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못한 ‘적과의 동거’
이번 사건은 피해자인 박 씨가 이 같은 내용을 경찰에 고발하면서 3년 만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박 씨의 고발 내용을 접한 경찰도 기가 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다. 반면 구속된 유 씨는 “방화는 사고로 인한 것이지 살해 의도로 일으킨 것이 아니다”라며 여전히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어 향후 논란이 예상된다.
현재 경찰은 박 씨의 일관된 진술과 유 씨의 일부 범행 사실 확인 및 주변 관계자들을 상대로 펼친 수사 등으로 이번 사건의 전말에 대해 확신에 찬 자신감을 표하고 있다.
박 씨가 동거남 유 씨와 악연을 맺게 된 것은 몇 년 전 유 씨가 사장으로 있던 한 결혼정보회사에 입사하면서부터다.
당시 두 사람은 사장과 직원의 관계였지만 직원이 별로 없는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서로 편하게 지냈다. 두 사람은 둘만의 시간을 갖는 횟수가 늘어났고 급기야 연인으로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동거생활로 이어졌다.
하지만 달콤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동거를 시작하면서 유 씨는 처음 한두 번 박 씨에게 손을 대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사무실에서도 사소한 일로 꼬투리를 잡아 상습적인 폭행을 일삼았다.
유 씨의 이 같은 상습폭행을 참다못한 박 씨는 헤어질 결심을 했다. 끔찍한 비극은 그렇게 찾아왔다.
2003년 7월초 박 씨는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그때서야 유 씨는 미안하다며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해 보았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화가 난 유 씨는 그 분노가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했다. 자신이 무시당하고 또 배신당했다고 판단한 그는 박 씨를 끔찍하게 살해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분노를 해소하려 한 것.
며칠 후인 어느 날 저녁 6시경 유 씨는 박 씨를 납치하다시피 차에 태우고는 한적한 곳으로 내달렸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한참을 달리던 차는 경기 용인시 고림동의 외딴 갓길에 멈춰 섰다.
이후 유 씨의 행동은 우발적이라고 보기 힘들 만큼 일사분란했다. 그는 미리 준비한 휘발유를 자신의 자동차 실내와 박 씨의 몸에 마구 뿌렸다. 그때서야 유 씨의 의도를 알아차린 박 씨는 살려달라고 애걸하며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유 씨는 그런 박 씨를 가만 두지 않았다. 유 씨는 차문을 열고 나오려는 박 씨를 발로 걷어차며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재빨리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 불을 차 안으로 던졌다. 이어 펑하는 소리와 함께 자동차 실내는 폭발하듯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동시에 귀를 찢는 박 씨의 비명이 들려왔다. 휘발유를 뒤집어쓰고 화염에 휩싸인 박 씨는 차 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 쳤다.
이때 하늘이 도왔는지 유 씨가 차에 라이터를 던지면서 팔에 불이 옮겨 붙어 허둥거리는 사이 박 씨는 차에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유 씨는 재빨리 자신의 몸에 붙은 불을 끄고 박 씨 쪽을 살폈다.
유 씨는 화염 속에서 박 씨가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추가로 손을 쓰려 했으나 자동차의 불길을 보고 멈춰선 다른 차량들 때문에 범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불속을 뚫고 빠져나온 박 씨는 다른 운전자들의 도움과 이들의 신고로 때마침 도착한 119 구조대 덕분에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다.
박 씨는 이 사건으로 전신의 오른쪽에 3도 화상을 입었으며, 이로 인해 오른팔에 근육 손상을 입어 장애4급 진단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살인 미수에 그친 유 씨는 전전긍긍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새로운 음모를 생각해냈다. 병원에 실려 간 박 씨가 대수술을 받고 혼수상태로 누워있는 틈을 타서 유 씨는 박 씨의 부모를 찾아가 “담배를 피우려다 실수로 라이터를 떨어뜨려 불이 났다”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는 “박 씨가 저렇게 된 것은 내 책임이 크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평생 책임지겠다”며 “그런데 사실 지금 회사가 좀 어려워 앞으로 박 씨 치료비 대는 것도 걱정이다. 그러니 회사 운영비를 좀 도와 달라”고 손을 벌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박 씨의 부모는 유 씨를 고마운 미래의 사위라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회사 운영자금 5천만 원을 건넸다.
이렇게 돈을 뜯어낸 유 씨의 파렴치한 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유 씨는 병원에 입원해 있던 박 씨가 정신을 차리자 준비해뒀던 연극을 시작했다. 그는 박 씨에게 “당신을 너무 사랑한 탓에 일어난 일이다. 앞으로 잘하고 살겠다. 내가 당시 헤어지자는 말에 정신이 이상해져서 실성을 한 것 같다. 용서해 달라”며 읍소 작전을 펼쳤고 이 말에 박 씨는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경찰은 “박 씨는 이러는 유 씨를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자신이 나이가 많은 데다 화상을 입어 온몸이 흉하게 변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유 씨의 말을 따랐다고 진술했다”고 전했다.
이렇게 박 씨를 구슬리는 데 성공한 유 씨는 사건경위에 대해 박 씨와 입을 맞춘 후 보험사에 자신의 차량이 단순화재로 전소됐고 이 사고로 동승자가 크게 다쳤다고 허위신고했다. 이에 보험사는 박 씨 앞으로 3억 2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지급했으나 이 돈은 고스란히 유 씨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경찰 관계자는 거금의 보험금이 순순히 지급된 데 대해 “당시 보험조사관이 꼼꼼히 조사했으나 명백한 방화 증거를 찾지 못했고 당사자인 유 씨와 최대 피해자인 박 씨의 진술이 일관돼 보험금이 지급됐다”고 설명했다.
경찰에 따르면 유 씨는 고급 외제차량을 구입해 타고 다녔고 결혼정보회사를 확장시키는 외에 레스토랑 등 4개 업체를 운영하며 박 씨의 부모로부터 뜯어낸 돈과 보험금 등 총 4억여 원에 이르는 거액을 대부분 탕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뿐만 아니라 유 씨는 화상으로 몸이 불편한 박 씨와의 결혼을 미룬 채 계속 동거상태로 있으면서 상습적으로 폭력을 휘둘러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박 씨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등 힘겨운 나날을 보내다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해 경찰에 유 씨를 고발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편 유 씨는 경찰 조사에서 박 씨의 진술에 따른 살인 미수 등의 범행 사실을 대부분 부인하며 여전히 ‘자신은 잘못이 없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경찰 측은 “증거가 많이 확보돼 있다”면서도 조심스런 입장을 보이고 있다.
윤지환 프리랜서 tangohun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