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며 ‘완구’ 먹기…“우리도 예뻐서 찍어준게 아냐”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약 2년 만에 제2대 국무총리를 뽑은 지난 16일, 새누리당 지도부에 속한 한 의원은 “우리도 꽤 속앓이를 했다”고 털어놨다. 이날 이 총리는 50%가 갓 넘는 득표로 후보 지명 24일 만에 총리인준을 받았다. 이 의원은 “이 총리가 최적격자이기 때문에, 총리가 되면 책임총리이자 실세총리로서 당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에, 당과 정부를 이어줄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겠는가”라며 “지금은 누가 (총리를) 해도 잘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우리 지도부가) 밀어붙이는 게 낫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는 해석을 들려줬다.
지난 9일 새누리당 의원들이 의원총회 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왼쪽은 턱걸이 인준 통과한 이완구 총리. 이종현·박은숙 기자
이의원의 말은 임명동의안 투표 전주에 만난 정책 파트의 다른 의원 말과 대동소이했다. 그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이었던 “It’s the economy, stupid!(문제는 경제야 멍청아)”를 인용하며 “지금 문제는 시스템이다”고 했다. 누가 총리를 할 것인가라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총리를 해도 총리답지 않을 현 국정운영 시스템이 문제라는 의미였다. 당시 이 의원은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홍원 전 총리가 장수했음에도 존재감이 없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세월호 사건 때문에 물러났다가 인사 실패로 재기용된 시한부였다. 정 총리의 능력 문제가 아니라, 현 시스템이 대통령과 비서실장, 대통령 보좌진들 위주로 운영되고 있기에 ‘행사 총리’라는 멍에를 쓴 것이다. 이완구 후보자가 총리가 되면 다를 것 같은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정치를 더 잘 알기 때문에 더 끌려 다닐 공산이 크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상처를 안고서는 국정을 진두지휘하기가 더 어렵지 않겠는가.”
원내에서 큰 직책을 맡고 있는 다른 의원은 “이 총리가 스스로 거취를 표명해야 한다는 여론도 적지 않았다. 특히 기자들과 만나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걸 들어봤을 땐 우리가 평소 알지 못한 이 후보자의 모습이었다”며 “하지만 무리해서라도 통과시켰을 경우에 얻을 득실과, 집권 여당이 힘으로라도 통과시키지 못했을 때의 득실을 분석해보면 전자의 상처가 덜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라고 했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부적격 여론이 적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실제 16일 드러난 표심을 보면 새누리당 내부에서도 최소 7표 이상 이탈이 있었다. 투기·병역 의혹, 언론관, 공직자로서 사석에서의 태도 등등 의혹이 불거졌을 때 앞서의 의원은 “부를 축적한 것이 그간의 낙마자가 쓴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 후보 낯짝이 참 두껍다”고 비판한 바 있다.
그럼에도 지도부가 강공을 한 이유는 당내 여론을 종합해보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30%대로 추락해 조력자가 필요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완구 카드’가 무산될 경우 청와대의 의중을 거스르면서까지 배출한 김무성 당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 이른바 ‘K·Y 투톱’이 받을 상처가 걱정됐기 때문이란 것이다.
여당 내 사정에 밝은 정치권 인사는 “언론이 예측 가능했던 이완구 총리 카드를 박 대통령이 꺼내든 것은 그를 기용하면서 충청권 여론을 다독이고 언론의 다소 우호적인 여론몰이를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하지만 이완구 카드는 언론과 청문특위의 검증 과정에서 인간적인 매력 요인을 모조리 상실하는 바람에 지지율 반등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고, 성과라면 충청 지역의 기대감을 높인 정도”라고 평가했다.
박 대통령은 정홍원 전 총리가 사의를 표한 뒤 안대희 전 대법관과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을 후임 총리로 지명했지만 안 전 대법관은 신상 문제로, 문 전 주필은 역사관 논란으로 낙마한 바 있다. 둘 다 청문회장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국민의 고개를 갸웃거린 인사 참사의 정점을 찍은 형국이었고, 국정운영 지지율도 당시 크게 출렁거린 바 있다. 여당으로선 총리 삼수에 나선 이 후보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보다도, ‘지도부 지키기’ 여론에 이 총리가 덤으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적지 않았다. 정가의 한 소식통은 “만약 이 총리가 낙마했다면 김무성 대표는 물론 유승민 원내대표까지 흔들렸을 것”이라며 “친박계가 지도부 책임론을 제기했을 수 있고, 비박계에선 청와대의 인적 검증 소홀을 질타하면서 여권이 완전히 분열되는 길로 들어설 수 있었는데 의원들이 이를 막아준 셈”이라고 해석했다. 실제 16일 본회의를 앞둔 주말, 당 지도부와 원내 지도부는 의원들의 출석을 일일이 독려하며 표 단속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관료 출신의 비박계 의원은 “사실 유승민 원내대표 체제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BH(청와대)가 이완구 총리를 지명했기 때문이다. 이 총리가 인준받지 못했다면 BH는 이주영도 원내대표로 만들지 못하고 이완구 총리도 만들지 못한 꼴이 되면서 권력누수라는 커다란 늪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라며 “이 총리도 여당의 큰 은덕을 입었으니 BH 입장만 대변할 수 없게 됐다. 정치의 중심을 국회로 옮기겠다는 여당 지도부로선 그만큼 BH의 힘을 뺀 셈이 됐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 됐다”고 진단했다.
이완구 총리 임명동의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한 직후 유 원내대표는 “청와대가 지금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과감한, 국민 눈높이에 맞는 인적 쇄신이 필요하다고 말한 이후 지켜보고 있다. 개각에 대해서도 국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BH를 밀어줬으니 여론을 전달한 여당도 한번 밀어달라는 정중한 요구였다.
BH와 새누리당은 설 명절 차례 상에 인사 참사가 오르는 것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는 데 막판 공감대를 이뤘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의 30%대가 깨진 국정운영 지지율이 더 추락해서는 국회 내 주도권을 야당에 내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컸다는 것이다.
이 후보자에 대한 인준 찬성률은 2000년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된 뒤 있었던 총리 인준 투표에서 첫 청문회 대상이었던 이한동 총리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새누리당 내 누구도 이 총리에 대해 “장관 제청권을 열심히 행사하는 실세 총리가 될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내각 전반에 이완구 리더십이 통하지 않을 것이어서 “여당이 앞으로 더 잘해야 한다”는 주문만 많았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