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멀고 날은 저물고…아 옛날이여!
태광그룹이 안팎으로 발생한 악재로 인해 위기설이 돌고 있다. 2011년 1월 21일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이 비자금 조성 혐의 등으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마포구 서부지검으로 들어서는 모습. 일요신문 DB
검찰은 ‘성완종 리스트’에 대해 특별수사팀(팀장 문무일 대전지검장)을 꾸려 수사를 진행하는 한편 자원외교 비리를 중심으로 대기업 수사를 계속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진태 검찰총장은 지난 10일 “수사 과정에서 (성완종 전 회장 자살 등) 불행한 일이 발생한 것은 안타깝지만 자원개발 비리 등 현재 진행 중인 부정부패 수사를 계속해 진실을 제대로 밝히기 바란다”며 검찰을 독려했다. ‘성완종 리스트’에 대한 특별수사팀을 꾸린 것도 대기업 수사를 멈추지 않겠다는 방증 중 하나로 해석되고 있다.
대기업 수사는 포스코건설 압수수색을 실시했던 지난 3월부터 제기된 바다. 이와 관련해 검찰 주변에서 포스코 다음으로 SK그룹, 동국제강 등이 타깃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흘러나왔다. 실제로 검찰은 동국제강 본사와 계열사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이면서 비자금 조성 의혹 수사를 벌이고 있다.
그런데 최근 재계 일부에서 태광그룹이 검찰 수사선상에 오를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태광그룹은 당초 검찰 수사 대상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기업이다. 그러나 검찰이 자원외교 비리를 넘어 대기업의 부정부패로 수사 범위를 넓힐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급부상했다. 가뜩이나 이호진 전 회장 등 총수와 오너 일가가 부재하고 실적이 부진한 상황에서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다면 더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태광그룹 위기설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 중구 장충동에 위치한 태광그룹 본사. 일요신문 DB
태광그룹은 현재 그룹을 지휘했던 이호진 전 회장과 그룹 내에서 실세로 알려져 있던 이 전 회장의 어머니 이선애 전 상무가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다. 이 전 회장과 이 전 상무는 지난 2011년 비자금 조성, 횡령·배임 혐의로 각각 징역 4년 6개월,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심과 2심 모두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이 전 상무는 상고를 포기한 반면 이 전 회장은 상고, 대법원 확정판결을 남겨두고 있다. 이 전 회장은 지난 2012년 그룹 회장직은 물론 주요 계열사 대표이사·등기임원직에서 모두 물러났다.
공교롭게도 이 전 회장과 이 전 상무는 모두 건강이 악화돼 있다. 이 전 회장은 간암 판정으로 수감 63일 만에 병보석 나와 현재 치료 중이며 간이식수술 대기 중이다. 올해 87세로 고령인 이 전 상무 역시 뇌경색, 치매, 관상동맥 협착증 등을 앓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 7월 3개월, 10월 6개월에 이어 지난 7일 또 다시 형 집행정지 기간을 연장했다. 이 전 회장과 이 전 상무 모두 형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해 가석방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 전 회장이 비록 석방되거나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 해도 경영 복귀가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만큼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수년 전부터 태광그룹 내부 직원들조차 이 전 회장의 건강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현재 태광그룹은 심재혁 부회장이 이끌고 있다. 심 부회장은 2012년 이 전 회장이 회장직을 포함해 그룹 경영상 모든 직책에서 물러난 뒤 영입한 인물로 이 전 회장의 처외삼촌으로 알려져 있다. 그룹 경영을 심 부회장에게 맡긴 까닭은 이 전 회장과 이 전 상무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태광그룹 경영진에 오너 일가가 전무하다시피 한 상태에서 선택한 궁여지책으로도 풀이된다. 태광그룹 관계자는 “심 부회장을 제외하고 그룹 경영이나 계열사 경영진에 오너 일가는 한 명도 없다”고 전했다.
심 부회장 체제의 태광그룹은 공격적 경영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재계 일각에서 심 부회장이 ‘관리형’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유다. 오래전부터 가뜩이나 ‘은둔의 경영’으로 소문나 있던 태광그룹이 총수와 실세가 물러나자 더욱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태광그룹은 공격적인 인수합병(M&A)으로 덩치를 키워 재계 35위권까지 올라간 기업이다. 창업주인 고 이임용 회장이 1954년 태광산업사를 설립한 후 1970년대 동양화섬·흥국생명·대한화섬·고려저축은행 등을 인수하며 몸집을 키웠다. 이호진 전 회장이 그룹을 이어받은 이후 2003년 한빛방송 인수하고 2006년에는 흥국화재(옛 쌍용화재)·흥국증권(옛 피데스증권)·예가람저축은행 등을 인수하며 방송업과 금융업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의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자료에 따르면 태광그룹 계열사는 32개(비금융 25개, 금융 7개)다. 섬유업으로 시작해 패션, 건설, 방송, 금융 등 사업영역을 넓히고 다각화한 데는 과감한 M&A가 큰 원동력이었다.
