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트하우스 돌싱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 아무개 씨는 월세 1000만 원짜리 펜트하우스에서 살며 2000억 원대 자산가 행세를 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사회적으로 완벽하게 자리 잡은 분들만 모십니다.”
지난해 서울의 모 사립대학교 대학원 최고위과정은 원생들 간의 네트워크와 사회생활에 필요한 인문학적 소양, 건강한 신체를 위한 의료서비스까지 책임진다며 여러 분야의 상류층 인사들을 모집했다. 그중 단연 눈에 띄었던 사람은 의류사업체를 운영한다는 하 아무개 씨(여·51)였다. 하 씨는 빼어난 미모를 지닌 것은 아니었지만 통 큰 씀씀이와 화려한 언변으로 원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운전기사가 딸린 벤틀리 승용차를 몰고, 도곡동에 위치한 고급 오피스텔 330㎡ 크기(100평)의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던 하 씨의 재력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 씨는 인맥관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 씨는 최고위과정에서 만난 동기를 통해 발을 넓혀가며 자신의 펜트하우스에서 수시로 파티를 열어 인맥관리를 했다. 사업가 A 씨(60)와 B 씨(52)도 하 씨가 최고위과정 동기를 통해 소개받은 사람들이었다.
사업가 A 씨와 하 씨는 사업 이야기를 하며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하 씨가 A 씨에게 “국내에 재고로 남은 옷을 대량으로 구입해 해외에 팔면 배 이상의 수익을 남길 수 있다. 그런데 사업 착수금 10억 원이 모자라 진행을 못하고 있다”며 고민을 털어놨다. 이어 하 씨는 “10억 원을 빌려주면 한 달 뒤에는 10%의 이자를 붙여 11억 원을 돌려주겠다”며 A 씨에게 넌지시 자금을 빌려줄 것을 요구했다.
A 씨는 하 씨의 제안에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다. A 씨가 보는 하 씨는 2000억 원에 달하는 자산을 가진 재력가였고, 하 씨가 외국에 팔 상품이라며 쌓아놓은 재고품만 해도 300억 원에 달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고 판단한 A 씨는 주변에서 돈을 끌어 모아 A 씨에게 10억 원을 건넸다.
그러나 원금과 이자를 돌려받기로 한 한 달 후 하 씨는 말을 바꿨다. 하 씨는 “구입한 재고품 중에 장물이 섞여있었다. 그 문제로 회사 실장이 구속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장물을 대신해 다른 물건으로 구색을 맞추려면 돈이 더 필요하다”고 다급하게 말했다. A 씨는 이번 일이 잘못되면 자신이 투자한 10억도 되찾을 수 없다는 하 씨의 꾐에 넘어가 또 다시 억대의 돈을 건넸다. 하지만 돈을 돌려주기로 한 하 씨가 말을 바꾸기도 수차례, A 씨가 하 씨에게 건넨 금액만도 32억 원을 넘어섰다. 결국 A 씨는 지난해 가을 하 씨를 고소했다.
그런데 하 씨는 A 씨가 자신을 고소한 사실을 알고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하 씨는 자신이 거주하던 펜트하우스도 이미 정리한 상태였다. 그러나 지난 12월 29일 하 씨는 경기 김포시 친척집 인근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잠복 중이던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 조사결과 하 씨의 이름은 가명이었고, 하 씨가 운영한다던 의류 사업체도 실체가 없는 유령회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A 씨 외에도 하 씨에게 5억 6000만 원을 건넨 또 다른 피해자 B 씨도 나타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혼녀 행세를 했던 하 씨에게 가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하 씨의 가족은 하 씨와 함께 펜트하우스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오피스텔 관계자 및 하 씨의 펜트하우스 파티에 초대됐던 사람들 중 누구도 하 씨의 가족을 본 사람은 없었다. 서울 수서경찰서 경제팀 관계자는 “하 씨가 (남편과) 이혼을 했는지의 여부는 개인 신상 문제라 밝힐 수 없다”면서도 “하 씨 가족이, 사람들이 방문할 때 어디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펜트하우스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 씨는 A 씨와 B 씨에게 돈을 빌리기 전에도 비슷한 수법으로 사기행각을 벌여 수배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 씨가 가족을 철저히 숨기고, 유독 오피스텔의 보안에도 예민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지난 7일 기자와 만난 도곡동 오피스텔 관계자는 “(하 씨는) 2개월 전쯤 이사를 간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다른 거주자들에 비해 유독 보안에 굉장히 철저했던 모습으로 기억한다. 소포가 도착하더라도 먼저 전화로 연락 달라거나 로비가 아닌 지하주차장 엘리베이터를 통해 이동해 누가 방문했는지도 잘 알 수 없도록 했다. (하 씨의) 운전기사만 봤을 뿐 그외 방문객은 본적 없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수도권의 유수 대학들은 수익을 위해 대학원 최고위과정을 개설, 부자들의 인맥 네트워킹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하 씨도 바로 이런 점을 노려 최고위 대학원 과정을 사기의 주요무대로 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몇 번만 출석해도 뒤풀이 등을 통해 쉽게 ‘친구’들을 사귈 수 있고 신분도 대학원의 명성 때문에 비교적 안전하게 보장되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하 씨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 중에 고위공직자와 유명 연예인이 포함돼 있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알려질 것을 두려워해 쉽게 신고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수서경찰서 관계자는 “하 씨는 A 씨와 B 씨에게 빌린 38억 원 상당의 돈으로 그 전에 빌린 돈을 돌려막기 하거나 사치품 구입과 생활비 등으로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하지만 항간에 알려진 것처럼 연예인이나 고위공직자가 연관돼 있는 사실은 지금까지 파악된 바 없다. 아직 추가 피해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여죄가 있는지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