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용돌이치는 정국을 보며
김원태 선임기자
치열하게 전개되는 이 전투 장면에서 제갈공명이 사망하고 촉나라 군사들이 후퇴를 하자 위나라의 사마중달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뒤 공격을 개시했다.
그런데 아뿔사 죽은 줄 알았던 제갈공명이 산 정상에서 진격하는 자신의 군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아닌가.
사마중달은 제갈공명이 마지막 계책으로 미리 준비해 둔 공명의 목상(木像)인 줄 모른 채 제갈공명이 아직 살아있는 줄 알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쳤다.
나무로 만든 죽은 제갈공명의 목상이 살아 있는 사마중달을 이겼다는 결과다.
우상을 만든 목적은 그 대상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술수의 하나다.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자기들이 상상하는 신의 모습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고 숭배하기도 했다.
눈으로 보면서 신을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며 자신의 선망대상을 예배하고자 우상을 만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각 종교가 지향하는 대상물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인 우상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죽어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사마중달이 죽은 제갈공명을 두려워했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아니 평소 제갈공명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컷으면 그토록 많은 군사를 이끌고 갔으면서도 겁을 먹고 퇴각했을까?
산 사람들이 죽은 사람을 두려워한다?
요즘 정가를 요동치게하는 정국현상에 대한 비유 중 하나다.
산 사람이 아니라 죽은 사람이 국민들의 정국판단 가름새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망자(亡者)가 그동안 누적되어 왔던 병폐의 하나인 대한민국 정치 발전을 위한 망자(望者)의 역할을 하고 있는 특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더구나 망자가 남긴 각종 자료 등에 뜻에 따라 이뤄지는 검무(檢舞)의 춤사위는 그 방향이나 끝을 예측하기도 어렵다.
부정부패 일소를 정국타개의 전환점을 삼으려는 현 정부의 재상은 취임하자마자 천군만마를 얻어 말갈기를 휘날리며 장비의 큰 칼날을 갈았것만 이것이 오히려 비수(匕首)가 되어 돌아 올지 아무도 몰랐다.
비수를 막아줄 방패도 없이 사면초가의 지경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런데 동정심은 고사하고 당사자들은 잠 못이르는 나날이 될 지는 몰라도 국민들과 여론은 따가운 시선을 보내면서 그 추이를 즐겁게 지켜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기회에 갑질 논란을 비롯 자기들만의 리그전으로 온갖 병폐가 쌓여 적폐가 돼버린 정치꾼들에 의한 대한민국의 정치가 한 걸음 발전 좀 되려나 하는 실날같은 기대감 때문이다.
여는 물론 이거니와 야 측의 인사도 망자가 남긴 접촉 자료 등에 담겨 있다는 말들이 흘러 나오면서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 뚜껑보고 놀란다’라는 속담처럼 ‘혹시나 내 이름이?’ 하며 겉으로는 부인하면서도 서로 확인하기도 바쁜 표정도 읽혀지고 있다.
망자의 접촉 대상자들이 정치권에 광범위하다는 ‘카더라’ 통신까지 나오면서 야측에서는 재 보선을 앞두고 여권이 불리하니까 야당을 끌어 들이려는 물귀신 작전, 물타기 수사의 전주곡이라는 볼멘소리도 하고 있다.
좋은 뜻에서 보면 망자의 살아생전 여야를 넘나들며 인맥관리를 해 왔다는 징표이겠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산자의 목줄을 죄는 저승사자의 살생부 역할을 할 줄 어떻게 알았으리요.
그토록 정경분리를 원칙으로 삼아라 했것만 우리나라 기업 풍토 속에서 비춰볼 때 이런 원칙은 ‘글쎄올시다’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런 풍토 속에서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과연 얼마나 자유스러울까?
재보궐선거 일자를 앞두고 후보자들과 선거운동원만 바쁘게 움직일뿐 정작 유권자들의 표심은 자기들만의 리그라는 정치 혐오 증에 사로잡혀 별로 관심이 없다는 표정들이다.
고 성완종 경남기업회장과 관련된 일련의 사태등을 보면 죽은 공명이 살아있는 사마중달을 물리쳤다는 고사성어가 딱맞는 요즘이다.
정치는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했다. 따라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움직여야 하는데 죽은 자가 정치판을 요동치게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갑갑할 뿐이다.
‘산자여 따르라’가 아니라 ‘산자들이여 조심하라’는 망자의 외침소리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요즘이다.
김원태 기자 ilyo2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