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우리만 당할 순 없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지난 3일 분식회계 등의 혐의로 서울 서초동 중앙지검에 출석하기에 앞서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박근혜 대통령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성완종 전 회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연일 새로운 의혹이 불거졌어도 꿈쩍 않던 박 대통령이 해외 순방 전날인 4월 15일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1주기 관련 현안점검회의 석상에서 “부정부패에 책임이 있는 사람은 누구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국민도 그런 사람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이번 기회에 과거부터 현재까지 문제가 있는 부분은 정치개혁 차원에서 완전히 밝힐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고 밝혔다
정치권에선 박 대통령 발언에 담긴 뉘앙스를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주문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중진 의원은 “‘누구도’와 ‘과거부터’란 단어가 의미심장하다. 이는 수사 범위가 단지 현 정권 실세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란 말 아니냐. 현 정권이 이번 사태를 물타기식으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야당도 2012년 대선자금을 조사 받으라’고 한 것에 대해 새정치연합은 ‘물귀신 작전’이라며 일축했지만 실제로는 여권 핵심부의 이러한 기류가 담겨있을 것이란 관측이다.
사실 특별수사팀 출범을 두고 친박 내에서도 견해가 엇갈렸다고 한다. 한 친박 재선 의원은 “특별수사팀 설치 반대 의견을 (청와대에) 전했다. 박 대통령 대선 자금까지 건드릴 경우 바로 ‘레임덕’으로 가는 거다. 검찰로서는 수사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특검으로 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실적을 내려 할 것이다. 지금 검찰 내엔 ‘정권 하명 수사 하다가 자존심만 구겼다’는 말이 파다하다. 검찰 컨트롤이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라고 귀띔했다. 친박 일각에선 수사선상에 오른 친박 인사들 중에서 ‘제2의 성완종’이 나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정공법을 택했다. 의혹이 갈수록 커지고 있고 진상 규명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높은 상황에서 이를 덮으려 할 경우 오히려 그 역풍이 더 셀 것이란 판단에서다. 청와대 정무라인 관계자는 “곤혹스러운 게 사실이다. 일부 인사들 비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면 사법처리가 불가피할 것이고 박 대통령 역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지금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지 않느냐. 차라리 매를 빨리 맞는 게 낫다고 봤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선 청와대의 이러한 대응엔 핵심 당사자인 성 전 회장이 사망하면서 혐의 입증이 쉽지 않을 수 있다는 기대가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특히 청와대는 야권이 박 대통령 대선자금을 거론하는 것에 대해서 불쾌감을 숨기지 않고 있다. 성 전 회장이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조직총괄본부장을 맡았던 홍문종 전 의원에게 대선자금으로 쓰라며 2억 원을 건넸다고 폭로한 게 단초가 됐다. 이에 대해 홍 의원은 “1원도 받은 일이 없다”며 강하게 부인하고 나섰다. 박 대통령 최측근 원로 인사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대선자금에 문제가 있다는 게 드러나면 임기 3년차인 박 대통령은 국정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쯤 되면 박 대통령도 물러날 수 없는 것 아니냐”면서 “특별수사팀이 박 대통령 대선자금까지 건드리긴 힘들 것으로 본다. 친박이 성 전 회장을 겨누다 부메랑을 맞았는데, 수사 과정에서 그 부메랑이 또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무일 특별수사팀장은 4월 13일 성 전 회장과 무관한 2012년 대선자금과 2011년 경선자금도 수사하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수사 대상·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좌고우면(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곁눈질함) 없이 수사 논리에 따라 수사하겠다”면서 “(성 전 회장) 메모지에 없다고 해서 수사대상이 아니라고 하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두고 ‘판도라 상자’가 열리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지만 서초동 주변에선 수사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성완종 리스트’ 8인 이외에 당초 검찰이 타깃으로 했던 지난 정권 인사들이 또 다시 사정권에 드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흘러나왔다.
‘성완종 사태’ 등 최근 정국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 16일 비공개 단독 회동을 가졌다. 사진제공=청와대
특별수사팀은 성 전 회장이 지난 2006년부터 계열사 대여 등을 통해 조성한 250억 원가량의 비자금 용처에 대해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특히 수사팀은 본사에서 건설 현장에 보내는 전도금 32억 원의 흐름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으로 전해진다. 전도금은 전액 현금으로 오가는 특성상 손쉽게 비자금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다. 성 전 회장이 홍준표 경남도지사에게 건넸다고 폭로한 1억 원 출처 역시 전도금이었다. 서울중앙지검 고위 관계자는 “32억 원은 중앙지검 특수 1부에서도 추적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홍준표 지사 관련 진술도 나왔던 게 사실”이라면서 “자료를 모두 특별수사팀에 넘겼다”고 전했다.
