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된 건 내 덕 잘못된 건 남 탓’
이명박 전 대통령 회고록에는 4대강 사업에 대한 애착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2011년 10월 22일 경기도 여주군 이포보에서 열린 4대강 새물맞이 기념행사. 사진제공=청와대
# MB, 새로 찾은 직업 ‘저격수?’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당내 경선을 치렀다. 나는 그 과정에서 원칙을 일관되게 지키고자 노력했다. 대선을 앞두고 일본과 유럽을 다니며 운하와 과학도시를 방문한 것도 정책으로 승부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서 시종일관 ‘정책’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회고록 집필을 총괄 기획한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지난 1월 30일 기자간담회에서 “정치 위주가 아닌 정책 위주로 기술된 최초의 회고록”이라고 자평했다.
‘경제 전문가’로서 활동 사항도 비교적 상세히 기술했다.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최대 치적으로 2008년 갑자기 닥친 글로벌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것을 꼽았다. 특히 정권 내내 고환율 정책 기조를 유지한 것과 관련해 “대기업에만 좋을 뿐, 서민경제를 고물가에 시달리게 한다”며 당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경질론을 주장했던 야권의 목소리를 다음과 같이 일축했다.
“야권의 요구대로 취임 초부터 물가 안정을 위해 저환율정책을 썼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되고 외환보유고는 소진된 상태에서 금융위기를 맞았을 것이니, 우리 국민은 1997년에 이어 또 다시 외환위기의 고통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회고록에는 한·미 FTA 협상이 난항을 겪던 2010년 11월경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금 미국 언론을 봤느냐. 이 대통령은 단임제니까 괜찮을지 모르지만 난 그렇지 않다”고 불만을 표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부담스러운 폭로로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김두우 전 수석은 “외국 정상들의 회고록을 보면 더욱 상세한 이야기도 쓴다. 우리는 실제 많은 부분을 덜어냈다”고 반박했다.
다른 국가 정상들의 에피소드를 솔직하게 공개한 그는 정작 자신의 치부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2009년 12월경 금융위기를 헤쳐 나가는 도중 폐에 심각한 병이 있음을 알게 됐다고 최초로 밝힌 정도다. 주치의와 아내 이외에는 자신의 몸 상태를 일체 알리지 않았고, 안색이 환자처럼 보일까 아내가 쓰던 화장품으로 메이크업을 했다고 말했지만, 어떤 병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금융위기에서 벗어날 즈음 내 병도 완치됐다”고만 했다. 김두우 전 수석은 “이 전 대통령이 향후 해외 활동도 예정돼 있고, 우리나라 대통령의 병을 정확히 공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 ‘녹조라떼’는 괴담에 불과?
“4대강 살리기 사업이 대운하를 건설하기 위한 위장 사업이라는 비난도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퇴임 후 감사원의 4대강 살리기 사업 감사결과에서까지 나왔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은 수많은 하천 관련 전문가들이 공을 들여 기획한 것이다. 감사원의 비전문가들이 단기간에 판단해 결론을 내릴 수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MB 정부 5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4대강 사업에 대한 이 전 대통령의 생각은 확고했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한다는 것이다. 4대강 사업은 자신의 대선 공약이었던 대운하 건설과 별개의 사안이었음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퇴임 이후 지속적으로 제기된 ‘낙동강 녹조라떼’, ‘큰빗이끼벌레 서식’과 같은 환경 문제에 관한 지적에는 “광우병 사태 때와 같은 괴담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
“대가뭄이 닥치자 4대강 반대자들은 ‘녹조’ 문제를 들고 나왔다. 과거 가뭄이 오지 않아도 갈수기에는 4대강이 녹조로 뒤덮였던 사실을 외면한 주장이다. 한강도 잠실과 김포 신곡에 수중보가 있어 항상 맑은 물이 풍부하게 넘쳐흐른다는 사실은 서울 시민 중에도 아는 이가 많지 않을 것이다.”
4대강 사업 관련해 회고록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4대강 사업으로 금융위기의 해법을 찾았다”는 대목이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은 단일 공사로는 건국 이래 최대의 역사라 할 만큼 공사 규모가 컸다. 따라서 오랜 시간 검토와 계획이 필요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로 경제 살리기가 시급한 상황에서 계획을 세우느라 시간을 허비할 여력이 우리에겐 없었다.”
4대강 사업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온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우리나라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제일 먼저 빠져 나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허풍이다. 그 당시 우리 경제의 성과는 잘해야 평타 수준에 불과했을 뿐”이라며 “한반도 대운하 사업이 좌절되자 4대강 사업으로 갈아탄 것은 삼척동자도 잘 아는 사실 아닌가. 그렇다면 대선 때 한반도 대운하를 떠들어대고 다닐 때 이미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견하고 있었다는 말인데, 대단한 경제학자 납시었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2012년 2월 16일 서울 동작구 한국광물자원공사에서 열린 ‘해외자원개발 확대를 위한 전략회의’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이 희토류 광석을 살펴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한승수, 니가 가라 하와이?
