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 나타났던 ‘복면 괴한’은 누구?
도곡동에 살던 30억 원대 자산가 함 아무개 할머니가 자택에서 피살됐지만 수사는 난항을 겪고 있다. 사진은 사건 현장.
사건이 발생한 2층 연립주택은 함 할머니 소유로 대문이 주민들의 주요 보행로와 접해있다. 문밖에서는 층고가 높은 1층 기와집처럼 보이지만 마당에서 보면 낮은 지대에 올린 2층 양옥집임을 알 수 있다는 게 인근 부동산 업자들의 말이다.
자택 2층에서 할머니의 시신이 최초로 발견된 시각은 지난 2월 25일 오후 4시경. 끈에 묶인 두 손이 몸 앞에 놓인 채였다. 가지런히 누운 자세로 발견된 시신 옆에는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한 이웃주민은 “동네 사람들과 얘기하는 과정에서 ‘할머니의 시신에서 누군가와 다툰 뒤 목 졸린 흔적이 남아있다’는 얘기를 얼핏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툰’ 부분에 대해서는 이웃들의 증언이 엇갈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초 목격자는 며칠 새 함 할머니의 소식이 뜸해 찾아가 본 1층 옷 수선가게 주인이지만 할머니가 건물 2층 자택에 계시는지 알아봐달라고 한 이는 인근 부동산 중개업자다. 시신이 발견된 지난 25일은 할머니가 건물 월세를 놓기 위해 그와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다.
신고 접수 후 경찰이 출동해 현장 감식 등 초동 수사를 진행했지만 결정적 단서는 잡지 못했다. 사건현장에 CCTV가 없어 범행 사진 확보는 불가능했다. 한 이웃 주민은 “범인이 이곳 CCTV 현황에 대해 잘 알고 있거나 최소한 밤에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도곡동 사건현장은 과거 강력범죄가 일어난 적은 없었지만 좀도둑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 2014년 늦가을 도난 피해를 당한 한 식료품점 사장은 “잠깐 볼 일 다녀온 사이에 어떻게 CCTV 고장을 알고 도둑이 카운터에 있는 현금 55만 원을 들고 달아났다”고 했다. 그는 유독 최근에 동네에 흉흉한 일이 많았다며 지난 2014년 할머니 댁 옆 건물 2층에서 서점을 경영하던 사람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일도 언급했다. 다만 그 원인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지난 26일 오후 2시경 사건현장 근처로 온 할머니들에게 취재진이 몰렸다. 독거노인들을 한 달에 한 번꼴로 만나 말벗이 되어주는 봉사활동가들이다. 그들이 본 함 할머니는 “최근까지도 건강식품 판매 등을 할 정도로 매우 정정하신 분”이고 삶의 의욕도 강했다고 한다. 절대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말한 건강식품 전문점과 할머니 댁 사이의 거리는 50m도 채 안 된다. 함 할머니는 이곳 제품들을 자주 복용했다. 직접 구입한 식품을 주변에 나눠주기도 했다.
함 할머니가 인근 약국에서 고지혈증 치료제를 구입해 복용했단 얘기도 그만큼 직접 건강을 챙겼다는 반증이다. 이웃들이 기억하는 할머니의 마지막 행적 역시 한의원 진료였다. 할머니가 다녀간 한의원은 지난 25일 사건 조사 직후부터 취재진들로 홍역을 앓고 있다. 할머니 댁에서 50m 거리다. 이곳에서 침술 진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간 할머니의 모습은 지난 23일 2시경 이웃들에게 목격됐다.
할머니에게 이상한 일이 생긴 건 보름 전이다. 그때 나타난 복면 쓴 괴한 얘기에 대해 이웃들은 할머니의 고함을 먼저 떠올렸다. 당시 “도둑이야”라는 할머니의 외침은 주변 건물에까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할머니 댁에 세든 가게주인과 옆집 음식점 주인 등 놀란 이웃들이 할머니 댁을 방문했으나 괴한은 이미 빠져나간 뒤였다. 숨진 함 할머니가 당시 이웃들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괴한은 할머니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택 내부를 태연히 둘러보다 이웃들이 오기 전 유유히 건물 밖을 나왔다고 한다. 할머니는 당시 복면 쓴 괴한을 친척이나 택배 직원으로 착각하고 현관문을 열어줬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친척 간 다툼으로 착각한 주민들도 일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그 자리에 모인 이웃들은 즉시 건물 내부에 CCTV를 달 것을 건의했으나 비용 문제를 고민한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젊은 시절부터 강남 일대에서 미용실, 환전상, 침구 판매 등으로 부를 차곡차곡 쌓은 할머니가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짐작했다. 게다가 최근 할머니가 고령에 접어들면서 아이처럼 겁이 줄어들었다는 얘기도 한 주민에게서 나왔다. 이 주민은 “할머니가 깐깐하고 재산 때문에 주위를 경계했다”는 기자의 물음에 대해서는 “할머니가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인 데다 불과 몇 주 전에 집안에서 괴한을 만났는데 안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주민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함 할머니는 6년 전 남편과 사별했고 슬하에 자식은 없다. 친척들 간의 왕래가 없지는 않아 지난 설에 마지막으로 만났다고 한다. 할머니의 남매(오빠와 여동생)들도 정정하고 조카네 가족들도 고령이지만 나이에 비하면 건강하다. 한때 할머니 집 근처에서 살던 조카네 가족들은 동네를 떠난 지 오래됐음에도 종종 할머니를 찾아왔다. 함 할머니에게는 친구도 몇 명이 있지만 이를 자세히 아는 이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26일 오후 발표된 부검 결과에 따르면 할머니의 사인은 경부압박 질식사다. 경찰이 확인한 사실과 일치한다. 이웃들은 지난 26일 저녁부터 각종 매체를 통해 제기된 보도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표했다. 설혹 할머니가 전화 사기범들에게 시달린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기도 아니고 전화로만 사기를 치는 그들이 어떤 위험부담을 안고 직접 신원을 노출해 이런 강력범죄를 저질렀겠느냐”는 것이다. CCTV도 없는 이곳에서 자산가를 특정해 엄청난 일을 벌일 사람이면 이미 좀도둑이 아니란 말도 덧붙였다. 이웃들은 면식범의 소행일 가능성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이채훈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