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가짜들이 울린 ‘죽음의 벨’
▲ 지난 2006년 발생했던 천안 성정동 원룸 살인사건 현장. 당시 피해자는 마치 잠을 자는 듯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이미 누군가에 의해 목을 졸려 살해된 상태였다. 또한 방안은 구석구석 뒤진 흔적이 남아있었다. | ||
2006년 11월 16일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 천안시 성정동의 한 주택가. A 씨는 평소 ‘언니 동생’ 사이로 절친하게 지내던 정미숙 씨(가명·여·당시 42세)가 살고 있던 원룸에 찾아갔다. 당초 A 씨는 이날 오전 정 씨와 만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정 씨는 아무런 통보도 없이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A 씨는 정 씨의 원룸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고 말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정 씨가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1년여 전 벌어졌던 일명 ‘천안 성정동 원룸 살인사건’의 시작이었다. 당시 경찰이 휴대폰 추적과 인터넷 IP 추적 등을 통해 8일 만에 검거한 범인은 30대 남성 2인조. 이들 일당은 정 씨 사건을 벌이기 보름 전 서울에서도 또 다른 살인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 경찰을 경악케 했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했던 천안경찰서 강력3팀 최풍식 팀장은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아무 노력 없이 쉽게 목돈을 손에 쥐려는 두 남성의 잘못된 욕망이 야기한 사건이었다. 나약한 여성을 타깃으로 삼아 치밀하게 저지른 이들의 범행에 억울하게 두 목숨이 희생됐다. 아무리 돈 앞에서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만도 못하게 여겨지는 험악한 세태라지만 너무 쉽게 생명을 유린한 이들의 범행에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묻힐 뻔한 사건을 해결하고 조기에 범인을 검거해 연쇄살인을 막았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당시 사건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정 씨가 살던 성정동 원룸으로 출동했다. 수사팀은 현장을 면밀히 살펴본 끝에 강도살인사건으로 가닥을 잡고 수사에 착수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최 팀장의 설명이다.
“발견 당시 정 씨는 마치 잠을 자고 있는 듯 이불까지 고스란히 덮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정 씨는 누군가에 의해 목이 졸려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집기 등이 방 안에 온통 흩어져 있던 것으로 보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특히 누군가 집 안을 구석구석 뒤진 흔적이 역력했다. 조사 결과 없어진 물건은 모조 귀금속과 액세서리들 그리고 소액의 현금뿐이었다. 성폭행 흔적이 없다는 점과 어수선한 현장 분위기로 볼 때 이는 전형적인 강도사건임이 분명했다.”
피해자 정 씨는 수년 전 남편과 이혼한 후 한동안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며 생계를 이어오던 여성. 얼마 전부터는 개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고 홀로 지내던 상태였다. 생활비를 대주던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사건 당시 그는 다른 지방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사건 당일 정 씨의 행적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체 부검 결과 정 씨의 사인은 질식사였고 사체가 발견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정 씨는 후배 A 씨와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던 중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것이었다.
수사팀은 사건 당일 정 씨의 원룸을 방문한 인물들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범행 현장에는 범인을 특징지을 만한 아무런 증거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또 그날 오전 원룸을 배회하는 수상한 사람을 봤다는 목격자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수사팀은 다시 현장 주변에서 ‘얼굴 없는 범인’을 추적할 만한 단서를 찾는 한편 정 씨의 주변인물들을 대상으로 탐문 수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 씨의 주변인물들은 모두 명확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었고 용의선상에 올릴 만한 수상한 인물도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남은 단서는 단 하나, 범인이 가져간 정 씨의 휴대폰이었다. 결국 수사팀은 이 휴대폰을 단초로 삼아 집요한 수사 끝에 범인의 흔적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 팀장은 수사팀의 노하우가 담겨 있는 휴대폰 수사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꺼렸다. 추후 유사범죄에서 범인이 이를 역이용할 것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다음은 최 팀장이 밝힌 당시 수사 상황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
“수사 과정에서 줄곧 꺼져 있던 정 씨의 휴대폰이 어느 순간 서울에서 잠깐 켜졌다가 꺼진 사실을 포착했다. 통화내역을 뽑아보니 700-XXXX 번호로 성인채팅을 한 사실이 있더라. 죽은 정 씨의 휴대폰으로 통화를 한 사람은 그녀를 살해한 범인일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정 씨 명의로 된 휴대폰인지라 그 발신번호만 가지고 용의자를 추적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우리는 그 번호가 성인채팅 전화라는 점에 주목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번호는 특정 인터넷 사이트를 거쳐 성인인증을 받아야만 연결될 수 있는 번호였다. 우리는 용의자가 전화를 한 기간을 포함해 그 전후로 일주일 동안 그 번호로 전화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모조리 뽑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일일이 확인전화를 걸어 문제의 사이트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대부분은 잘 기억하지 못하거나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대답을 거부하는 등 수사에 비협조적이었다. 다행히 한 사람으로부터 간신히 해당 사이트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 사이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인인증을 해야 했는데 우리는 성인인증 과정에서 범인이 남겼을 인적사항에 승부를 걸었다. 수사팀원들은 사이트 운영자와 간신히 접촉해 인적사항이 남겨져 있는 자료들을 일일이 복구해서 취합했다.”
