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 4개월 전 예고…워싱턴이 세번 묵살
1987년 3월 공군 초청으로 방한한 도널드 니콜스. 맨 왼쪽이 공군 첩보부대 공작과장을 지낸 김인호 씨.
1950년 9월 18일.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국군과 유엔군은 대대적인 북진을 감행한다. 국군의 신속한 북진에 김일성은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는 긴박한 방송연설을 한다. 이 와중에 미군은 북한의 정치, 군부 지도자들을 체포할 목적으로 특별작전을 개시한다. 작전의 핵심은 역시 ‘김일성 체포’였다.
1950년 10월 20일, 김포비행장에서 미 제187공수연대 전투단을 실은 항공기 190대가 하늘을 까맣게 뒤덮으며 평양 후방인 숙천, 순천 지역으로 출동한다. 하지만 김일성은 평양함락 훨씬 전인 10월 12일경, 이미 북한 관리들과 도망을 간 상태였다. 아쉽게도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김일성의 탈출을 미리 예견한 미군 간부가 있었으니 바로 도널드 니콜스(당시 미 극동공군 제6006첩보부대 부대장)였다. 니콜스는 김일성이 평양 함락 전 청천강을 넘어 도망칠 것이라는 정보를 포착, 빠른 작전 개시를 주장했으나 아쉽게도 작전 개시일은 앞당겨지지 못했다. 니콜스는 아쉬운 마음에 김일성의 집에서 수많은 문서와 책상, 그의 전용 젖소까지 비행기에 싣고 돌아왔다. 비록 작전은 실패했지만 니콜스의 과감한 작전과 정보 수집 능력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니콜스의 능력은 한국전쟁 직전에 이미 빛났다. 8·15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니콜스는 미 극동공군사령부의 ‘K분견대’ 특별요원으로 한국에 처음 파견됐다. 그는 한국 내부 상황과 주한미군 주둔을 대비해 안전 여부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 과정에서 니콜스는 자신의 정보원인 조선노동당 최고위 인사를 통해 북한의 내부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예감한다. 정보를 종합해보니 여지없이 ‘남침’ 징후가 보였던 것이다.
작전회의 중인 니콜스. 첩보부대장인 니콜스는 신분을 감추기 위해 현역 시절 사진을 거의 찍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출처=
니콜스는 1950년 2월 28일자로 당시 일본 동경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와 미 워싱턴에 정보보고를 작성해 올린다. 당시 니콜스가 작성한 극비 정보보고서 ‘북한의 공군력과 잠재력 평가’(문서번호 IR5450)에 따르면 “북한이 1949년 11월부터 1950년 1월 사이에 38선으로부터 몇 km 이내 새로운 군용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고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신형 전투기를 공급 받고 있다”며 남침 징후를 예고했다. 이후 니콜스는 전쟁이 6월 25일에서 28일 사이에 일어날 것이라고 세 번씩이나 보고했으나 워싱턴은 “근거가 부족하다”며 보고를 무시하고 만다. 하지만 결국 한국전쟁은 니콜스가 예견한 대로 6월 25일에 터졌다.
전쟁 이후 니콜스는 정보전을 수행하기 위해 미 극동공군 제6006첩보부대의 부대장이 되어 대북 첩보 활동을 주도한다. 미군과 한국군이 혼성된 특수부대인 6006부대는 탁월한 첩보 활동으로 많은 명성을 얻었다. 6006부대는 니콜스의 별명인 ‘네꼬’를 따 ‘네꼬부대’라고 불리기도 했다. 니콜스의 지휘 하에 엄청난 수의 공작원들이 북으로 파견돼 활약을 펼쳤다.
한국전쟁 중 ‘네꼬부대’의 가장 뛰어난 성과는 북한 전력의 핵심이던 옛 소련제 T-34 탱크와 미그(MIG)-15 전투기의 정보를 파악한 것을 들 수 있다. 당시 니콜스는 T-34 탱크와 미그-15기의 핵심 부품, 기밀문서 등을 빼돌려 취약점을 찾아내 이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두 무기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하던 연합군은 전세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종전 이후 니콜스는 1957년 서울을 떠난 뒤 퇴역해 플로리다에 은거하다가 1987년 다시 서울을 방문하기도 했다. 미극동 제5공군사령관 패트리지 장군은 그를 ‘전쟁의 달인’ ‘정보의 천재’라고 평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양자’ 역할을 하기도 한 니콜스는 한국 정부로부터 화랑 무공 훈장 등 6개의 훈장을 받았다. 한국전쟁에서 화려한 공을 세운 니콜스는 1992년 세상을 떠났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