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청관계 복원 ‘별동대’ 떴다
박근혜 대통령이 6월 25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유승민 원내대표를 질책하는 등 강한 불만을 쏟아냈다. 현직 대통령이 집권당 원내대표를 공개석상에서 비난하자 당청관계가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상당수 의원들은 박 대통령 발언에 대해 거친 반응을 보이며 청와대와의 일전도 불사하자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임기 중반기를 넘어선 박 대통령의 향후 국정 운영이 험난해 보이는 대목이다. 이에 여권 핵심부는 박 대통령의 당 장악력을 높이기 위한 차원에서 원로급 인사들이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박 대통령의 멘토 그룹으로 알려진 이른바 ‘7인회’가 정가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참나쁜 대통령이다.”
새누리당의 한 비박계 중진 의원은 지난 2007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 제의에 대해 박 대통령이 했던 말을 그대로 했다. 6월 25일 박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새누리당을 향해 선전포고에 가까운 발언을 쏟아낸 직후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메르스 초기 대응 실패에 대해 대통령의 사과조차 없었다. 국정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여당에 대해 대통령이 선거 심판 운운하며 저주에 가까운 발언을 퍼붓는 게 적절하느냐”고 되물으면서 “당을 이렇게까지 무시하고도 남은 임기 동안 국정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수도권의 한 재선 의원은 “박 대통령이 이성을 잃은 것 같다. 지금 분을 삭이고 있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 조만간 터져 나올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새누리당의 이러한 분위기는 유승민 원내대표 재신임으로 이어졌다. 박 대통령은 유 원내대표를 향해 “여당 원내사령탑이 정부의 경제 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박 대통령이 유 원내대표 사퇴를 요구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일부 친박계 의원이 유 원내대표 용퇴를 꺼내 들며 박 대통령 지원사격에 나섰다. 친박 좌장 서청원 최고위원은 “과거 원내총무 때 노동법 파동으로 책임진 일이 있다”며 유 원내대표의 결심을 촉구했다.
그러나 친박의 주장은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 오히려 유 원내대표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불거졌다. 비박계 의원들은 긴급 모임을 갖고 ‘유승민 지키기’에 동참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앞서의 수도권 재선 의원은 “대통령 말 한마디에 우리가 뽑은 원내대표가 자진사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청와대가 유 원내대표를 계속 ‘비토’할 경우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무성 대표 측 역시 떨떠름하기는 마찬가지다.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는 있지만 청와대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며 당·청 관계가 악화되는 게 득 될 것은 없다는 판단에서다. 김 대표와 가까운 의원은 “김 대표는 청와대에 할 말 하겠다는 일성으로 친박이 내세운 서청원 의원을 제치고 승리했다. 실제로 김 대표 취임 후 당·청 힘의 균형추가 어느 정도 맞춰졌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런데 이번 박 대통령 발언으로 김 대표도 애매하게 됐다”면서 “김 대표로서는 청와대를 바라보는 의원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모른 척하기 힘들 것”이라고 귀띔했다.
정치 전문가들은 새누리당이 한 발 물러서며 봉합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당과 청이 결국은 파국을 맞을 것이란 데 입을 모은다. 이재광 정치평론가는 “(당청관계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고 본다. 새누리당 분위기가 정말 험악하더라. 청와대가 이겼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번엔 가까스로 수습됐지만 당 입장에선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박 대통령과 독자노선을 가는 게 내년 총선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당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강수’를 꺼내 들었지만 오히려 ‘부메랑’으로 돌아와 남은 국정 운영에 차질을 빚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여권 핵심부가 내심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메르스 사태, 가뭄 등으로 인해 가뜩이나 민심 이반 현상이 뚜렷한 상황에서 여당마저 등을 돌릴 경우 레임덕으로 ‘직행’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친박계의 한 전직 의원은 “이제 겨우 일 좀 해 보려고 했는데 메르스 사태가 발생했다. 민생과 개혁 법안은 표류한 지 오래다. 이래서는 과연 박 대통령이 실적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한데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박 대통령이) 그렇게까지 당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어야 했는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부 친박 의원들은 국회법 개정안을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자 정무 라인을 통해 청와대가 당과의 ‘스킨십’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문한 바 있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충돌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해 왔다. 청와대 입장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정무수석실이 당 지도부와 긴밀하게 협의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당과의 핫라인 자체가 잘 가동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에 서청원·윤상현·김재원 의원 등 몇몇 친박 의원들이 막후에서 청와대와 원내 지도부 간 이견을 좁히려 했지만 무산됐고, 결국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청관계 복원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 김기춘 전 비서실장. 사진제공=청와대
박 대통령 임기 초반 청와대가 당보다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로는 김기춘 전 실장이 꼽힌다. 김 전 실장은 현안이 있을 때마다 당 지도부를 상대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며 박 대통령 국정 운영을 뒷받침했다. 김 전 실장은 친박계의 김재원 의원과 이른바 ‘K-K 라인’을 형성해 당 속사정을 그 누구보다 자세히 알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 전 실장 사퇴 후 청와대의 당 장악력은 느슨해졌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이재광 정치평론가는 “김 전 실장에 대해 당 내에서 반감이 적지 않아 보인다. 김 전 실장 시절 당은 거수기 노릇을 하지 않았느냐. 그렇지만 김 전 실장의 카리스마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여권 핵심부가 김 전 실장을 중심으로 한 원로 인사들의 구원등판 전략을 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은 새누리당 비박·친박 의원들을 광범위하게 만나며 박 대통령 입장을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부분 비공개 만남이다. 박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 후엔 비박계 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양해를 부탁했다고도 한다. 사실 7인회 등 원로 중에선 박 대통령에 대해 섭섭함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제법 있다. 앞서의 7인회 인사는 “우리가 뭘 바라고 박 대통령을 도운 것은 아니지만 (소외된 것에 대해) 서운한 점은 분명 있다. 특히 김기춘 전 실장에게는 더욱 그렇다”면서도 “그러나 어찌됐건 우리가 힘을 모아 당선시킨 대통령이다. 끝까지 돕는 게 맞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