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교체 과도기…‘큰 인물 어디 없나요’
지난 2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문화체육 활성화를 위한 기업인 오찬에 참석했다. 2년 전 첫 오찬 때와는 대표 얼굴들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사진제공=청와대
박근혜 정부 들어 재계의 대표적 인물들의 변화는 청와대 회동 장면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박 대통령은 취임 첫 해인 지난 2013년 8월 28일 10대그룹 총수를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했다.
이 자리에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김창근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이재성 현대중공업그룹 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전경련 회장), 홍기준 한화케미칼 부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대한상의 회장) 등이 참석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공식석상에 나올 수 없어 ‘대리인’을 보냈다. 자산기준 재계순위를 보면 10대그룹에 포스코와 KT가 들어가야 하지만, 이들은 정부 소유나 마찬가지인 국민연금공단이 최대주주라는 이유로 빠졌다.
박 대통령과 재계 총수들이 다시 만난 것은 1년 6개월이 지나 집권 3년차에 접어든 지난 2월 24일이었다. 명분은 ‘문화체육 활성화를 위한 기업인 오찬’이었다. 이날은 2년 전 첫 만남 때와는 대표 얼굴들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나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조현상 효성그룹 부사장 등 21명이 참석했다.
그 사이 이건희 회장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치료를 받고 있어 이 부회장이 대신 나온 것이고, 1차 오찬 때부터 구속 상태였던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여전히 공식석상에 나올 수 없는 상태였다.
올해로 만 77세인 정몽구 회장도 현대차 주관의 단독 행사에만 모습을 비칠 뿐 단체 행사에는 발걸음이 뜸해져서인지 아들 정 부회장이 대신 나섰다. 정 회장은 평소 재계 총수 가운데 ‘맏형’의 역할을 하려고 한 적도 없다. 올해 70세에 접어든 구본무 회장은 여전히 왕성한 경영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전경련과 얽힌 이런 저런 ‘구원(舊怨)’에 재계 행사에는 발을 끊은 지 오래다.
조양호 한진 회장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당시부터 열심히 뛰었고, 현재 조직위원장까지 맡고 있지만 큰딸 조현아 전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의 여파로 재계 대표로 나서는 데 큰 결격 사유를 떠안고 있는 상태다.
특히 조 회장은 전경련과 미국상공회의소가 공동 주관하는 ‘한미재계회의’의 한국 측 위원장도 맡고 있다. 현재현 전 동양그룹 회장이 맡아왔으나 사기 어음 발행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면서 이어받았다. 조 회장은 지난해 서울에서 열린 한미재계회의에 아들 조원태 대한항공 부사장과 함께 참석할 정도로 열성적이었으나 올 5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릴 예정인 총회에도 다시 의욕을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는 “나보란 듯이 공식행사에 나설 수 있는 기업 총수가 한 명도 없는 상태”라며 “재계가 이 정도로 콩가루 집안 신세가 된 적은 없었다”고 토로했다.
재계를 대변해온 경제5단체(전경련·대한상의·경총·무역협회·중소기업중앙회)도 함께 보조를 맞춰본 지 한참 됐다. 지난해 11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되자 경제5단체장이 민간대책위원회 차원의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려 모인 적이 있었지만, 정부나 국민을 향해 기업의 입장을 밝히려 공동대응한 것은 지난해 6월이 마지막이었다. 당시 전경련 등 24개 경제단체 탄소배출권 거래제 시행을 앞두고 “기업에 과도한 부담을 안겨줘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며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었다.
더욱이 기업과 관련한 현안을 놓고 공동대응을 위해 머리를 맞대야할 경제단체들은 어설픈 자존심 경쟁을 하고 있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지난 2월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서울상의 회장에 선출된 뒤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 등 소장파 오너들을 부회장으로 영입하자 “재계의 구심점이 전경련에서 상의로 옮겨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 것이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이 같은 달 전경련 회장으로 세 번째 연임을 확정지었으나 부회장단도 모두 채우지 못한 것과 대비돼 비교대상이 됐다. 여기에 박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동행하는 경제사절단 구성이나 정부와의 협의 채널 등에 박 회장의 적극적인 행보가 주목을 받은 것도 이 같은 분석이 힘을 실었다.
그러나 경제단체들의 소사를 잘 아는 재계 인사들은 “엄연히 태생이 다르고 역할이 달랐는데, 위상이 뒤바뀌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어불성설”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 대기업 임원은 “대한상의는 법적 단체이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정부쪽 업무 대행까지 하고 있고, 부회장도 산업통상자원부 고위 퇴직자가 자리를 옮겨오는 사실상의 반관(半官)단체다. 대한상의가 정부와의 교섭 채널을 원활하게 가동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역할이지 수장의 역량이 뛰어나서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업종단체 관계자는 “재계에서 서열은 자산, 시가총액 등 재력이 기준이다. 대한상의가 전국 상공인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4대그룹 중심의 전경련이 갖는 순수 민간 경제단체로서 위상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며 “결국 대기업 대변자로서 전경련이나, 정부와 상공인간 관계망 형성에 중점을 두는 대한상의의 역할은 서로 다르고, 각기 거기에 충실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한다.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게 재계가 국민적 신망을 얻지 못하는 데 한몫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