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친박 vs 비박 ‘전쟁’은 시작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 2주년 기념일이었던 지난해 12월 19일 새누리당 친박계 중진 7인을 청와대 관저로 초청, 비밀 만찬 회동을 가졌던 것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가 내놓은 반응이다. 12월 30일 <문화일보>가 회동 사실을 처음으로 보도한 뒤 새누리당에서 사실이 확인된 것은 물론 김무성 대표와 비박계 인사들의 불쾌감 섞인 반응까지 다 나왔는데도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렇게 하나마나한 얘기만 늘어놨다. 비밀 회동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어떤 성격이었고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에 대해 청와대는 공식적으로는 단 한마디 말도 없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5년 첫날 서울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아래는 지난 12월 19일 청와대 비밀모임에 참석한 친박인사들. 사진제공=청와대
청와대는 심지어 12월 31일에는 매일 오전 이어온 민경욱 대변인의 브리핑도 생략하고 넘어갔다. 전날부터 이틀 연속으로 박 대통령의 공식 일정이 안 잡히는 바람에 딱히 브리핑할 게 없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휴일이 아닌 한 박 대통령의 공식 일정이 없더라도 민 대변인이 기자실에 찾아와 기자들과 문답 시간을 가져 왔다”며 “청와대가 군색하기 짝이 없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는 반응을 내놨다.
청와대의 이런 대응 태도는 정치권의 관행뿐 아니라 일반인의 상식에도 맞지 않는다.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기밀도 아닌 데다 이미 대강의 사실관계가 드러난 마당에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 ‘NCND’ 전략을 펴는 것은 자칫 국민을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비밀 회동 참석자들의 면면과 비중을 감안하면 청와대의 이런 태도가 더욱 명분 없음을 알 수 있다. 우선 7선의 친박계 좌장 격인 서청원 최고위원과 친정체제 강화 차원에서 정부에 배치한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정갑윤 국회부의장 등이 포함됐다. 이들 외에도 김태환 서상기 유기준 안홍준 의원이 회동에 참석했다. 일각에선 이들을 기존의 원로 7인회에 빗대 ‘신7인회’라고 부르거나 ‘성골’이라고까지 칭할 정도다. 상황이 이런데도 청와대가 막무가내 식 ‘모르쇠’로 일관하는 것은 이번 비밀 회동이 외부로 알려진 게 얼마나 곤혹스러운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곤혹스러운 것은 청와대만이 아니다. 비밀 회동에 참석했던 7인을 비롯해 새누리당 친박계 인사들은 이번 회동이 일상적 소통의 일환이었다며 애써 의미를 축소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지난해 박 대통령이 최소한두 차례 친박계 초·재선 의원들을 비밀리에 만나 간담회를 가졌다”는 얘기까지 흘리고 있다. 한 술 더 떠 “대통령이 앞으로는 친박계뿐 아니라 모든 계파 의원들을 두루두루 만날 계획”이라고 떠벌리는 인사도 있다.
이런 주장의 기저에는 이번 비밀 회동이 박근혜 대통령의 2015년 정국 구상 차원에서 이뤄졌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박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 5년 중 유일하게 전국 단위 선거가 없는 2015년에 국가 개조 수준의 대대적인 개혁을 예고한 상황에서 여당 의원들을 만나 아이디어를 구하고 협조를 당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청와대 비밀 회동 참석자의 한 측근은 “VIP(박 대통령)가 새해 주요 과제로 제시한 노동·연금·금융·공공기관·주택·연금, 6대 개혁은 하나하나가 모두 강력한 저항을 불러올 수 있는 난제들”이라며 “여기에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아 남북관계와 한일관계까지 다 풀어보겠다는 VIP로서는 여당의 강력한 뒷받침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친박계의 한 초선의원은 “회동에서 기업인 사면·가석방과 청와대·정부 인적쇄신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도 당 쪽 의견이 일정 정도 전달됐고, 박 대통령은 이를 경청하면서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하기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청와대 문건 유출과 비선실세 알력다툼 의혹으로 최악의 정치적 위기에 몰린 박 대통령이 난국 돌파를 위한 여론 수렴 차원에서 친박계 중진들을 만났다는 얘기다.
