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홈쇼핑 업체의 방송 모습. 화려해 보이는 쇼핑호스트들은 실제론 제품에 대한 공부와 토론 등으로 치열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 ||
우리홈쇼핑에서 쇼핑호스트로 활동 중인 유그리나씨의 지난 12일 출근 시간은 오후 1시. 이날 유씨의 방송은 밤 12시30분에 시작하는 막방(마지막 방송)으로 방송 시간 세 시간 전에 출근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날 따라 회의가 많아 출근 시간이 빨라졌다.
업체 관계자들과의 ‘상품 전략회의’, MD, PD와 함께 하는 ‘프로그램 전략회의’, 신상품을 들고 온 업체 관계자와의 ‘사전미팅’까지 모두 세 건의 회의를 참석한 유씨는 매주 열리는 ‘쇼핑호스트 모임’에 참석한다.
“32명의 소속 쇼핑호스트들이 매주 한 번씩 모여 전체 회의를 갖는다. 모임에서는 시장보고서를 중심으로 토론하고 다음 주 전략도 짜고 마지막으로 독서토론회를 한다”는 유씨는 “전문 지식을 쌓기 위해 매주 독서토론회를 여는 데 이번 주에는 팀워크 관련 책을 갖고 토론했다”고 말한다.
저녁 식사 후 분장 등 본격적인 방송 준비가 시작된다. 방송시작 한 시간 전에 열리는 최종 회의에서 동선을 확인하는 것으로 준비 완료. 밤 12시30분에 시작된 방송은 새벽 2시에 마무리된다. 마지막 정리까지 끝난 뒤 최종 퇴근 시간은 새벽 3시 반. 방송이 끝난 뒤 매출이 예상외로 적었던 제품에 대한 사후 미팅을 갖고 이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기 때문에 퇴근이 1시간 넘게 늦어진 것이다.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방송이 없어도 회의나 미팅 때문에 쉬는 날에도 출근하는 경우가 대부분. 유씨는 방송 외에도 쇼핑호스트가 해야 할 일이 엄청나다고 얘기한다. “시장 보고서를 논문 형식으로 매주 제출해야 되고 주·월간 기획서까지 작성해야 한다”는 유씨는 “상품에 따라 취득해야 하는 자격증도 넘쳐나고 회사가 정한 토익 점수를 따기 위해 틈틈이 영어 공부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 억대 연봉 유난희 | ||
지난 15일 현대홈쇼핑의 <클럽 노블레스> 1백회 기념 특집 방송을 진행한 쇼핑 호스트 유난희씨. 의사 남편을 둔 쌍둥이 엄마인 유씨는 쇼핑호스트 최초로 억대 연봉을 돌파한 업계 최고의 스타다. 39쇼핑, LG홈쇼핑, 우리홈쇼핑 등을 두루 거치며 최고의 자리를 유지해온 그는 여성지 등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대학 강단에 설 만큼 유명인사로 부상했다. 현대홈쇼핑 홍보실의 김주환 대리는 “유난희씨가 진행한 프로그램이 일반 프로그램의 세 배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했다”면서 “한 회 매출 실적이 15억원으로 고가의 무형상품(이민, 해외인턴십)을 제외할 경우 단일 방송 기준 최대 매출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유씨가 이렇게 높은 시청률을 얻는 이유는 고가의 명품에 대한 대리만족을 시청자들에게 제공하기 때문. 단순히 명품 브랜드의 제품을 판매하는 방식이 아닌 그 제품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제공하는 풍부한 정보 제공에 시청자들이 열광한다. 또한 유씨의 신뢰감 있는 평소 이미지가 구매로 연결되는 것이다.
유씨는 방송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의 대부분을 백화점과 시장 등 살아있는 유통의 현장에서 보낸다. “유통의 흐름 변화는 정말 빠르다”는 그는 “시청자들의 유행 추세가 매시간 변해가기 때문에 이를 챙기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한다.
‘노블레스’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유씨의 전문 분야는 단연 해외 명품 브랜드. 이를 위해 유씨는 주기적으로 외국 명품 투어를 떠난다. 자기 시간을 쪼개서 비용도 모두 본인 부담으로 투어를 떠나는데 목적은 외국 명품 브랜드 유행 동향 취재. 뿐만 아니라 인기 제품들의 제작·판매 과정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확보해야 한다. 이렇게 확보된 정보는 곧 방송을 통해 전달되어 시청자들의 채널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가수 김진표의 부인으로 잘 알려진 현대 홈쇼핑 쇼핑호스트인 배성은씨는 지난 15일 하루종일 설레는 마음이었다. 오후 방송이 끝난 뒤 배씨는 남편과 결혼 1주년 기념 제주도 여행을 떠나기 때문.
“모르시는 분들은 하루 두 시간만 방송하면 되니까 한가한 직업으로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배씨는 “방송준비, 각종 회의, 제품 연구, 시장 동향 취재 등 할 일이 정말 많아서 남편이나 애들한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동료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다행히 배씨는 남편 역시 불규칙적인 활동을 하는 직업이라 별 무리가 없다. “남편과 내가 모두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니까 오히려 잘 맞는 것 같다”면서 “시간이 맞으면 함께 즐기고 그렇지 못할 땐 서로 배려해주는 편”이라고 말한다.
사실 대충하려하면 쇼핑호스트만큼 자유로운 직업도 없다는 게 홈쇼핑 관계자들의 설명. 하지만 조금이라도 좋은 방송을 만들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 결국 아내와 엄마로서는 낮은 성적표를 받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이 먼저 이들의 일에 대한 열정을 이해하고 응원해주기 때문에 쇼핑호스트들이 열심히 활동할 수 있다는 게 배씨의 설명이다.
▲ 방송 전 스튜디오에서는 세트 준비가 한창. 같은 시각 쇼핑호스트도 분장에 여념이 없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드디어 방송이 시작된다. 방송 후엔 호스트들끼리 수다가 이어지기도. | ||
올 상반기 보험 상품이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떠오르자 이번에는 펀드 상품 판매가 붐을 이루고 있다. 이에 맞춰 쇼핑 호스트들은 금융 관련 공부에 돌입했다. 펀드 설명회 참석은 기본, 펀드 매니저들과의 잦은 미팅을 통해 이율과 과세 등 금융 관련 공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펀드 상품 관련 프로그램은 최근 현대홈쇼핑에서 최초로 방송됐다. 당시 쇼핑호스트를 맡았던 홍윤주씨는 “단순히 잘 아는 수준으로는 모자라다. 상품을 직접 판매하기 위해서는 전문가 수준으로 완벽하게 알아야 한다”면서 “지난해에는 주얼리 붐으로 보석 관련 자격증 취득이 필수였고 올 상반기에는 보험 상품의 히트로 쇼핑호스트 대부분이 보험판매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말한다.
각 홈쇼핑 채널마다 쇼핑 호스트는 대략 30명씩 소속돼 모두 2백여 명의 쇼핑호스트가 활동중이다. 시청자들을 대신해 각종 제품을 체험해고 소개하는 오감대리인을 자처한 이들의 행보는 한국 유통 문화의 틀을 바꿔가고 있다. 과장된 상품 소개는 순간적인 판매량 증가로 이어질 수 있지만 반품량 증가로 이어지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것이 쇼핑 호스트들의 공통된 설명.
가장 기본이지만 시청자들에게 신뢰를 얻어내는 것이 역시 최선의 방법인 셈이다. 이를 위해 쇼핑호스트들은 고시생보다 치열하게 공부하고 기자보다 더 열심히 취재하고 방송인보다 능숙한 자세로 카메라 앞에 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