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꼭두각시…손해볼 것 없다’
‘김상곤 혁신위원회’를 놓고 친노계와 비노계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김상곤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장이 5월 27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 위원장, 문재인 대표, 이종걸 원내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특히 친노계와 비노계가 현실정치 경험이 전무한 김상곤 혁신위원장을 택한 것을 놓고 자신들의 권력쟁취를 위한 ‘불쏘시개’로 쓰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주장이 나오면서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친노계와 비노계가 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의 눈’으로 김상곤 혁신위를 바라보고 있다는 얘기다.
김상곤 혁신위가 친노계와 비노계의 ‘짬짜미’ 결과물이란 정황은 당내 곳곳에서 포착됐다. 애초 초계파 혁신위의 ‘플랜 A’(안철수 전 공동대표)와 ‘플랜 B’(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무산되면서 궁지에 몰린 친노 측에 김상곤 카드는 일종의 ‘꽃놀이패’다. 김상곤 혁신위가 성공해도, 반대로 실패해도 당 최대주주인 친노계의 당 장악력은 확고하기 때문이다.
진보 교육감의 시대를 연 김상곤 카드를 전면에 내걸고 혁신위를 띄운 친노계는 일단 비노계의 ‘집단적 반발’을 봉쇄하고, 문재인 체제 정비를 위한 시간벌기에 나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문재인 대표에게 ‘김상곤 카드’는 천군만마인 셈이다. 친노계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김상곤 카드는 최상의 카드”라며 “김상곤 혁신위 출범을 계기로 4월 재보선 이후 혼란과 분란을 거듭했던 당의 상황이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매번 ‘앙꼬 없는 찐빵’에 머무른 혁신의 결과물을 김상곤 혁신위에 떠넘기게 된 것도 문재인 체제로선 ‘신의 한 수’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상곤 혁신위가 레토릭에 그친 혁신안을 내놓더라도 그 책임이 문 대표보다는 김 위원장에게 전가될 가능성이 커 친노계로선 나쁘지 않은 카드다. 문 대표가 혁신위에 전권 부여를 약속하면서도 권한 충돌이 불가피한 최고위원회 존립을 고집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전략적 포석으로 분석된다. 김상곤 혁신위가 별다른 혁신 방안을 내놓지 못할 경우 문 대표가 치고 나갈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열린다는 의미다.
문 대표는 최고위와 혁신위의 권한 분담과 관련해 “최고위 위상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며 “혁신위는 최고위가 추구하는 사안에 대해 전권을 가질 것”이라고 답했다. 문 대표가 앞장서 최고위와 혁신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지적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당 한 관계자는 친노의 줄타기에 대해 “그간 당 혁신 작업을 몇 번이나 했느냐. 우리 당의 문제는 혁신 내용이 아닌 실천”이라고 잘라 말했다.
실제 이명박(MB) 정부 출범 이후 새정치연합 혁신기구 출범은 총 7차례에 달했다. ‘뉴타운 선거’로 총칭된 2008년 총선에서 참패한 민주당은 관료파인 김효석을 위원장으로 하는 ‘뉴민주당 비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좌우를 뛰어넘는 중도노선을 주창한 ‘뉴민주당 비전위원회’가 출범하자 당내 매파(강경파)와 비둘기파(온건파)의 갈등은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온건파인 정세균 체제가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구원투수로 등판했으나, 존재감 없는 제1야당의 모습은 여전했다. 2010년 10·3 전당대회에서 출범한 ‘손학규 체제’의 첫 선거인 10·27 재보선에서 패한 민주당은 천정배를 주축으로 한 ‘수권정당을 위한 당 개혁특별위원회’를 띄웠다. 개혁특위에선 ▲당원제도 정비 ▲당원의 참여제도 공천 및 경선제도 혁신방안 ▲사무처 개편안 등을 내놨지만 ‘빈손 혁신위’에 그쳤다.
