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 건봉사,‘사람의 다툼은 1500년 역사를 잿더미로’
4월, 강원도의 봄은 감자심기에서 시작된다. 7번 국도를 따라 북으로 가다보면 너른 들녘에농사일이 한참이다. 겨우내 비어있던 땅에 거름을 내고 트렉타로 갈아 엎어 비닐을 씌운 뒤 감자 심기가 시작된다. 남녀가 짝을 이뤄 남자가 감자심는 도구로 밭이랑에 구멍을 내면 여자가 씨감자를 집어넣고, 뒤따르는 이들이 흙을 덮는다. 이제는 농사일도 전문작업단이 하고 주인은 그저 새참과 점심을 준비하면 그만이다.
바다에도 봄이 왔다. 고성 초도해변에서는 자연산 미역을 건져 올리는 사람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일렁이는 파도를 피해 일년에 한번 봄 미역을 건져 올린다. 북쪽의 차가운 바닷물이 키운 이곳의 미역은 몸값이 제법되고 인기도 높다.
고성바닷가의 또 다른 자랑은 고르메다. 금강산의 눈 녹은 물이 키운다는 바다해초. 미역도 다시마도 김도 아닌것이 바위에 일렁이는 파도가 키운 해초다. 3월과 4월 파도에 잠기는 얕은 바위에서 자란 해초를 뜯어서 돌가루를 털어낸 뒤 김처럼 말린것이 고르메다.
금강산 건봉사는 강원도 고성의 대표 얼굴이다. 강원도 동해안에 사는 사람도 멀게만 느끼는 북쪽 끝 고성 건봉사. 지금은 갈수 없는 북녘 땅 금강산의 유서 깊은 사찰. 20년전만 해도 군부대의 사전 허락을 얻어야 갈 수 있던 절이다. 지금도 화진포에서 건봉사로 가는 길목에는 군인들이 신원을 확인하고서야 통과를 허가한다. 군부대를 통과하는 길 정문에 다다르면 소총을 휴대한 초병이 나와 거수경례를 한다.
“어디까지 가십니까. 일행은 몇분이시죠. 성명 말씀해 주세요. 차를 멈추시면 안되고 사진촬영하시면 안됩니다.”
고성은 역시 분단의 상징이다. 길가에 들어선 대전차 장벽과 해안가에 늘어선 철조망. ‘이겨놓고 싸운다’는 군부대가 있다.
건봉사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일주문 근처에는 찬바람속에서도 얼레지가 피고 능파교아래 개울에는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적멸보궁으로 이어지는 연못에는 짝짓기중인 개구리 한 쌍이 인기척에 놀라 물속에 뛰어든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만일염불원에 안장된 진신사리를 친견했다. 인간의 욕심은 성불했다는 석가모니사리 마저 훔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왜군이 통도사에 난입,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해 갔다. 1604년 8월 사명대사는 선조왕의 명령으로 일본에 건너가 8개월간 머물면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얻었으며 3000여명의 포로를 데리고 이듬해 4월 귀국했다. 그때 사명대사는 왜군이 탈취한 사리도 되찾았다. 사명대사는 가져온 사리를 통도사에 다시 모셨고, 그 중 12과는 의승군을 일으킨 건봉사 낙서암에 봉안했다.
건봉사 부도는 80여기다. 이 가운데 온전하게 남은 것은 60여기이고, 나머지 10여기는 부도비는 없고 받침돌만 남아 있다. 이 부도밭에는 특이하게 ‘생사리탑’이 있다. 이 부도는 살아있는 몸에서 얻은 사리를 안치한 것이다. 만해 한용운이 집필한 ‘건봉사 및 건봉사 말사 사적’에 따르면 1854년부터 10여명의 스님이 3년간 수도하면서 살아있는 몸에서 빼낸 26과의 사리를 안치한 것이다.
조선시대 4대 사찰에 들 만큼 세력이 강하고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어도 사람의 다툼은 당할 수 없음인가? 석가모니부처가 성불한 이후에 자비를 설하고 그 가르침이 이땅에 온지도 천년의 세월이 더 흘렀음에도 인간의 탐욕은 그치지 않는가. 건봉사 곳곳의 빈터에 서서 웅장한 가람과 골짜기를 가득 메웠을 염불소리를 상상한다.
