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만 빼고 모든 게 사기야? 그런거야?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황당한 설정이라고? 아니다. 최근 서울가정법원이 다룬 혼인무효소송 속 ‘실제 상황’이다.
중견 의류업체 간부로 근무하고 있는 윤현수 씨(가명·43)는 지난 2005년 3월 자신이 ‘사기결혼’을 당했다며 법원에 혼인무효 및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아울러 아내와 처가 가족들을 사기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7년 동안 함께 생활해온 아내 권미자 씨(가명·52)가 이름과 나이는 물론 학력과 경력, 심지어 결혼과 출산 전력까지 속이고 자신과 결혼했으며 권 씨의 가족들이 이를 방조했다는 것이다.
당시 윤 씨는 소장에서 “실제로는 ‘55년생 이혼녀’인 권미자가 신원을 속이고 친동생인 ‘62년생 노처녀 권명자(가명)’로 행세, 사기결혼을 감행했다”고 주장했다. 소장에 따르면 대졸 학력에 교사 경력을 가진 미혼의 62년생 ‘권명자’로 알고 결혼을 했던 아내가 알고보니 두 번의 이혼에 아이도 3명이나 있는 아홉 살 연상의 ‘권미자’였다는 것.
윤 씨는 “그간 아내 권 씨가 동생 권명자 행세를 해왔으나 자신은 그 사실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며 이런 점을 뒷받침할 여러 가지 정황 및 증거를 법원에 제출했다. 특히 윤 씨는 ‘사기 결혼’이 유명한 대학교수인 아내 권 씨의 오빠와 그의 처까지 가담한 ‘가족사기극’이라 주장하고 나서 파문은 더 커졌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아내 권 씨 측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권 씨 측은 “남편 윤 씨가 이미 아내의 ‘과거’를 알고 있었음에도 이혼 명분을 찾기 위해 뒤늦게 이를 문제 삼고 있다”며 오히려 파경의 책임을 윤 씨 탓으로 돌려왔다.
1년 5개월간이나 법정 공방이 이어진 이 희귀한 사건에 대해 지난 8월 31일 서울가정법원(가사4부)은 “권 씨는 윤 씨와 이혼하고 위자료 3000만 원을 지급하라”며 원고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권 씨 측이 이에 불복하고 항소할 가능성도 높아 ‘사기 결혼’을 둘러싸고 진실게임 2라운드가 펼쳐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대체 어떻게 이 같은 ‘황당한 사건’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판결 내용과 양측의 주장 등을 참고해 사기결혼 송사의 전말을 좇아가봤다.
이들 부부의 첫만남은 1996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회사 거래처 직원으로 안면을 튼 두 사람은 1년간 교제 끝에 1997년 봄 서울의 한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결혼 전 아내 권미자 씨는 윤 씨에게 자신을 ‘명문 K대를 나와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이직을 하여 바쁘게 살다보니 결혼시기를 놓친 노처녀’라며 ‘1962년생 권명자’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권 씨의 회사 명함에도 ‘권명자’라고 새겨져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는 것.
미혼이었던 윤 씨가 당시 결혼을 결심하게 된 데는 권 씨가 자신보다 두 살이 많긴 하지만 조건이나 품행이 배우자감으로 괜찮은 데다 권 씨의 오빠부부가 유명 교수라는 점에서 신뢰할 수 있는 집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결혼 후 윤 씨는 아내 권 씨와 처가 식구들의 행동거지에서 이상한 낌새를 느끼게 된다. 우선 아내 권 씨의 학창시절 앨범이나 일기장, 과거 사진 등이 전무했는데 이에 대해 권 씨는 모든 과거 자료가 화재로 소멸됐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또 권 씨는 처가 식구들을 만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사망한 장인의 제사에 참석하는 것까지 막았다고 한다.
어쩌다가 찾아가도 처가 식구들은 어색해하며 윤 씨를 피하기에 급급했다는 것. 또 권 씨가 혼인신고도 차일피일 미루다 결혼 4년이 된 2001년에서야 했는가 하면 아이를 낳는 것에도 관심이 없더라는 것이다.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윤 씨가 정작 참을 수 없었던 것은 혼인생활을 유지할 의사가 없어 보이는 아내 권 씨의 행동이었다고 한다. 권 씨가 바쁜 사업을 핑계로 밤늦게 귀가하고 수시로 외박을 했으며 잠자리까지 거부하는가 하면 사업자금 명목으로 5억 원 상당을 편취,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윤 씨의 주장이었다.
결국 2004년 12월 이혼을 청구하기 위해 호적등본을 발급받은 윤 씨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자신의 처로 등재되어 있는 사람은 ‘62년생 권명자’가 아닌 ‘55년생 권미자’였던 것. 이상한 생각에 권미자 씨의 전 호적을 확인한 결과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권미자는 이미 두 차례나 이혼을 하고 전 남편들과의 사이에 3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권명자는 권미자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윤 씨는 혼인신고만 권미자로 잘못 기재되어 있을 뿐 아내가 실제론 ‘62년생 권명자’인 걸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두 번의 이혼경력에 아이가 셋이나 있는 아홉 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의 아내로 여겼던 권명자 씨의 호적을 조사한 결과 윤 씨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된다. 권명자 씨가 자신과 결혼할 당시 자식이 두 명이나 있는 유부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에 윤 씨는 권명자 씨가 유부녀임을 감추고 자신과 결혼, 언니인 권미자 명의로 혼인신고를 해놓은 것으로 오해하고 2005년 2월 서울지방검찰청에 사기 등의 혐의로 권 씨 등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형사절차가 진행되는 사이에 엄청난 반전이 이뤄지게 된다. 윤 씨와 결혼한 사람은 ‘62년생 권명자’가 아니라 호적에 기재된 대로 ‘55년생 권미자’임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고소를 한 후 경찰의 도움을 받아 주민등록증 발급 사진을 열람한 결과 윤 씨의 아내가 ‘권미자’로 확인된 것.
