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K그룹 아들인데… 결혼 할래요?
▲ 영화 <모노폴리> | ||
박 씨는 지난 1월 31일 같은 요가 학원을 다니던 피해자 김 아무개 씨(29)에게 접근했다. 그는 결혼을 미끼로 김 씨와 성관계를 맺고 신용카드를 넘겨받아 술값, 기름 주유 등 개인용도로 사용했다. 또한 자신이 K 그룹 아들이라 금융권 고급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고 말하며 김 씨의 투자를 유도해 2월 2일부터 열흘 동안 무려 1억 원을 편취하기도 했다. 경찰은 박 씨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피해 여성들이 늘어나자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결혼 적령기 여성을 상대로 벌인 박 씨의 기상천외한 사기 행각 속으로 들어가 봤다.
박씨는 백마 탄 왕자님처럼 여성들 앞에 나타났다. K 그룹 아들로 둔갑한 그는 수려한 외모, 184㎝의 훤칠한 키에 재치 있는 입담까지 과시하며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박 씨를 수사하고 있는 서울 혜화경찰서 관계자들도 ‘속을 만하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박 씨는 강남의 한 요가 학원에 일일 사용료를 내고 다니면서 퇴근 후 운동하러 오는 직장인 여성들을 노렸다. 마음에 드는 여성이 눈에 띄면 자신이 재벌 2세라는 정보를 간접적으로 흘리고 다녔다. 그는 복도를 지나가는 박 아무개 씨(31)에게 들리도록 “아버지 힘드신 것 압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우리 K 그룹 곧 일어날 것입니다”라며 K 그룹 회장과 통화하는 척했다. 그 후엔 문을 나서던 박 씨와 일부러 부딪혀 이를 빌미로 친해졌다. 남자친구가 있던 박 씨는 같은 요가 학원을 다니던 김 씨에게 피의자를 소개시켜줬다. 박 씨는 “나를 K 그룹 아들이 아닌 평범한 회사원으로 봐 달라”며 자신의 진솔함을 어필했다.
박 씨의 재벌 2세 행세는 김 씨와 교제를 시작한 이후에 더욱 심해졌다. 커피숍에서 노트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K 그룹 아들 노릇하기도 힘들다. 기자들이 저렇게 항시 나를 지켜보며 기삿거리를 찾고 있다”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휴대폰에 S 그룹 회장 이름으로 번호를 저장해 놓고 “형, 저 요즘 힘든 거 아시죠. 시간될 때 한 번 만나요”라며 S 그룹 회장과 형 동생 하는 사이라고 거짓말까지 했다.
박 씨는 강남의 고급 원룸에 거주하면서 렌트한 아우디, 벤츠, BMW 등 외제차 5대를 몰고 다녔다. 렌트한 차량임을 모르도록 김 씨와는 주로 밤에 만났다. 김 씨가 차량 번호판에 쓰인 ‘허’자를 발견해 그 이유를 묻자 “어머니가 이 차도 한번 타보라고 렌트해 놓으셨다”며 태연하게 답했다.
김 씨가 자신과 결혼할 것을 철석같이 믿게 된 어느 날, 박 씨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결혼을 위해선 자금이 필요하다. 내가 금융 쪽 고급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 5000만 원만 투자하면 1억 원을 만들 수 있다”며 결혼 적령기 여성의 불안한 심리를 이용했다. 고민하던 김 씨는 그동안 꼬박꼬박 모아둔 월급을 박 씨에게 건넸다. 그는 한 술 더 떠 “요즘 회사 상황도 안 좋은데 카드 내역을 아버지께 들키면 큰일난다”며 김 씨에게 신용카드를 넘겨받아 술값, 기름주유 등 개인 용도로 사용하고 A 저축은행에서 대출을 받게 했다. 박 씨는 이렇게 12일 동안 56회에 걸쳐 1억여 원을 편취했다.
혜화경찰서 강력 5팀은 강남 일대에서 렌트 차량이 강도, 날치기에 자주 이용되고 있음을 포착하고 지난 2월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그러던 중 박 씨가 강남 고급 커피숍, 클럽 등에서 K 그룹 아들 행세를 하며 여성들에게 사기를 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피해 여성을 수소문했다. 경찰이 만난 김 씨는 그때까지도 박 씨를 재벌 2세로 믿고 있었다. 강력 5팀은 김 씨를 설득해 진술을 확보한 후 박 씨가 자주 다녔다는 강남구 역삼동, 신사동, 청담동 일대에서 3일간의 잠복 끝에 박 씨를 검거했다.
박 씨의 사기 전력은 화려했다. 사기죄로 이미 1년 4개월을 복역한 그는 지난 2000년 7월 출소한 뒤 K 그룹 회장 아들 행세를 시작했다. 강남의 한 병원 주차장에서 여의사에게 일부러 주차 문제로 시비를 걸며 친분을 쌓았다. 박 씨는 여의사로부터 미모의 후배 여의사 이 아무개 씨(34)를 소개받았다. 이 씨는 서울 여의도동 60평형 대 고급 아파트에 살고, 월수입 2000만~3000만 원에 이르는 재력가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박 씨는 “엄청난 이익을 낼 수 있는 투자 경로를 알고 있다. 새 병원 개원 자금으로 사용하라”고 꾀어 만난 지 두 달 만에 4억 5000만여 원을 편취했다.
박 씨는 또 지난 2001년 6월 모 항공사 승무원인 전 아무개 씨에게 접근해 신용카드를 넘겨받아 무려 22차례에 걸쳐 1650만 원 상당의 물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박 씨의 범행은 그를 수상히 여기고 돈을 돌려달라고 찾아온 여의사 이 씨 덕분에 발각됐다. 박 씨는 병원을 찾아가 이 씨에게 상해를 가했고, 이 과정에서 사설 경호원들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다. 법원은 2001년 7월 박 씨에 대해 “사안이나 죄질이 매우 무겁다”고 판단해 사기 혐의로는 이례적으로 징역 8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당시 박 씨가 피해여성들을 괴롭혀 합의를 얻어내는 바람에 혼인빙자간음 혐의는 추가되지 않았다.
박 씨는 전남 장흥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모범수로 뽑혀 형기 2개월을 남기고 지난 2009년 5월 가석방됐다. 박 씨는 그 후 8개월가량 여성을 상대로 비슷한 수법으로 사기를 치며 생활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박 씨는 3월 17일 서울지검에 사건이 송치된 후 현재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혜화경찰서는 다른 피해 여성들의 진술을 토대로 박 씨의 여죄를 추궁하고 있다.
지난 17일 기자와 만난 혜화경찰서 강력 5팀 강성영 팀장은 “박 씨가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돈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졌던 것 같다. 20세 때부터 편취하기 시작했다”며 “누범 기간 중에 벌어진 사건이므로 형이 가중돼 중형이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