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혼내주려다 애꿎은 형수가...”
“얘들아, 얼른 타. 할머니 기다리시겠다.” 김 여인은 뒷좌석에 두 딸을 태운 후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그때였다. ‘쾅!’ 김 여인이 시동을 거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차량에서 화염이 치솟아 올랐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지난 1995년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순천 A 여관 승용차 폭파사건이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현장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폭발과 동시에 승용차 지붕이 30m 이상 날아가고 차체가 전소됐다. 여관 주변은 순식간에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폭발 당시의 충격으로 여관 주차장에 주차돼있던 승용차들이 파손되고 여관과 인근 건물의 유리창 수십여 장이 깨졌다. 엄청난 폭발이었다. 여관 투숙객들과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김 여인과 딸들의 상태였다. 그들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김 여인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하체는 날아가고 상체만 남은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김 여인의 한쪽 다리가 여관 옥상에서 발견됐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두 딸도 간신히 숨만 붙어 있을 뿐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꽃다운 나이의 두 딸은 온몸에 중화상을 입고 인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참으로 끔찍한 사건이었다. 조사결과 이 폭발은 ‘사고’가 아니라는 것이 쉽게 드러났다. 수사팀은 차 시동을 거는 동시에 폭발했다는 목격자들의 진술과 폭발 강도가 엄청났다는 점, 운전석을 중심으로 차량이 부서진 점으로 미뤄 누군가가 여관 주인 이 씨 혹은 그의 가족들의 생명을 노린 것이라 판단했다. 실제로 현장검증 결과 미심쩍은 부분이 속속 드러났다.
우선 사고 차량의 운전석 밑 콘크리트 바닥은 깊이 10m, 폭 30m가량이 파여 있었다. 따라서 수사팀 내부에서는 누군가가 몰래 운전석 아래에 설치해뒀던 사제 폭발물이 시동을 거는 순간 축전지의 전기력에 의해 폭발했을 가능성이 대두됐다. 치밀한 계획에 의해 이뤄진 살인사건이었다.
수사팀은 규모와 전문성으로 보아 이 사건이 사전계획에 의한 국내 최초의 폭발물 청부살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수사팀은 외국의 범죄사례나 영화를 모방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우선 폭발물의 종류를 밝혀내는데 수사력을 집중했다. 수사팀은 폭발물 전문가를 투입, 현장에 대한 정밀감식을 실시했다. 그리고 폭발물의 잔해로 추정되는 금속과 플라스틱 등 현장에서 발견된 유류품들을 수거해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다.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현장에는 유효한 증거물이 사실상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폭발의 규모로 보아 감식반은 다이너마이트가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했으나 폭발과 동시에 잔해가 날아가 버린 데다가 폭발 후 화재로 인해 잔재도 거의 남지 않았다. 정확한 폭약명과 점화장치 종류를 알아내기는 애시당초 무리로 보였다.
수사팀은 군부대 폭발물 전문가까지 투입해 현장감식을 했지만 단서를 찾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아침에 참변을 당한 일가족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범인을 꼭 잡아야 했다. 수사팀은 폭발물 처리전문 요원을 재차 투입, 2차 감식에 들어갔다. 이날에는 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수집된 차량의 시트조각은 물론 숨진 김 여인의 사체에서 채취된 체액과 몸에 박혀있던 파편에 대해서도 정밀 감정을 했다.
동시에 수사팀은 용의자를 압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가장 큰 의문은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였다. 또 하필 차량에 폭약을 설치하는 어려운 수법을 사용했는지도 의문이었다. 수사팀은 여관 주인 이 씨 부부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또 시동과 동시에 폭발이 이뤄지도록 폭발물을 설치했다는 점과 물적증거마저 완벽하게 인멸시켰다는 점에서 폭약이나 승용차에 대해 전문지식을 갖고 있는 인물에 대한 탐문수사도 병행됐다. 특히 이 씨 부부와 채무나 치정 등으로 인한 원한관계에 얽혀있거나 무슨 이유로든 갈등을 빚어온 인물에 대한 수사가 중점적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 씨 부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 부부는 동네에서도 상당히 평판이 좋았다.
그러던 중 수사팀은 중요한 진술을 확보하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여관 주인의 동생 이승국 씨(가명·42)의 친구 A 씨가 경찰에서 이상한 진술을 한 것이었다. 내용인즉 ‘지난해 11월 승국이가 멧돼지를 잡는 데 사용한다며 다이너마이트를 구해줄 것을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A 씨는 ‘부탁을 받긴 했지만 구해주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A 씨의 진술을 그냥 흘려 들을 수만은 없었다.”