그러나 박 대통령과 친박계 중진 7인의 비밀 회동에 대한 이 같은 합리화 논리에 수긍하는 사람은 친박계뿐인 듯하다. 김무성 대표와 가까운 한 새누리당 의원은 “그런 변명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은 청와대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애초에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에게도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회동 사실이 폭로된 뒤에도 청와대가 아예 입을 닫아버린 것 아니겠느냐”고 힐난했다.
이 의원은 “어떤 말로 포장하더라도 이번 회동은 특별한 직위도 맡지 않고 있는 측근 의원들만 불러 모은 비선 회동일 뿐”이라며 “진정으로 당청이 혼연일체 돼 국가적 개혁 과제들을 완수하기를 바랐다면 박 대통령은 김무성 대표와 더욱 긴밀히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다”고 공박했다.
비박계의 이런 시각은 박 대통령이 여전히 김무성 대표를 불신하고 있고, 이번 회동은 당내 옹위세력을 통해 김 대표를 견제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냐는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공교롭게도 비밀 회동이 있었던 12월 19일 이후 새누리당에서는 이런 의심을 더욱 강하게 만들 만한 일들이 이어졌다.
우선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명예이사장의 여의도연구원장 임명이 12월 22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무산됐다. 김무성 대표의 인사안이 친박계 최고위원들의 반발에 일단 좌절된 것으로, 이는 잠잠했던 친박-비박 간 갈등이 다시 공개적으로 표출되는 시발점이었다. 19일 비밀 회동에 참석했던 서청원 최고위원은 이 회의에서 “의원들로부터 박 이사장의 여의도연구원장 임명과 관련해 우려하는 전화가 많이 오고 있다. 재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것으로 전해졌다.
급기야 비밀 회동 사실이 알려졌던 12월 30일 서울 여의도 한 중식당에서 열린 친박계 모임 국가경쟁력강화포럼의 송년 오찬 자리는 사실상 ‘김무성 성토장’으로 변했다. 모습을 드러낸 35명의 의원들은 송년회라는 취지가 무색하게도 김 대표를 깎아내리는 데 집중했다. 서청원 최고위원은 이 자리에서도 “당의 최고 선배이자 과거 (당대표)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서 길을 잘못 가면 잘못 가는 길이라고 지적할 의무가 나한테 있다”면서 “당도 앞으로 더욱 민주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서 최고위원과 함께 비밀 회동에 참석했던 유기준 의원은 “국가혁신과 경제살리기, 국민적 합의를 모아 힘껏 달려가야 할 시점에 선명하지 못한 당청관계와 국민 관심을 분열시킬 수밖에 없는 개헌논쟁, 당직 인사권을 사유화하는 모습 등 갈 길 먼 정부의 발목을 잡는 일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당 사무총장을 지낸 친박 핵심 윤상현 의원도 “전당대회에서 (김 대표의) 득표율은 29.6%였는데 지금 당을 운영하는 데 있어 당대표의 모습은 한마디로 92%의 ‘득템’을 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많다”고 말했다. 한 새누리당 당직자는 “오고 간 말들만 놓고 보면 마치 당이 깨지기 직전의 상황 같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이쯤 되면 김무성 대표와 비박계 인사들로서는 아무리 믿지 않으려 해도 청와대 비밀 회동과 친박계의 파상 공세를 연결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새누리당 내에서 비교적 중립지대에 있다는 평가를 받는 한 중진 의원은 “최근 상황을 지켜보면 박 대통령의 뿌리 깊은 ‘배신 트라우마’가 다시 작동하고 있는 것 아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과거 박 대통령에 등을 돌렸던 경험이 있는 김 대표가 청와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개헌 아젠다를 띄우는 등 독자노선을 걸었던 게 결국 박 대통령의 불신으로 이어진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이 의원은 “정치적 위기에서 개방형 리더십으로 가지 않고 오히려 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 싸고도는 것은 역대 대통령들을 실패로 내몰았던 잘못된 길”이라고 우려를 표했다. 당청관계를 어떻게 끌고 가느냐가 박 대통령의 새해 국정운영은 물론 임기 내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는 분수령이 될 수 있다는 경고였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