그렇지만 이 전 회장 등 오너 일가가 경영에서 물러난 뒤에는 M&A 시장에서 태광그룹의 이름을 찾아보기 힘들다. 태광그룹은 최근 매물로 나온 국내 3위 종합유선방송사업자인 씨앤엠(C&M) 인수 작업을 준비했지만 이마저도 탈락했다. 재계 관계자는 “오너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사업을 추진하고 투자를 결정하는 데 대단히 큰 차이가 난다”며 “오너 부재 상태에 있는 SK와 CJ 등도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실적이 좋은 것도 아니다. 태광산업은 지난 2012년 11년 만에 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지난해에도 적자를 기록했다. 총수 부재 기간 중 계속 적자를 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태광산업의 개별 실적을 보면 325억 원의 영업 적자를 기록했다. 당기순손실은 3억 2900만 원. 창사 이래 적자를 기록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총수와 오너 일가가 없는 지난 3년간 태광산업의 실적 부진은 단순히 섬유·화학업종의 침체 탓으로만 돌리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2011년 1월 12일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의 어머니 이선애 상무가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서울 서부지검에 소환되고 있다. 일요신문 DB
이 같은 상황에서 내부 문제마저 구설에 오르내리고 있다. 우선 이 전 회장이 형제간 상속 분쟁에 휘말려 있는 상태다. 이 전 회장 본인의 횡령·배임 혐의와 별개로 차명재산과 관련해 누나, 이복형과 소송전을 벌이고 있다.
법원이 이 전 회장의 이복형 이 아무개 씨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태광그룹 차명재산을 둘러싼 형제간 분쟁은 시끄러울 전망이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이승택 부장판사)는 지난 2월 5일 이 전 회장의 이복형 이 씨가 중부세무서장을 상대로 낸 정보 비공개 결정 취소 소송에서 “해당 정보는 납세 의무에 관련된 것으로 원고의 권리 행사에 필요한 정보며 비공개 처분은 위법하다”며 “중부세무서는 2008년 상속세 부과 근거로 삼았던 자료 일체를 공개하라”고 했다. 이로써 이 씨가 이 전 회장 등을 상대로 상속 소송의 청구 취지를 확장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 전 회장의 누나 이재훈 씨도 지난해 이미 이 전 회장을 상대로 차명재산에 대한 주식인도 소송을 제기해놓은 상태다.
이 전 회장의 측근과 관련한 태광그룹 내부 문제·갈등이 재계로 흘러나오고 있는 것도 문제다. 재계 일부에서는 이 전 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임원이 그룹 내에서 전횡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는 얘기가 파다하다. 태광그룹 관계자는 “그런 얘기가 돌고 있는 것은 알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며 “그룹이 어려운 상황에서 내부 갈등과 특정 인물의 전횡이 벌이질 수 없다”고 부인했다.
태광그룹은 그동안 비자금 조성, 로비, 일감몰아주기 등으로 말썽이 잦았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재계에서도 베일에 싸여 있는 것으로 유명한 기업이라 구설에 자주 오르는 듯하다”며 “검찰이 당장 관심을 모을 것으로 뭐 하나 터뜨려야 할 입장인데, 오너 일가가 자리를 비운 태광그룹이 타깃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후계 승계작업은? 외아들 앞으로 하나씩 하나씩 태광그룹은 이호진 전 회장이 2012년 6월 경영에서 물러난 후부터 후계 승계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해왔다. 그러나 현준 씨 나이는 이제 겨우 21세에다 경영수업조차 받지 않은 상태다. 태광그룹에 따르면 현재 대학생으로 미국 유학 중이다. 더 늦어진다면 자칫 후계 승계 작업을 제대로 해놓지도 않은 상황에서 그룹의 구심점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태광그룹이 오너 일가가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도 후계 승계 작업만큼은 착실히 진행한 이유다. 태광그룹의 주력은 모태기업인 태광산업이다. 이 전 회장은 흥국생명보험 56.3%, 흥국증권 68.75%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태광산업 지분은 15.14%, 대한화섬 지분은 15.39%에 그친다. 이러한 약점을 그룹 지배구조상 가장 위에 있는 티시스를 통해 보완하고 있다. 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인 티시스는 이 전 회장과 외아들 현준 씨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2013년 5월 티시스·동림관광개발·티알엠, 3개사가 합병해 통합법인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3개사 모두 이 전 회장 가족회사인 데다 일감 몰아주기로 대폭 성장한 회사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합병은 일감 몰아주기 규제도 피하면서 동시에 현준 씨의 그룹 지배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풀이되고 있다. 합병 후 현준 씨의 티시스 지분은 44.62%가 됐다. 현준 씨는 또 한국도서보급 지분 49%를 보유하고 있다. 태광그룹 오너 일가의 가족회사로 분류되는 티시스와 한국도서보급은 태광산업, 대한화섬 등 그룹 주력 계열사들에 대한 지분율이 꽤 높다. 현준 씨는 그룹 주력 회사인 태광산업 지분은 없지만 티시스와 한국도서보급 지분을 이용해 이를 만회한 것이다. 태광그룹은 또 지난 16일 공시를 통해 티브로드·티브로드한빛방송·큐릭스홀딩스·티브로드도봉강북방송·티브로드서해방송의 합병을 발표했다. 티브로드홀딩스의 상장을 위한 몸집 불리기로 해석되는 이들의 합병은 이미 지난해 말부터 구체화된 것. 티브로드홀딩스의 최대주주는 태광산업으로서 53.02%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밖에 이 전 회장이 11.23%, 현준 씨가 7.37%, 태광관광개발이 7.26% 등 태광그룹 오너 일가와 관계사들이 79%가 넘는 지분을 갖고 있다. 티브로드홀딩스가 상장되면 이 전 회장과 현준 씨가 막대한 이익을 보는 것은 물론 ‘티시스-태광산업-티브로드홀딩스’ 등으로 연결되는 그룹 지배구조에서 현준 씨로의 후계 승계 작업 역시 얼추 마무리되는 셈이다. 태광그룹 관계자는 “지분구조상으로는 후계 승계 작업이 일단락된 듯 보이겠지만 지금은 그보다 주력 계열사들의 영업 실적을 개선하는 게 우선이다”라며 “심재혁 부회장을 중심으로 그룹이 탄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