답답한 날들이 계속됐다. 직접증거를 발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수사팀 내부에서는 사건이 미궁에 빠질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그러던 중 수사팀은 이웃들로부터 중요한 얘기를 듣게 된다. 여관 주인 이 씨가 최근 재산상속 문제 등을 둘러싸고 동생 이승국과 부쩍 잦은 불화를 빚어왔다는 것이었다. 수사팀이 확인한 결과 이 얘기는 사실이었다.
이 씨는 동생 소유로 되어있는 건물 일부에 대해 가압류신청까지 하는 등 금전관계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안 그래도 일전에 다이너마이트를 구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는 친구 A 씨의 진술을 확보한 터라 수사팀은 이승국을 더욱 예의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수사팀은 사건 직후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한 뒤 별다른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해 돌려보냈던 이승국을 다시 불러 사건 전후 그의 행적에 대한 재조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이승국은 나름 완벽한 알리바이로 수사팀을 당혹케 만들었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이승국의 알리바이는 거의 완벽했다. 조사결과 사건 당일 밤 12시 27분에 순천역에서 서울행 무궁화호 열차를 탄 이승국은 5시간 후 서울에 도착했으며 사건발생 1시간 45분여가 지난 8시 50분경 순천에 내려온 것으로 확인됐다. 또 사건 전날에도 무직인 이승국은 유난히 바쁜 하루를 보냈는데 무려 네 곳의 친구집에 들른 것이 확인됐다.
하지만 이승국은 분명 미심쩍은 인물이었다. 수사팀이 이승국을 유력한 용의자로 본 이유는 차량에 폭발물이 설치된 5일 밤에 이승국이 여관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이승국의 행적을 추적하던 수사팀은 결정적인 틈을 발견했다. 시간대별로 그의 행적을 분석한 결과 5일 오후 9시부터 10시까지 약 1시간 동안의 알리바이가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이승국은 최근 여수와 순천 등지의 화약회사와 전화로 접촉한 사실이 있었다. 또 이승국은 폭발물이 설치된 사건 전날 평소 교류도 없던 친구집을 네 군데나 들러 알리바이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흔적도 발견됐으며 방문 시간대도 당초 진술과는 조금씩 차이가 났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승국의 집에서는 정체불명의 찰흙이 발견됐다. 수사팀은 찰흙이 사제폭탄 제조시 마감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하지만 수사팀 내부에서는 ‘설마 시동생이 형수와 조카들을 상대로 그럼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겠는가’하는 반응도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형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저지른 범행이라 하기에는 너무 치밀하고 계획성이 다분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이승국은 펄펄 뛰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수사팀은 신병확보로 수사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13일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이승국을 우선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승국이 재산문제로 갈등을 빚어오던 형을 수차례에 걸쳐 폭행하고 코뼈를 부러뜨리는 등 상해를 가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수사팀은 이승국이 △재산상속을 둘러싸고 폭행을 행사했을 정도로 형과 극심한 갈등을 빚어왔다는 점 △폭약설치 추정 시간대 현장에 출입했다는 점 △폭약설치 추정 시간대의 알리바이를 설명하지 못하는 점 △지인을 통해 수차례 폭발물 구입을 시도했다는 점 △폭발물 사용법을 숙지했다는 주변의 증언 △현장에서 발견된 부탄가스조각과 유사한 가스통 및 찰흙이 이승국의 집에서 발견된 점 등을 폭파혐의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리고 구속 3일째 되던 날 수사팀은 마침내 이승국으로부터 범행일체를 자백받는 데 성공한다.
“사건 전날인 5일 밤 9시경 여관 주차장에 있던 승용차 문을 열고 들어가 미리 준비해 둔 다이너마이트 3개와 휴대용 부탄가스통 두 개를 묶은 뒤 차량 뇌관전선을 연결해 운전석 밑에 설치해뒀다”는 것이 이승국의 진술이었다.
조사결과 그는 지난해부터 형을 상대로 한 범행을 계획해왔으며 지난해 12월 31일 전남 여천에 소재한 공사현장에서 폭약을 훔친 뒤 범행 전까지 자신의 집에 숨겨뒀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승국이 형수와 조카들을 상대로 그런 끔찍한 범행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사결과 이승국의 애초 목표는 형이자 여관주인인 이승도 씨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이승국의 범행동기는 예상대로 재산갈등이었다. 그는 ‘평소 유산상속문제로 형과 심한 갈등을 빚어왔다. 형님은 빌린 돈 500만 원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난해 8월 21일 내 명의로 된 여관 별채를 법원에 가압류조치를 해버렸다. 내 유일한 재산을 압류하고 타박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화를 참지 못한 이승국은 결국 형을 수차례 폭행하는 등 형제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이승국은 “형님을 한 번 혼내주려했을 뿐인데 애꿎은 형수님과 어린 조카들에게 피해를 줘서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울먹였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재산 때문에 야기된 형제의 갈등은 일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안겨준 참극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