이때 비로소 윤 씨는 자신이 실제로 결혼한 사람은 무려 아홉 살이나 연상인 이혼녀 권미자였고, 그동안 권미자 가 동생인 권명자의 존재를 숨기고 대신 그 행세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한다. 윤 씨는 극심한 혼란과 충격에 휩싸였고 이렇게 되자 형사소송도 처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된다.
애초에 윤 씨는 유부녀인 권명자 씨가 언니인 권미자 명의로 혼인신고를 해놓고 이중결혼 생활을 했다는 전제로 고소를 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자신이 결혼한 사람은 호적에 기재된 대로 권미자 씨가 맞으니 권 씨가 나이와 학력, 경력, 이혼 및 출산 전력 등을 속여왔다는 내용으로 바뀐 것이다. 윤 씨가 확인한 결과 아내 권 씨의 최종학력은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직업학교를 수료한 까닭에 사실상 초졸에 해당됐으며,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것도 모두 거짓이었다고 한다.
그간 재판의 최대 쟁점은 과연 이 같은 아내 권미자 씨의 전력 및 인적사항 등에 대해 윤 씨가 이전부터 알고 있었는지 여부. 또 알게 됐다면 그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점이었다.
윤 씨는 이 모든 것들이 아내 권 씨는 물론 권 씨 가족들까지 계획적으로 담합하여 자신을 기망한 ‘가족 사기극’이라고 주장해왔다. 결혼 전에는 물론이고 상견례나 결혼식에서도 권 씨가 동생 권명자 행세를 했음에도 처가 식구들 중 그 누구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으며 끝까지 권 씨의 신분 사칭에 동조했다는 것이 윤 씨의 주장이다.
특히 윤 씨는 유명 대학교수로 지명도 높은 권 씨의 오빠와 역시 교단에 서는 그의 처까지 자신에게 진실을 숨겨왔다며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권 씨의 아버지가 사망했기 때문에 대학교수인 권 씨의 오빠가 실질적으로 권 씨의 결혼을 주도했으며 결혼식날 신부를 윤 씨에게 인도한 것도 이 오빠라는 것.
‘일만 하느라 혼기를 놓쳐서 결혼을 못할 줄 알았는데 좋은 사람 만나서 고맙다’고 처가 식구들이 얘기하는 데다 청첩장과 성혼선언문 등 혼인 거행에 필요한 모든 자료들에도 신부의 이름이 ‘권명자’로 돼 있어 당시 윤 씨는 자신이 결혼하는 여성이 당연히 ‘62년생 노처녀 권명자’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윤 씨 측이 법원에 증거로 제출했던 청첩장과 성혼선언문, 결혼식 당일 사진 등에는 아내의 이름이 권미자가 아닌 권명자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내 권 씨측의 얘기는 이와 사뭇 다르다. 권 씨 측은 아내 권 씨가 결혼 전에 자신의 실제 나이와 이혼 및 출산 전력, 학력, 사회경력 등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따라서 윤 씨가 이 모든 사항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내 권 씨는 재판과정에서 “1996년 5월에 윤 씨로부터 프러포즈를 받게 되었는데 얼마 뒤 ‘나는 결혼할 수 없다. 이혼한 경력도 있고, 과거도 있으며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애도 있다’고 하니 윤 씨는 영어로 ‘셧업’이라고 하면서 그만하라고 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윤 씨가 더 이상 과거나 전력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 씨가 당연히 과거나 전력, 인적사항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신원을 속인 것이 결코 아니며 온 가족이 공모한 ‘가족 사기극’이라는 윤 씨의 주장은 터무니없다는 것.
오히려 권 씨 측은 “윤 씨가 아내 권 씨의 과거사를 뒤늦게 들추는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며 “이들 부부의 혼인이 파탄에 이르게 된 것은 윤 씨의 사치 등으로 인한 것”이라고 반박해왔다.
하지만 이 같은 권 씨 측의 반론은 또 다른 논란을 불렀다. 권 씨 측의 주장대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했고 윤 씨 역시 아내 권 씨의 실체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왜 굳이 결혼식 때 ‘권명자’라는 이름을 사용해야 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결혼식 사진 등에는 윤 씨가 고소한 권 씨의 오빠와 그의 처, 어머니, 여동생 권명자 씨 등이 모두 참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엄연히 권명자 씨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권미자 씨의 결혼식에 권명자의 이름이 사용됐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반면 윤 씨 측의 주장대로 권 씨의 가족들이 입을 맞춰 감행한 사기결혼이라면 주변 친척과 지인들까지 모두 참석한 자리에서 어떻게 권미자 씨가 권명자 씨 행세를 하며 이런 엄청난 ‘사기극’을 성공시킬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 또한 권 씨가 어떻게 7년간이나 윤 씨를 속여올 수 있었는지도 석연치 않았다.
이처럼 양측의 주장과 의문이 뒤섞인 가운데 법원은 먼저 윤 씨의 손을 들어준 상황. 향후 두 사람의 법정 진실게임 2라운드가 벌어진다면 과연 어떤 결말이 나오게 될까.
이수향 기자 lsh@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