여놓은 세탁물 주인, 그러니까 아내의 여동생 이름이 똑똑히 적혀 있었던 것. 완전범죄를 거의 이룰 수도 있었던 강씨의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결정적 ‘실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