지방을 오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사를 펼친 끝에 용의자로 떠오른 인물은 바로 김용훈 씨(가명·33)였다. 김 씨의 신원과 행동반경을 파악한 수사팀은 그가 머물고 있던 노원구 상계동의 한 주택에 잠복해 있다가 사건 발생 8일 만에 김 씨를 검거할 수 있었다.
강도살인 등 전과 5범이던 김 씨는 처음에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했다. 하지만 사건 당일 범행 장소를 배회한 김 씨의 동선 기록 및 발신 통화내역 등 수사팀이 들이미는 결정적인 증거 앞에서 그는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수사팀은 김 씨가 범행 무렵 민정기(가명·33)라는 미지의 인물과 자주 통화한 사실에 의심을 품고 김 씨를 추궁한 끝에 민 씨가 공범이라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후 수사팀은 경기도 안성에 은신 중이던 공범 민 씨를 추가로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수사팀에 따르면 동갑내기인 김 씨와 민 씨는 사채 사무실에서 우연히 알게 된 사이라고 한다. 두 사람은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범행을 모의하게 된다. 다음은 최 팀장의 얘기.
이들 두 사람은 이웃 간 교류가 없고 유동인구가 적은 한적한 원룸촌을 돌아다니며 범행대상을 물색했다. 낮 시간대에 원룸에 혼자 있는 사람, 그중에서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여성을 주 타깃으로 정했다. 이들은 주민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가스검침원으로 위장하고 다녔다. 특정 회사의 이름이 새겨진 유니폼까지 구해 입은 이들은 누가 봐도 여느 가스검침원과 다를 바 없었다. 초인종을 눌러서 집 안에 혼자 있는 여성을 찾았다. 피해자 정 씨의 원룸에도 이 같은 수법으로 침입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최 팀장의 설명.
“‘가스 검침 나왔습니다’ 라는 김 씨 일당의 말에 정 씨는 아무 의심 없이 문을 열어줬다. 그러나 집 안에 정 씨 혼자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이들은 강도로 돌변했다. 이들 일당이 원룸에 들어선 이상 정 씨는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특히 이들은 둘 다 건장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건장한 남성 두 명이 갑작스레 덤비는 상황에서 정 씨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준비해간 컴퓨터 선으로 정 씨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집 안을 뒤져 귀금속 등을 챙긴 뒤 유유히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더구나 이들은 사전에 목을 조르는 ‘예행연습’까지 해뒀던 터라 범행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특히 이들의 행동거지는 상당수의 범인들이 범행 후 뒷일을 생각 안 하고 무작정 도주하는 것과는 달랐다. 김 씨 일당은 정 씨를 위협하는 데 사용한 칼을 방 안에 두고 나온 듯하자 1시간 후 다시 정 씨의 원룸에 들어가 현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한편 걸레로 자신들이 남긴 흔적을 없애고 나올 정도로 대담함을 보였다.”
