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도와 방화 혐의로 쫓기던 두 모자가 불심검문하던 경찰관을 살해해 붙잡혔다. 이들은 주민등록 없이 살아오다 생계를 위해 빈집털이에 나선 것으로 드러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제공=매일신문 | ||
그간 이들 모자는 절도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으되 사람을 상하게 한 적은 전혀 없었다. 그런 이들이 경찰관에게 흉기를 휘두를 만큼 ‘결사적’으로 불심검문을 피하려 했던 까닭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난 6일 검거된 이후 이들은 일련의 절도와 방화 사건 수사를 맡았던 대구경찰청 광역수사대로 넘겨졌다. 그런데 이들 모자의 기본적 신상을 조사하던 경찰은 뜻밖의 사실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피의자 김씨와 아들 박씨는 주민등록이 없는 ‘무적자’였던 것. 박씨는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아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군대도 갔다오지 않았다. 법적으론 박씨의 존재가 없는 상태에서 24년간을 살아왔던 것이다.
범행에 가담하지 않은 박씨의 두 동생(17, 18세) 또한 무적자로 살고 있었다. 주민등록이 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김씨와 박씨는 제대로 취직을 할 수도 없었고 임시직으로도 돈을 벌 수도 없었다. 결국 무적자인 이들에게 남은 생존수단은 범죄밖에 없었던 셈이다. 왜 이들은 무적자로 살아야 했던 것일까.
박씨 삼형제는 최근까지도 아버지와 함께 경북 경산시의 한 원룸촌에서 10평 남짓한 집에서 살았다. 이들 형제의 아버지 박아무개씨(69)는 공교롭게도 전직 경찰관이었다.
아버지 박씨는 40여년 전 경찰에 몸담아 경북경찰청과 대구시내 경찰서 등지에서 근무하다 43세에 경찰을 그만둔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가 당시 40세이던 이번 사건의 김씨를 만난 것은 바로 이 즈음이었다. 곤란한 일을 겪고 있던 김씨에게 박씨가 도움을 주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박씨는 이미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둔 상태였다. 그는 부인과 잦은 불화를 일으키던 차에 김씨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곧 둘 사이에 첫 아이를 낳았으나 본처는 이 아이를 박씨의 호적에 올리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직장으로 찾아와 소란을 피우기까지 해 박씨는 결국 경찰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 박씨는 김씨와 함께 대구를 떠나 새 살림을 시작했다.
본처에게 집과 재산을 물려주고 빈털터리가 된 박씨는 전국의 공사장을 따라다니며 막노동을 했다. 공사장 현장을 따라다니다보니 집을 구하지도 못하고 여관에서 장기투숙을 해야 했다. 이동이 잦아 전출입신고는 아예 생각하지도 못했고 아이의 출생신고도 미루고 있었다. 본처의 반대가 있었지만 박씨가 호주이기 때문에 박씨가 얼마든지 출생신고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도록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고 결국 시기를 놓쳐 버렸다. 그 사이 연년생인 두 아들을 더 낳아 정신이 없었고, 생활이 어려워 밥벌이에만 신경쓰다가 결국 세 아들 모두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게 됐다.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나홀로 자라다보니 아이들은 친구가 거의 없었다. 또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키우는 것을 주위에서 이상하게 여길까봐 김씨는 아이들이 항상 집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했다. 때문에 아들 셋과 어머니의 유대관계는 매우 끈끈했다.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았던 아들 셋은 어머니를 신적인 존재로 여길 정도로 존경하고 따랐다. 비교적 똑똑했던 세 아들은 집에서 독학으로 글을 깨우치고 컴퓨터와 영어, 일어를 공부했다.
이들은 집안에 일반 전화를 놓거나 휴대전화를 지니지 않았다. 따로 전화할 대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웃들의 말에 따르면 김씨의 아들들은 항상 모자를 쓰고 다녔고 말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세 아들이 자라나면서 생활고 또한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나이가 들수록 박씨의 돈벌이가 시원치 않았던 것. ‘부인’ 김씨가 일을 하려고 나섰지만 무적자였기 때문에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찰은 생활이 어려웠던 이 즈음부터 김씨가 이웃집의 쌀이나 고추장, 된장 등을 훔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큰아들 또한 일을 하려고 해도 신분이 불확실해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상태였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주민등록증을 제시하지 못해 임금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기도 했다.
김씨와 큰아들은 궁리 끝에 노인들을 상대로 소액의 돈을 뜯어내는 사기극을 벌였다. 이사하는 노인들에게 접근해 ‘이곳에 이사올 사람인데, 사고가 나 합의금이 필요하다’며 3만∼1백만원씩을 등쳤던 것. 이들 모자는 지난 2003년부터 올해 7월까지 13건의 사기를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노인들을 상대로 하는 사기는 성공률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들이 이내 눈길을 돌린 곳은 바로 빈집. 어머니와 큰아들은 역할을 나눠 빈집을 털기 시작했다. 빈집털이 또한 노인들이 사는 허름한 집을 대상으로 했다.
처음에 이들은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범행 후 현장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TV 뉴스에서 피해 노인들의 불쌍한 모습을 지켜본 뒤로는 불을 지르는 대신 지문과 족적을 지우기 위해 식용유나 간장을 뿌렸다. 예전 범행 때 식용유에 미끄러져 넘어진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족적이 없어지는 것에 착안한 것이었다.
이들 모자는 대구시내에서 달서구, 중구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대상으로 빈집털이에 나섰다. 이들은 경북 경산 지역까지 넘나들며 절도 행각을 벌이다 결국 ‘운명의 불심검문’ 끝에 붙잡히고 말았다. 경찰은 이들이 지난 7월11일부터 10월5일까지 현금 3백만원과 3천만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혐의를 밝혀냈다. 이들 모자는 돈을 모아 포장마차를 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한다.
한편 아버지 박씨는 두 달 전부터 가족과 떨어져 대구시내 한 아파트의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월급 70만원 중 자신의 숙소 월세와 생활비 20만원을 제외한 50만원을 가족들에게 보내주었다고 한다. 김씨와 세 아들은 원룸 월세 35만원을 제외한 15만원으로 네 식구가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의 인생만 불쌍하게 됐다. 부모만 잘 만났으면 이렇게 범죄의 길로 빠져들지도 않았을 텐데….”
주변에서는 이들 모자의 범죄에 분노하면서도 안타까운 가족사에 대해서는 대부분 혀를 차고 있다. 사건을 담당한 형사는 “경찰관을 죽이지만 않았어도 선처를 바랄 수 있겠지만, 지금은 특수공무방해치사 혐의로 무기형까지 가능하다”고 밝혔다.
오랜 세월 무적자로 살아온 어머니 김씨와 세 아들은 공교롭게도 범죄로 인해 난생 처음 주민등록증을 갖게 될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경산시와 협의해 이들에게 주민등록을 부여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