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지난 5일 열린 2015년 경제계 신년인사회 모습. 왼쪽부터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박근혜 대통령,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사진제공=청와대
“여야 대표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기업들과 관련된 부문만을 비교해 보면 한 나라에서 두 개 정부를 지향하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첨예한 시각차가 드러난다.”
지난 15일 재계 관계자가 한 말이다. 재계의 긴장감을 높이고 있는 현안은 우선 박 대통령이 강조한 노동시장 구조개혁이다. 박 대통령은 지난 13일 고용노동부의 업무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노동시장 구조개혁에 대한 노·사·정 대타협을 3월까지 주문했다. 그러자 문희상 비대위원장은 14일 “전 국민을 비정규직화 하겠다는 계획”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하며 “노사정위원회가 두 달 안에 이를 합의할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조개혁은 고통분담을 기업이 아닌 국민에게 넘기겠다는 책임 전가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정치권의 공방이 이어지면서 노사정위원회 내부의 흐름도 난기류를 타고 있다. 노사정 간 구조개혁 안건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 임금·근로시간·정년, 세 가지 노동 현안, 사회안전망 정비 등이다. 노동계 대표로 참여하고 있는 한국노총은 정부가 비정규직 처우 개선이라는 이유로 파견 업종과 기간제 기간을 오히려 늘린다고 반발하고 있다.
반면 재계를 대변하는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정부의 대책이 기업의 인력 운용에 대한 부담을 높이고, 비정규직 고용에 대한 규제만 강화하는 안에 불과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노사 모두 정부안에 불만인 데다 논의 과정도 지지부진해지면서 노·사·정 대타협 실현이 불투명하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들로선 노사정 대타협의 흐름에 따라 올해 노사갈등의 수위를 판단할 수 있다”면서 “정부가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앞세우다 개별 사업장의 노사 이슈를 정치 이슈화하면서 노사갈등만 부추기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경기부양을 위한 재정확대 방침에 대해서도 청와대와 여야가 각기 엇갈린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금리 인하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금리 인하는 거시정책을 담당하는 기관들과 잘 협의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적기에 대응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답했다. 곧바로 증권가와 기업들은 금리인하를 기정사실화 했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박 대통령이 원론적 발언을 한 것이라며 진화에 나서자 재계에선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결국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15일 시장의 기대와 달리 기준금리를 연 2.0%로 동결했다. 국제유가 하락에 따른 경기 회복 가능성과 지난해 두 차례의 금리 인하 효과를 좀 더 지켜보겠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규제 완화로 급격히 늘어난 가계대출도 금리 동결의 한 배경이다. 박 대통령이나 기획재정부는 재정·통화정책을 통한 경기부양을 지속할 태세다.
그러나 정치권은 경기부양보다 가계부채의 위험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김무성 대표의 신년 기자회견은 실상 국가부채와 가계부채 악화에 대한 우려가 제1 주제였다. 그는 “일본이 재정관리 소홀로 ‘잃어버린 20년’의 길을 우리나라도 걷고 있다. 일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며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일본의 63.4%보다 훨씬 높은 국내총생산(GDP)의 92.4%, 1060조 원으로 나날이 크게 늘어나는 더 나쁜 상황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정 확대를 통한 올해 경제살리기에 나선다는 박 대통령과는 사뭇 다른 시선이다.
문 위원장 역시 “가계대출 증가속도는 1년 만에 두 배로 빨라지고 있다”며 “노동시장 구조개혁으로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가계소득이 불안해지면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정부를 겨냥했다. 장기적으로 경제의 체질개선에 방점을 찍은 정부와 당면한 서민경제를 살펴야 하는 정당의 최우선 목표가 극명하게 갈리는 대목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시중에 돈이 풀리는 것은 내수활성화의 측면에서 기업들로서도 반길 만한 것이지만, 자칫 올해처럼 세수부족이 계속되는 상황이라면 재정을 메우기 위해 국회에선 기업들에 대한 비과세를 줄이거나 법인세를 늘리는 쪽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마냥 정부 쪽의 경제살리기 드라이브에 맞장구를 칠 수만은 없는 처지라는 얘기다. 기업들은 새정치연합이 “이제까지처럼 재벌기업 중심의 편향적인 경제정책에 치우쳐서는 안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데도 주목하고 있다.
각종 위법행위로 수감생활 중인 기업인들에 대한 가석방에 대해 여권이 말을 바꾼 것도 기업들 사이에선 기류가 바뀐 게 아닌지 의구심을 키우고 있다. 김무성 대표는 14일 기자회견에서 “가석방은 형기의 80%를 채워야 한다. 기업인의 가석방은 현재로서는 어려운 이야기”라고 했다.
이에 앞서 2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부 신년인사회에서 그는 “기업인들이 사기를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정치권에서 협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재벌 총수들에 대한 설 특사를 기대하게 했었다. 김 대표의 ‘바뀐’ 말대로라면 지난 2013년 1월 구속수감된 최태원 SK 회장은 징역 4년형의 80%를 채운 내년 봄에나 가석방이 이뤄질 수 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