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 친박이란 말, 하지도 말아요”
‘성완종 리스트’ 파문 직후인 4월 13일, 친박계 의원들의 모임 ‘국가경쟁력강화포럼’이 ‘노동시장 구조개선’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가졌다. 연말 이후 4개월여 만의 모임이었지만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행사가 진행됐다. 연합뉴스
최근 여권에서는 자칭해서 ‘친박’이라고 말하는 수가 확 줄었거나 언급되길 극도로 꺼리고 있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 직후, 친박계 의원들의 모임 ‘국가경쟁력강화포럼’이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었다. 30여명 참석했는데 일부는 자리를 금세 떴다. 지난해 말 대규모 송년 모임 이후 4개월여 만이었지만 공기는 차가웠고 대화는 없었다. 연말 김무성 대표를 강하게 성토하며 친박의 결집을 도모하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참석한 3선 의원은 성완종 사건에 대해 혹 무슨 말이라도 나왔는지 묻자 “우리가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습니까”라고만 했다. 친박계 핵심들이 성완종 리스트에 대거 포함된 마당에 “지금은 엎드려야 할 시기”임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윤상현 총괄 간사는 “포럼이 박근혜 정부의 성공과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는 정책 포럼으로서 의원들의 역량과 지혜를 모으는 구심체가 되겠다”고 강조했다. 반응은 뜨겁지 않았다는 전언이다.
친박계 울타리 내에선 고인이 된 성완종 전 회장의 ‘리스트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렵겠다는 침울함이 퍼져 있다. 걸려든 이가 많아도 너무 많다는 얘기다. 사건이 조기에 완료될 가능성이 낮다는 위기감이다. 친박의 간판 같았던 이완구 국무총리의 말 바꾸기 행태에 한 의원 보좌관은 “친박의 특성이 하나 더 늘었다. 거짓말을 잘 한다는 것”이라고 쓴소리를 했다.
여권의 고위 관계자는 현 정국과 친박계의 미래에 대해 “사실 친노도 해체됐던 계파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한 뒤 재결집한 케이스”라며 “그에 준하는 중요한 사건이 아니면 친박의 재건은 어렵다”고 진단했다. 형 노건평 씨의 여러 이권 개입이 드러나면서 친노가 등을 돌렸지만 ‘노무현 향수’를 불러온 그 사건으로 지금도 당내 큰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 관계자는 “그에 준하는 사건이라 함은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라고 했다.
친박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목소리를 종합해보면 이렇다. 하나는 꼬리 자르기 후 쇄신 정국이 와야 한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중남미 순방 직후 돌아와 국민에게 던질 메시지에 이 내용이 포함돼 있어야 한다는 게 당내 일각의 주장이다. 정가의 한 소식통은 “대통령의 스탠스가 친박의 미래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 친박이 살기 위해선 국민에게 진정성 있게 사과하고 측근들의 잘못에 용서를 구한 뒤 철저한 수사로 리스트에 거론된 인사들의 심판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면 검찰 수사도 쉬워진다. 주도권을 김무성 대표도, 유승민 원내대표도 아닌 박 대통령이 쥐고 갈 수 있다는 논리다. 하지만 구속의 위기감을 느낀 당사자들의 폭로가 이어지고 너도 죽자고 덤빌 경우엔 여권이 붕괴될 위험도 크다.
다른 하나는 재 세력화다. 작금의 위기를 두고 일각에선 친박의 구심점이 없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서청원 최고위원이 있지만 당 회의에도 간헐적으로 참석하면서 일종의 태업을 이어가고 있다. 다선 의원은 무게감에서 김 대표나 유 원내대표에게 밀리고, 핵심 인사들은 모두 여의도 밖으로 나가 있다. 청와대 정무특보인 윤상현 김재원 의원은 당내에서 존재감이 없다. 이에 여권 사정에 밝은 정가 인사는 “최경환(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복귀가 시급하다”고 했다. 최 부총리 본인도 돈을 풀어서 내수를 진작하는 초이노믹스에 대한 평가가 지금처럼 다소 우호적일 때 여의도로 돌아와 20대 총선을 준비하고 싶다는 뜻을 몇몇 사석에서 피력한다는 후문이다.
하지만 다수는 친박의 미래를 두고 “어떻게 갈아타느냐에 있다”고 했다. 이것이 현 친박의 대체적 분위기다. 친이 등 비주류 다수는 김 대표 쪽이고, 당내 쇄신소장파 일부는 유 원내대표와 가깝게 붙어 있다. 최근 국가경쟁력강화포럼에 참석한 친박 다수도 ‘주박야김’ ‘주박야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대통령 덕에 공천은 받았지만 박 대통령 편에 서서 싸워본 적 없는 비례대표를 포함한 초선 의원들은 향후 공천 정국에서 힘 있을 자에게 줄을 설 것이라 입을 모았다.
친박은 현재 대통령의 지지율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윤회 문건 파동 이후 좀처럼 50% 이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 사건사고만 생기면 30%로 추락하는 탄탄하지 못한 지지율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선 대선에서 80% 투표에 80% 지지를 보였던 TK에서 40%만이 국정운영에 지지를 보낸 것으로 나타났다. 여권의 영원한 텃밭 같아 보였던 TK의 절반이 등을 돌린 셈이다. 이를 두고 TK의 중진 의원은 “측근을 쳐 낼수록 지지율이 올라간다는 것을 누군가 말해줘야 한다”고 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 한다는 소리다. 그는 “결국 정윤회 문건 파동에서 박 대통령은 3인방(정호성 이재만 안봉근)도, 십상시도 내치지 않았다. 김기춘(전 비서질장)을 빼고 이병기(비서실장)를 넣는 것으로 일종의 ‘쇼부’를 본 셈”이라며 “그래서 바뀐 게 있는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선 정치적으로 고민을 좀 해야겠지만 ‘내 사람’ ‘내 편’을 잘라 피를 보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특검을 천명하고, 불구속이 아닌 구속 수사로 국민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는 얘기였다. 또 이완구 총리가 외쳤던 ‘부패와의 전면전’을 다시 강조하는 한편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공무원연금 개혁을 실현해내야 한다는 주문도 뒤따랐다. 일각에선 기존의 용인 스타일을 완전히 버리고 야권에서 국무총리를 찾아 대탕평을 이뤄낸다면 큰 수술자국 없이 회생을 주도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성완종 게이트의 여파로 지금 정치권에선 ‘주변정리’가 한창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한 초선 의원은 “선배들과 이야기하다보니 사건이 생겼을 때 고민 말고 미리미리 준비해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서 생긴 일종의 학습효과로, 통화내역, 하이패스와 내비게이션 기록, 녹음과 녹취, 각종 메모, 장부, 수첩 등등에 대한 관리를 시작해야겠다는 뜻이었다. 이 초선 의원은 “지금도 많은 선배들이 친인척을 수행비서로, 보좌관으로 쓰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다”며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운전기사의 입’이었다”고 했다. 주변부를 ‘믿을맨’으로 다 바꾸겠다는 것이다.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될 것을, 나쁜 짓을 고발하지 않을 사람으로 채우겠다는 풍토가 실소를 자아내고 있다.
이정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