2012년 총·대선에서도 패한 제1야당은 이후 정치혁신위원회(위원장 정해구), 정치혁신실행위원회(위원장 이종걸), 새정치 비전위원회(위원장 백승헌), 정치혁신실천위원회(위원장 원혜영) 등의 닻을 올렸지만, 혁신은 구호에 그쳤다. ‘불임 정당’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비노계 한 인사는 “김상곤 혁신위는 계파 갈등을 일시 봉합하고 가려는 꼼수”라며 “벌써부터 호남과 486 물갈이론, 4선 중진 용퇴론 등이 나오지 않느냐. 모두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이라고 힐난했다.
혁신위원장에 친노 성향의 조국 교수(왼쪽)를 영입하자는 제안이 나오자 비노 진영에서 강력한 반발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제공=문재인
초계파 혁신위 구성 막판 김상곤 카드를 택한 비노계의 꼼수 논란도 만만치 않다. 친노계의 플랜 B로 알려진 ‘조국 카드’에 강하게 반발한 비노계는 이종걸 원내대표가 총대를 메고 김상곤 카드를 관철했다. 이 원내대표는 “김 위원장이 우리 당의 혁신을 위해서 왔다”며 “그동안 보여주신 혁신의 무게, 혁신의 성과를 우리 당의 혁신 성과로 더욱 쏟아내 달라”고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비노계 내부에선 ‘교육 대통령’으로 불린 김 위원장을 새정치연합으로 영입한 인사가 안 전 공동대표였던 만큼 ‘같은 편’이라는 인식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적어도 특정 계파에 속하지 않은 김 위원장이 혁신의 칼날을 쥔 이상, 비노계에 불리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의 당내 조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20대 총선 공천 막판 비노계가 김상곤 장악 시나리오를 가동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문재인 대표 체제가 김상곤식 혁신 방안의 핵심인 4선 중진 이상의 용퇴 등을 거부할 경우 비노계가 치고 나갈 수 있는 판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 경우 야당 권력구도 판이 ‘문재인 vs 김상곤’ 구도로 좁혀지면서 친노계에 구태정치의 덫이 씌워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비노계의 낙인찍기 전략이다. 친노와 비노 모두 김상곤 카드를 놓고 전략적 제휴를 한 까닭이다.
주목할 대목은 김상곤 혁신위 출범 이후 당내 주도권 다툼이 어느 쪽으로 흐르느냐다. 당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당내에서 차지하는 김 위원장의 처지를 한번 눈여겨보라”고 귀띔했다. 김 위원장의 당내 조직은 모래알 수준이다. 지난해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선 당시 본선 링에도 오르지 못했다. 김상곤의 사람, 김상곤의 사람이 될 인사도 거의 없다. 친노도, 비노도 아닌 외부에서 들어온 ‘경계인’에 불과하다. 당 내부에선 ‘차기 문재인, 차차기 박원순·안희정’ 등이 언급되지만, 그 누구도 김상곤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대중적 지지도도 없다. 여론조사전문기관의 5월 셋째 주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0%포인트)에 따르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22.2%)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19.5%) ▲박원순 서울시장(14.6%)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6.9%) ▲안철수 전 새정치연합 대표(6.3%) ▲정몽준 전 새누리당 대표(4.5%) ▲안희정 충남도지사(3.6%) ▲홍준표 경남도지사(3.5%) ▲남경필 경기도지사(2.8%) 등이 순위권에 진입했을 뿐 김 위원장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당내 조직도, 김상곤 바람을 일으킬 대중적 흡입력도 없는 김 위원장의 현실적인 목표도 차기 공천권 담보다. 제1야당의 구원투수로 나선 김 위원장이 대대적인 혁신을 통해 차기 총선을 승리로 이끈 다음,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하지만 실현 여부는 불투명하다. 염불(혁신)보다 잿밥(공천)에 더 관심이 있어서다. 이는 친노도 비노도 마찬가지다. 차기 총선 공천권을 앞두고 각 계파의 주판알 튕기기가 본격화된 새정치연합의 혁신이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로 끝날 가능성이 큰 이유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