그리고 이 땅을 침범한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목탁대신 창칼을 들었던 승군들의 고함소리. 60여년전 이 골짜기를 가득 메웠을 포탄 터지는 소리와 총소리, 검붉게 타오르는 화염, 그리고 부상당한 이들의 신음소리. 깨달음을 향한 구도도량이 사람들 탐욕에 의해 지옥으로 변해 향내음 대신 살과 뼈가 타고 화약 냄새만 가득 했으리라.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오듯이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창건된 건봉사는 몇 번에 걸친 화재와 한국전쟁으로 남김없이 불탔지만 일제 강점초기까지한 해도 31본산의 하나로 백담사와 신흥사를 말사로 거느렸다.
아도화상과 도선국사, 나옹화상, 사명대사, 만해 한용운 등이 이 절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고승들이니 한국불교의 역사가 여기 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승군을 일으켰고, 일본에서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를 찾아 건봉사에 봉안하기도 했다.
그 후 건봉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1900년대 초까지 영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 근대사의 아픔이 배어 있는 곳이다. 건봉사는 한국전쟁 때 잿더미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945년 북한의 통치권에 묶이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10일. ‘부처님 오신 날’을 불과 3일 앞두고 재앙을 맞이했다고 한다. 유엔군은 후퇴하던 북한군의 중간집결지였던 건봉사에 무차별 공습을 벌인다. 3~4대의 폭격기는 대웅전 지역의 모든 전각을 불태웠다. 국보 412호 ‘금니화엄경’ 46권과 도금원불, 오동향로, 철장 등 사명대사 유물이 모조리 사라졌다
이 지역은 2년간 처절한 고지전의 현장이었다. 향로봉·건봉산 전투는 물론 북한 쪽의 351고지전투, 월비산 전투 등 전사에 남을 지루한 싸움이 벌어졌다. 1951년 4월부터 휴전 직전까지 16차례의 공방전에서 국군이 쏘아댄 포탄만 10만발에, 미 7함대 함포사격과 공군기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국군 수도사단을 시작으로 이곳에 교차 투입된 국군 부대가 7개 사단에 이르고, 그때마다 이곳에 주둔하던 국군에 의해 건봉사의 남아 있던 전각과 요사채는 군부대 막사와 땔감으로 헐려 나갔단다. 휴전 후에는 주둔한 군부대의 실화로 낙서암 지역이 소실되는가 하면 고승들의 부도탑이 밀반출되고 그 많았던 중요 문화재들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1954년 이후에는 불이문 외에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 헐벗고 잡초만 우거진 빈 터가 되어버렸다. 전쟁 직전 640칸 규모의 건봉사가 사라진 것이다. 사람들의 다툼으로 인한 전쟁이 1500년 역사를 지켜온 문화재를 한 순간에 날려 버린 것이다.
인간의 끊이지 않는 탐욕으로 1986년 6월 13일 적멸보궁의 치아사리를 훔쳐갔으나 모든 도굴꾼들의 꿈에 부처님이 매일같이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었다. 7월14일 일당 중 주범이 공범을 시켜 서울의 한 호텔에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났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가지고 달아나는 바람에 증발되고 말았다. 건봉사 측은 결국 되찾은 8과 가운데 3과는 적멸보궁 석탑에, 나머지 5과는 만일염불원에 봉안하여 불자들의 친견을 허락하고 있다.
건봉사는 눈여겨볼 만한 것이 많다. 적멸보궁과 대웅전을 나누는 계곡 위에는 홍교 양식의 능파교가 걸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솟대의 머리에는 돌로 새긴 오리가 앉아 있다. 또 능파교 양켠에 있는, 수행의 과정을 나타내는 십바라밀을 새긴 석주 또한 건봉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건봉사를 돌아 나오는 길에 화두 하나를 챙겼다. ‘그러함에도’ 모든 인간이 욕심에 따라 남을 이기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데 ‘그러함에도’ 부처는 왜 가르침을 폈을까?
건봉사에 수 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와 예를 올리고 수행함은 발징화상에 의해서 만일염불회사 창시되고 31인이 승천한 등공탑이 현존하는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죽어서 가는 극락이 아니라 살아서 지은 선한 공덕과 염불기도로 성불하는 곳.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고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우면서도 염불 수행을 멈추지 않았던 곳. 생사리가 나올 정도로 치열하게 수행하면서 찾고자 했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날이 저물어 대진항 근처의 초도해변 겨울바다펜션에 숙소를 정했다. 잠자리에서 바다위로 솟아오르는 해와 달을 볼 수 있단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해변에 가로등이 켜지고 무장을 한 초병이 해안경계근무를 위해 철책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모래사장 위로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방안에까지 들린다.