최 팀장은 이들의 치밀한 범행수법으로 보아 추가 범죄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수사팀은 이들의 여죄를 추궁하는 한편 이 즈음 전국에서 발생한 미제 살인사건들의 증거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때 수사팀의 눈에 들어온 사건이 바로 정 씨 살인사건이 일어나기 약 보름 전 서울 노원구에서 벌어진 주점 여주인 살인사건이었다.
10월 30일 자정 무렵 노원구 상계동의 한 주점에서 주점 여주인 송미자 씨(가명·당시 52세)가 목이 졸려 숨진 채로 발견됐다. 당시 범인들은 성폭행 사건으로 위장하기 위해 송 씨의 하의를 벗겨놓았지만 부검 결과 성폭행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이 의문의 살인사건에 대한 수사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한 채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모든 단서는 현장에서 나오는 법. 당시 사건을 담당한 관할서 형사들은 당시 송 씨가 범인과 동석한 것으로 보이는 주점 테이블을 주목했다. 당시 테이블에는 맥주병과 컵, 재떨이, 이쑤시개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현장에 있는 물품들에서 범인의 유효한 지문을 채취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팀원들은 범인이 안주로 먹었던 포도껍질과 씨를 증거물로 보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에 DNA 검사를 의뢰해둔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후 국과수에서는 현장에 있던 사람은 ‘신원미상의 2명의 남성’이라는 사실을 통보해왔다.
그러나 그후 신원미상의 남성들을 특징지을 단서가 없어 수사는 미궁에 빠져 있던 상황이었다. 최 팀장은 김 씨 등이 상계동 주점 살인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고 판단, 채취해둔 김 씨와 민 씨의 DNA를 당시 주점 현장에서 발견된 DNA 분석결과와 대조하는 작업을 의뢰했다. 혹시나 했지만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사건 현장의 포도씨에서 채취한 DNA가 이들의 것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상계동 주점 살인사건 정황에 대한 최 팀장의 설명.
“사건 당일 김 씨 일당은 송 여인이 혼자 영업을 하고 있던 주점에 손님을 가장해서 들어갔다. 처음부터 범행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그냥 술이나 한잔 하러 들어갔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손님도 없고 하니 주점 주인 송 여인이 이들과 같이 술을 마셨다는 거다. 그런데 함께 술을 마시던 와중에 송 여인이 돈 얘기를 꺼낸 것이 화근이었다. 이들의 얘기에 따르면 송 여인은 ‘이제 난 평생 먹고 살 돈을 준비해뒀다. 돈 걱정은 없다’는 식으로 얘기했다고 한다. 듣고보니 송 여인이 제법 돈이 많은 것 같았나 보다. 돈이 필요해 범행계획을 짜고 있던 이들에게 송 여인은 더없이 좋은 타깃으로 떠올랐던 셈이다. 송 여인이 현금을 많이 갖고 있을 것이라고 여긴 이들은 순식간에 손님에서 강도로 돌변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게 된다. 그런데 잠시 후 김 씨 일당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항하는 송 여인을 목 졸라 살해하고 보니 정작 송 여인은 현금을 갖고 있지 않더라는 거다. 김 씨 등은 술을 마시기 전에 송 여인에게 미리 5만 원을 줬는데 어찌된 일인지 카운터에는 4만 원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이들이 송 여인을 살해하고 챙긴 돈은 자신들이 낸 돈의 일부인 4만 원이 고작이었다.”
결국 이들은 서울에서 살인을 저지른 후 강도행각을 일삼다가 천안으로 내려와 또다시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최 팀장은 “여러 건의 강도행각을 통해 두 명의 목숨을 빼앗고 이들이 손에 쥔 돈은 그야말로 푼돈에 불과했다. 노력에 비해 ‘성과’가 없자 이들은 며칠 내로 크게 한 건 더하려고 했다고 털어놨다. 범행수법으로 보아 이들은 전국을 무대로 강도살인 행각을 벌이고 다닐 가능성이 다분한 ‘위험인물’들이었다. 신속하게 검거하지 못했더라면 얼마 안 가 또 다른 희생자가 나올 뻔했다”고 밝혔다.
살인강도 혐의로 기소된 이들 2인조는 각각 무기징역(김 씨)과 징역 20년(민 씨)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