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하자마자 암초에…침몰이냐 도약이냐
전국은행연합회 전경과 하영구 회장. 하 회장은 별도의 신용정보기구 설립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그런데 고객을 보호하자는 취지의 이 법안이 엉뚱하게도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을 궁지로 내모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부 조항에 하 회장의 세력기반인 은행연합회의 위상을 뒤흔들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
신용정보법 개정안은 신용정보집중기관에 대해 정의하고 있는 제25조에서 ‘금융위원회에 신용정보집중기관으로 등록하여야 한다’는 부분을 ‘금융위원회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바꿨다. 또 ‘신용정보집중기관으로 허가를 받고 싶은 자는 민법 제32조에 따른 비영리법인이어야 하며, 신용정보를 집중관리하거나 활용하는 데 있어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공공성과 중립성을 갖춰야 한다’는 조항이 새로 만들어졌다.
등록제가 허가제로 바뀌고, 공공성과 중립성을 갖춘 비영리법인만 신용정보집중기관이 될 자격을 주겠다는 것이다. 현재 신용정보집중기관으로는 전국은행연합회·금융투자협회·생명보험협회·손해보험협회·여신전문금융협회, 이렇게 5개 금융 관련 단체가 등록돼 있다. 개정안이 시행되면 이들은 금융위원회의 허가를 다시 받아야 신용정보집중기관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개정안 시행 후 이들이 새롭게 허가를 받을 수 있을지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허가를 내주는 금융당국이 이들 5개 금융 단체와는 별개로 새로운 기구를 만들 구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5대 금융 단체의 경우 비영리법인이라는 점에서는 자격을 갖췄지만 공공성과 중립성 조항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며 “금융위도 공익성에 무게를 둔 별도 기관 설립을 원하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금융당국 고위 관계자 역시 “금융 고객의 개인신용정보는 무엇보다 공공성과 안전성이 중요한 사안”이라며 “카드정보 유출사태와 보이스피싱, 보험사기 등 각종 금융사고와 직결되고, 직접적인 금전피해가 발생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민간에 맡기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 정부의 기류”라고 밝혔다.
이에 더불어 금융권에서는 고객정보가 곧 돈이자 권력이다. 5대 금융 단체의 경우 신용정보집중 기능을 잃게 되면 당장 신용정보 관리로 벌어들이던 수입이 사라지게 된다. 특히 타격이 큰 곳은 은행연합회가 될 전망이다. 현존하는 최대 신용정보집중기관인 은행연합회의 경우 관련 매출액이 은행연합회 전체 매출액의 절반가량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정적인 어려움만 예상되는 것이 아니다. 매출비중이 크다보니 은행연합회 전체 업무의 60%가량은 신용정보집중 기능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돼 있다. 만약 별도의 신용정보집중기관이 설립돼 관련 조직을 넘겨주거나 해체할 경우 은행연합회는 사실상 껍데기만 남게 되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하영구 회장은 별도기구 설립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난해 12월 취임사에도 “신용정보집중기관으로서의 책무를 철저히 수행할 것”이라는 각오를 밝혔을 정도다.
하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아 보인다. 하영구 회장을 제외한 나머지 네 금융단체장들이 모두 별도 기구 설립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외제차 보험사기 등 금융범죄가 빈발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손해보험협회와 생명보험협회는 이참에 고객정보관리에서 손을 떼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상태다.
하 회장에 남은 기회는 있다.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는 금융당국을 설득하는 것이다. 특히 별도 기구 설립 의지가 강했던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이 물러나고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취임하면서 정책 방향이 달라질 여지가 생겼다.
금융권에서는 하 회장이 승부수를 던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신용정보집중기관으로 별도의 기구 대신 은행연합회를 선택해 달라고 역제안하는 것이다. 관련 업무가 60%에 달한다는 점을 오히려 “신용정보 업무에 관한 인력과 조직을 갖췄고, 오랜 노하우가 쌓여있다”라는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다.
여기에 하 회장 특유의 인맥이 힘을 발휘하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다른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금융업계에서는 고객개인정보를 가진 자가 곧 왕이다. 계좌를 만들어도, 보험에 가입해도 개인정보를 보유한 기구의 협조를 얻어야 하는 구조”라면서 “만약 은행연합회가 신용정보집중기관이 될 경우 오히려 지금보다 훨씬 막강한 권한과 인력, 자금 등을 거느린 거대조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