최원석기자 ilyo033@ilyo.co.kr
바다에도 봄이 왔다. 고성 초도해변에서는 자연산 미역을 건져 올리는 사람들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일렁이는 파도를 피해 일년에 한번 봄 미역을 건져 올린다. 북쪽의 차가운 바닷물이 키운 이곳의 미역은 몸값이 제법되고 인기도 높다.
초도해변의 자연산 미역채취
고성바닷가의 또 다른 자랑은 고르메다. 금강산의 눈 녹은 물이 키운다는 바다해초. 미역도 다시마도 김도 아닌것이 바위에 일렁이는 파도가 키운 해초다. 3월과 4월 파도에 잠기는 얕은 바위에서 자란 해초를 뜯어서 돌가루를 털어낸 뒤 김처럼 말린것이 고르메다.
고르메 말리기
금강산 건봉사는 강원도 고성의 대표 얼굴이다. 강원도 동해안에 사는 사람도 멀게만 느끼는 북쪽 끝 고성 건봉사. 지금은 갈수 없는 북녘 땅 금강산의 유서 깊은 사찰. 20년전만 해도 군부대의 사전 허락을 얻어야 갈 수 있던 절이다. 지금도 화진포에서 건봉사로 가는 길목에는 군인들이 신원을 확인하고서야 통과를 허가한다. 군부대를 통과하는 길 정문에 다다르면 소총을 휴대한 초병이 나와 거수경례를 한다.
건봉사 불이문
“어디까지 가십니까. 일행은 몇분이시죠. 성명 말씀해 주세요. 차를 멈추시면 안되고 사진촬영하시면 안됩니다.”
고성은 역시 분단의 상징이다. 길가에 들어선 대전차 장벽과 해안가에 늘어선 철조망. ‘이겨놓고 싸운다’는 군부대가 있다.
건봉사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일주문 근처에는 찬바람속에서도 얼레지가 피고 능파교아래 개울에는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적멸보궁으로 이어지는 연못에는 짝짓기중인 개구리 한 쌍이 인기척에 놀라 물속에 뛰어든다.
건봉사 적멸보궁가는길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만일염불원에 안장된 진신사리를 친견했다. 인간의 욕심은 성불했다는 석가모니사리 마저 훔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왜군이 통도사에 난입,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해 갔다. 1604년 8월 사명대사는 선조왕의 명령으로 일본에 건너가 8개월간 머물면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얻었으며 3000여명의 포로를 데리고 이듬해 4월 귀국했다. 그때 사명대사는 왜군이 탈취한 사리도 되찾았다. 사명대사는 가져온 사리를 통도사에 다시 모셨고, 그 중 12과는 의승군을 일으킨 건봉사 낙서암에 봉안했다.
건봉사 석가모니진신사리
건봉사 부도는 80여기다. 이 가운데 온전하게 남은 것은 60여기이고, 나머지 10여기는 부도비는 없고 받침돌만 남아 있다. 이 부도밭에는 특이하게 ‘생사리탑’이 있다. 이 부도는 살아있는 몸에서 얻은 사리를 안치한 것이다. 만해 한용운이 집필한 ‘건봉사 및 건봉사 말사 사적’에 따르면 1854년부터 10여명의 스님이 3년간 수도하면서 살아있는 몸에서 빼낸 26과의 사리를 안치한 것이다.
건봉사 부도밭
조선시대 4대 사찰에 들 만큼 세력이 강하고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어도 사람의 다툼은 당할 수 없음인가? 석가모니부처가 성불한 이후에 자비를 설하고 그 가르침이 이땅에 온지도 천년의 세월이 더 흘렀음에도 인간의 탐욕은 그치지 않는가. 건봉사 곳곳의 빈터에 서서 웅장한 가람과 골짜기를 가득 메웠을 염불소리를 상상한다.
그리고 이 땅을 침범한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목탁대신 창칼을 들었던 승군들의 고함소리. 60여년전 이 골짜기를 가득 메웠을 포탄 터지는 소리와 총소리, 검붉게 타오르는 화염, 그리고 부상당한 이들의 신음소리. 깨달음을 향한 구도도량이 사람들 탐욕에 의해 지옥으로 변해 향내음 대신 살과 뼈가 타고 화약 냄새만 가득 했으리라.
건봉사 봉서루
겨울을 이겨내고 봄이 오듯이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창건된 건봉사는 몇 번에 걸친 화재와 한국전쟁으로 남김없이 불탔지만 일제 강점초기까지한 해도 31본산의 하나로 백담사와 신흥사를 말사로 거느렸다.