“해외 자원개발의 총괄 지휘는 국무총리실에서 맡았다. 우리 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한승수 총리를 임명한 것은 그 같은 이유였다. 한 총리는 외교 분야에 경륜이 많고 특히 자원외교 부문에 관심이 많았다. 국내외의 복잡한 현안에 대해서는 내가 담당하고, 해외 자원외교 부문을 한 총리가 힘을 쏟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이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자원외교의 ‘몸통’으로 한승수 전 국무총리를 언급했다. 정치권에서 주장하는 자원외교 몸통 5인방(이명박 전 대통령,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2차관, 윤상직 현 상업통상자원부 장관, 최경환 현 경제부총리)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이번에 발간된 회고록 800쪽 가운데 자원외교 관련 서술은 5쪽 남짓에 불과하다. 당연히 앞서 5인방 관련 언급이나 에피소드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정권 5년 내내 ‘자원외교 특사’로 불렸던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은 일본으로부터 조선왕조 의궤를 돌려받은 외교 활동 사례에서 딱 한번 등장한다. MB 정부 ‘왕차관’으로 불렸던 박영준 전 차관의 이름은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는다. 한승수 전 총리는 ‘총괄기획자’로 단정한 것과 대조적인 양상이다.
정치권에서는 회고록 출간 자체가 자원외교 관련 국정조사를 견제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 전 대통령은 2월부터 시작되는 자원외교 국정조사에 관해 “해외 자원개발 과정에서 비리가 있다면 철저히 조사해 관리자를 엄벌하면 된다. 침소봉대해 자원외교나 해외 자원개발을 죄악시하거나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과장된 정치적 공세는 공직자들이 자원 전쟁에서 손을 놓고 복지부동하게 만들 것”이라고 비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으로서는 약이 오른다. 자원외교 국조특위에 속한 한 야당 의원은 “회고록 발간일(2월 2일)은 국정조사를 위한 증인 채택 협상이 시작되는 날이다. 하필 이날 회고록 발간이라니 무슨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여당 간사인 권성동 의원은 1월 내내 해외를 돌아다녔다. 기관보고가 시작되기도 전에 여당에서 분위기를 흐리고, 야당에서조차 ‘이건 정권 바뀌어야 진짜로 털 수 있다’는 말이 계속 나온다. 정권이 바뀔지 안 바뀔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이런 분위기이면 어쩌자는 것이냐”며 울분을 토로했다.
여권 일각에서도 이 전 대통령 측 움직임에 불만이 나오는 모양새다. 전 정권의 실책에 책임이 있는 비박계가 친박계에 연대책임을 지우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왜 뜬금없이 한승수라는 이름이 나오나 생각해 보면, 한 전 총리는 이명박 정부 때 총리이기 이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처조카 사위이지 않나. 또 자원외교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5인방 가운데 두 사람이 현 정부 핵심 요직에 있다. 회고록을 통해 경고성 메시지를 던지는 것 아니겠느냐”고 전했다.
# 북한 ‘갑질’ 고치려 했다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대통령 각하를 진심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북한 관련 언급은 이 전 대통령 회고록에서 가장 수위가 높은 대목이다.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죽기 전까지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우리 정부에 끈질기게 매달렸다는 것이 골자다. 책에 거론된 남북 간 물밑접촉 시도만 다섯 차례. 이 중 휘발성이 큰 사안은 북한이 정상회담 조건으로 각종 물자와 거액을 요구해 거절했다는 두 번째 접촉 이야기다.
“2009년 10월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싱가포르에서 우리 측 인사와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통보해왔다. 북한 핵 문제, 국군포로와 납북자 송환 등을 주요 의제에 포함시키되, 정상회담을 위한 대가성 지원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침으로 확정했다.”
“2009년 11월 7일, 개성에서 우리 측 통일부와 북한 측 통일전선부의 실무 접촉이 있었다. 이날 회담에서 북한은 임태희 장관이 싱가포르에서 서명한 내용이라며 세 장짜리 합의서라는 것을 들고 나왔다.”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으로 우리 측이 옥수수 10만t, 쌀 40만t, 비료 30만t의 식량을 비롯하여 아스팔트 건설용 피치 1억 달러어치를 제공하고 북측의 국가개발은행 설립 자본금 100억 달러를 우리 정부가 제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듬해인 2010년 6월 천안함 사고 직후 북측 요구로 국가정보원 고위급 인사(김숙 전 국정원 제1차장)와 북측 인사의 남북 비밀 교차방문이 이뤄졌다는 것도 이전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이 전 대통령은 류경 북한 보위부 부부장(추정)이 공개 처형된 이유로 2010년 10월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남한을 방문했지만 협상에 실패한 것을 꼽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의 허심탄회한 고백은 당장 북한의 반발을 사 남북관계가 더욱 악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된다.
현재 북한과의 화해를 모색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로서는 당황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회고록이 언론에 공개된 다음날 청와대는 “남북정상회담 이야기 하면서 전제조건으로 돈거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놀라운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면서도 “외교 문제가 민감한데 세세하게 밝히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될 것인지 우려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번 이명박 전 대통령 회고록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반응은 대체로 냉담하다. 자화자찬만 있고, 자기반성은 없다는 것이다. 특히 2007년 대선을 뜨겁게 달군 BBK 사건이나 민간인 사찰 관련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점, 출간 시점이 너무 빠른 것 아니냐는 비판이 팽배하다.
회고록 총괄 진행을 맡은 김두우 전 수석은 “이 전 대통령 퇴임 직후 미국에서 회고록 집필 제의가 있었다. 작업을 진행하다 보니 우리나라 대통령인데, 해외보다 국내에서 먼저 내는 것이 좋겠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원래 출간 목표가 2014년 12월이나 이듬해 1월이었으니 예정대로 진행된 것”이라면서 “정치 관련 이야기를 추후 집필할 것인지 내부에서 의견이 나오고 있다”라며 2탄 출간까지 예고했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