또 특별수사팀은 성 전 회장이 검찰 수사를 앞두고 측근들과 가진 대책 회의 녹취록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향신문>에서 보도한 성 전 회장 인터뷰와는 별개다. 성 전 회장 금고지기로 알려진 한 아무개 전 경남기업 부사장이 제출한 것이다. 이 녹음 파일엔 8인 이외에 또 다른 정치권 인사들 이름이 거론된 것으로 전해져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앞서의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현재 분석 중이라 구체적으로 말할 단계는 아니다”라면서 “여권뿐 아니라 야권 쪽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대책회의 당시 성 전 회장은 돈을 건넸던 정치인들 중 폭로할 대상을 일일이 언급하며 얼마의 돈을 건넸는지 덧붙였다고 한다. 궁지에 몰린 성 전 회장의 마지막 ‘히든카드’였던 셈이다. 알려진 바와 달리 성 전 회장은 평소 자신의 행적이나 은밀한 돈 거래 등을 기록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성 전 회장과 절친한 후배 사업가 역시 “증거를 남겨두는 분은 아니었다. 그런데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뒤늦게 (장부나 비망록 등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처음엔 폭로보다 ‘딜’을 위한 용도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성 전 회장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시점이다. 2006~2013년은 노무현·이명박 정권까지도 아우르는 시기다. 여야를 넘나드는 ‘마당발’이었던 성 전 회장 수사 결과에 따라 지난 정권 역시 불똥을 피해가기 어려울 것으로 점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미 새누리당은 성 전 회장이 노무현 정권 때 두 차례나 특별사면을 받았다는 것을 끄집어 내 당시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새정치연합 대표를 향해 공세를 가하고 있다. 성 전 회장 파문 이후 청와대와 박 대통령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새누리당 친이계 의원들 중에서도 성 전 회장과 가깝게 지냈던 인사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법적인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여야 간 또는 여권 주류·비주류 간 정치적 공방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점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권 핵심부 일각에서도 성 전 회장 수사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긴 하겠지만 ‘반전’이 나올 수 있다는 속내가 읽히고 있다. 앞서의 박 대통령 최측근 원로 인사는 “문무일 특별수사팀장은 지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팀에 파견돼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을 구속시킨 이력이 있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 출혈을 각오해야 할 것으로 본다”면서 “다만, 그럴 경우 현 정부로선 지난 정권 사정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덜 수 있다. 팔 하나는 내주더라도 대어를 잡으면 상쇄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노무현 정권은 시기적으로 힘들겠지만 지난 정권에선 이명박 전 대통령을 포함해 비리가 드러나면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2003년 대선자금 수사 비교해보니 노통은 ‘노터치’ 박 대통령은요? 검찰이 현직 대통령에 대한 대선자금을 겨눈 것은 지난 2003년 이후 12년 만이다. 당시 대검찰청 중수부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최측근 안희정 현 충남도지사가 대선자금 명목으로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이로 인해 실세 중 실세라던 안 지사는 수감 생활을 해야만 했다. 당시 중수부장으로서 수사를 지휘했던 검사는 안대희 전 대법관이었다. 안 전 대법관은 대기업 비자금 수사에 이어 살아있는 권력까지 파헤치면서 ‘국민 검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검사로서는 이례적으로 팬클럽이 생길 정도였다. 안 전 대법관은 2003년 8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대기업 총수들을 소환했고, 여야 정치인 40여 명을 기소했다. 그런데 안 전 대법관은 지난 2012년 박근혜 캠프에 합류해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정치개혁 공약을 주도했다. 지난해엔 총리 후보자로 내정됐지만 전관예우에 발목이 잡혀 중도하차하기도 했다. 새누리당의 한 친박 의원은 사석에서 “지난 2003년 대선자금 수사를 이끌었던 안 전 대법관으로선 자신이 기여했던 박근혜 정권이 대선자금 논란에 휘말린 현실이 씁쓸하게만 다가올 듯하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도 일단 표면적으로는 성역 없는 수사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힘들어 보인다. 지난 2003년 때 수사와는 여러 측면에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검찰과 여권 간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노 전 대통령과 검찰은 인사 문제 등을 놓고 불협화음을 냈다. 노 전 대통령 스스로도 검찰 독립을 강조하며 수사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검찰 입장에서는 여권 실세라고 하더라도 부담감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출범 이후 검찰 컨트롤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게 중론이다. 국정원 댓글사건, 정윤회 문건유출 사건 등에서 검찰은 권력의 눈치를 봤다는 비난을 들어야 했다. 더군다나 ‘성완종 게이트’의 경우 지난 2003년 때와는 다르게 여권 실세에게로 그 타깃이 집중돼 있다. 결국 특별수사팀 성패는 청와대가 얼마나 독립성을 보장해주느냐에 따라 달려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