아도화상과 도선국사, 나옹화상, 사명대사, 만해 한용운 등이 이 절의 이름을 널리 알린 고승들이니 한국불교의 역사가 여기 있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승군을 일으켰고, 일본에서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를 찾아 건봉사에 봉안하기도 했다.
건봉사 대웅전
그 후 건봉사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1900년대 초까지 영화로운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 근대사의 아픔이 배어 있는 곳이다. 건봉사는 한국전쟁 때 잿더미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945년 북한의 통치권에 묶이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10일. ‘부처님 오신 날’을 불과 3일 앞두고 재앙을 맞이했다고 한다. 유엔군은 후퇴하던 북한군의 중간집결지였던 건봉사에 무차별 공습을 벌인다. 3~4대의 폭격기는 대웅전 지역의 모든 전각을 불태웠다. 국보 412호 ‘금니화엄경’ 46권과 도금원불, 오동향로, 철장 등 사명대사 유물이 모조리 사라졌다
이 지역은 2년간 처절한 고지전의 현장이었다. 향로봉·건봉산 전투는 물론 북한 쪽의 351고지전투, 월비산 전투 등 전사에 남을 지루한 싸움이 벌어졌다. 1951년 4월부터 휴전 직전까지 16차례의 공방전에서 국군이 쏘아댄 포탄만 10만발에, 미 7함대 함포사격과 공군기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건봉사 적멸보공앞 빈터
국군 수도사단을 시작으로 이곳에 교차 투입된 국군 부대가 7개 사단에 이르고, 그때마다 이곳에 주둔하던 국군에 의해 건봉사의 남아 있던 전각과 요사채는 군부대 막사와 땔감으로 헐려 나갔단다. 휴전 후에는 주둔한 군부대의 실화로 낙서암 지역이 소실되는가 하면 고승들의 부도탑이 밀반출되고 그 많았던 중요 문화재들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1954년 이후에는 불이문 외에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 헐벗고 잡초만 우거진 빈 터가 되어버렸다. 전쟁 직전 640칸 규모의 건봉사가 사라진 것이다. 사람들의 다툼으로 인한 전쟁이 1500년 역사를 지켜온 문화재를 한 순간에 날려 버린 것이다.
적멸보국에서 바라본 대웅전
인간의 끊이지 않는 탐욕으로 1986년 6월 13일 적멸보궁의 치아사리를 훔쳐갔으나 모든 도굴꾼들의 꿈에 부처님이 매일같이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었다. 7월14일 일당 중 주범이 공범을 시켜 서울의 한 호텔에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났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가지고 달아나는 바람에 증발되고 말았다. 건봉사 측은 결국 되찾은 8과 가운데 3과는 적멸보궁 석탑에, 나머지 5과는 만일염불원에 봉안하여 불자들의 친견을 허락하고 있다.
건봉사는 눈여겨볼 만한 것이 많다. 적멸보궁과 대웅전을 나누는 계곡 위에는 홍교 양식의 능파교가 걸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솟대의 머리에는 돌로 새긴 오리가 앉아 있다. 또 능파교 양켠에 있는, 수행의 과정을 나타내는 십바라밀을 새긴 석주 또한 건봉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부도밭 앞의 사명대사 동상
건봉사를 돌아 나오는 길에 화두 하나를 챙겼다. ‘그러함에도’ 모든 인간이 욕심에 따라 남을 이기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 하는데 ‘그러함에도’ 부처는 왜 가르침을 폈을까?
건봉사에 수 많은 참배객들이 찾아와 예를 올리고 수행함은 발징화상에 의해서 만일염불회사 창시되고 31인이 승천한 등공탑이 현존하는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죽어서 가는 극락이 아니라 살아서 지은 선한 공덕과 염불기도로 성불하는 곳.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고 외적의 침입에 맞서 싸우면서도 염불 수행을 멈추지 않았던 곳. 생사리가 나올 정도로 치열하게 수행하면서 찾고자 했던 ‘진리’는 무엇이었을까?
겨울바다펜션 에서 내려다 보이는 초도해변의 밤풍경
날이 저물어 대진항 근처의 초도해변 겨울바다펜션에 숙소를 정했다. 잠자리에서 바다위로 솟아오르는 해와 달을 볼 수 있단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해변에 가로등이 켜지고 무장을 한 초병이 해안경계근무를 위해 철책을 따라 이동하는 모습이 보인다. 모래사장 위로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방안에까지 들린다.
최원석기자 ilyo03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