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의 입에 물리고 언론의 펜에 베였다
협박 혐의로 법정에 선 데이지 데보(오른쪽)는 배심원들 앞에 “보우가 알코올 중독자이며 도박을 즐기고 동시에 여러 남자와 즐기는 헤픈 여자”라는 등의 악의적인 말을 쏟아냈다.
데이지 데보는 파라마운트의 헤어드레서였을 때 클라라 보우를 처음 만났다. 그들은 금방 친해졌고, 보우는 데보를 자신의 전속으로 요구했으며, 급기야 비서로 고용했다. 그들은 갑을 관계보다는 친구에 가까웠고, 종종 주말을 함께 보냈으며, 사생활을 공유했다. 그들의 관계는 돈독했다. 하지만 이때, 데보의 라이벌이 등장한다. 바로 보우의 연인 렉스 벨이었다. 그는 보우에게 재테크를 위한 투자를 권했지만, 데보는 벨이 보우를 등쳐먹으려 한다고 생각해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이런 대립 관계는 할리우드 사교계에 조금씩 알려졌고, 보우가 사랑에 눈이 멀어 절친이자 비서인 데보를 해고할 거라는 소문마저 돌았다.
보우에겐 충성스러웠지만, 데보는 그렇게 심지가 굳은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이 잘릴 거라는 소문을 들은 데보는 보우의 비즈니스 관련 서류와 사적인 서신과 수표책을 모두 은행의 금고에 넣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일종의 선제공격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보우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다. 서류를 되찾고 싶으면 12만 5000달러의 돈을 내라는 것. 그렇지 않으면 보우에 관련된 치명적인 내용들을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데보는 곧 후회했다. 다음 날 그녀는 다시 옛날처럼 비서 일을 하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보우는 데보를 만나주지 않았고, 자기 곁을 떠나라고 했다. 렉스 벨은 데보를 협박 혐의로 경찰에 연락했다.
1930년 11월 6일, 데이지 데보는 체포되었다.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결국 감옥에 갇혔다. 그녀는 자신이 무고하게 감옥에 갇혔다며 맞고소했다. 11월 말에 재판이 열렸다. 피고는 데보였지만 그녀는 너무나 당당했다. 배심원들 앞에서 청산유수처럼 보우에 대한 악의적인 말들을 늘어놓았다. 데보에 의하면 보우는 매주 엄청난 양의 술을 배달시켜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일주일에 6일 동안 포커 도박을 즐기며, 남자들과 관계를 맺은 후 사랑의 징표로 사치품을 챙기고, 동시에 여러 남자와 즐기는 헤픈 여자였다. 자신이 보우의 서류를 빼돌린 건, 렉스 벨이 보우의 재정을 맡으며 위법 행위를 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심약한 보우의 멘털은 심하게 흔들렸고, 신경증 상태에 빠졌으며 극심한 저체온증이 찾아왔다. 판사는 데보에게, 사안과 관련된 사항만 말하고 인신공격은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보우도 데보의 수많은 약점을 알고 있었다. 데보의 아버지는 밀주업자였다. 그리고 당시 데보는 중국 출신의 촬영감독 제임스 웡 하우와 동거 중이었는데, 그 시기 타인종과의 관계는 대중적으로 비난 대상이었다. 하지만 보우는 지나치게 당황했고 긴장한 상태였다. 정제되지 않은 단어들로 자기변호를 했지만, 갑자기 튀어나오는 억센 브룩클린 억양에 청중들은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히스테리컬한 상태에서 렉스 벨의 부축을 받으며 법정을 빠져 나왔다.
다음해 1월 23일에 데보에 대한 배심원 평결이 나왔다. 총 35건에 대해 800달러짜리 수표를 훔친 것만 인정되었다. 하지만 형량은 무거웠다. 18개월형에 5년 동안 보호관찰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3월 28일, 데보는 5000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출옥했다.
반면 보우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대목을 맞이한 타블로이드는 매일처럼 보우에 대한 선정적인 기사를 쏟아냈다. 대표적인 인물은 <코스트리포터>의 발행인 프레드릭 거너였다. 그는 ‘클라라의 시크릿 러브 라이프’라는 60페이지짜리 문건을 만들었다. 클라라 보우를 둘러싼 수많은 루머들을 집대성하고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인 것이었다. 지금까지도 돌고 있는 보우에 대한 저질스러운 이야기들의 근원은 바로 이 문건인데, 여기엔 마약 중독, 취중 섹스 파티, 수간, 노출증, 근친상간, 레즈비어니즘, 알코올 중독, 성병 감염 등 온갖 파격적인 내용이 열거되어 있었다.
거너는 이 문건을 보우의 연인인 렉스 벨에게 보내 2만 5000달러를 요구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폭로하겠다는 것이었다. 벨이 거부하자 그는 당시 영화 검열을 담당하던 윌 헤이스와 대법원과 각 지역의 학부모 협회에 문건을 보냈다. 자신은 복수라고 생각했지만, 이 행동은 거너의 발목을 잡았다. 당시 미국 형법 211조는 “음란한 내용을 지닌 문서나 그 어떤 것도 우편으로 보내거나 유통시키거나 수입해선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거너는 기소되었고, 8년형을 선고받았다.
보우는 은퇴 후 렉스 벨과 혼인해 두 아이까지 낳았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중의 외면 속에 보우는 은퇴했고, 1931년에 렉스 벨과 결혼식을 올렸으며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후 벨은 네바다주 부지사가 되었고 보우는 할리우드에 ‘잇’(It)이라는 카페를 열었지만 곧 문을 닫았다. 이후 보우는 점점 심리적 붕괴 상태에 빠졌다. 여전히 대중의 눈이 무서웠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1949년엔 정신분열증 판정을 받기도 했다. 이후 그녀는 가족과 떨어져 LA 컬버시티 근처의 방갈로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자연스레 이혼했고, 그녀의 곁엔 간호사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1965년 9월 27일, 60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고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친 적 없었던 클라라 보우. 그녀의 마지막은 너무나 외로웠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