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구조 취약한 재벌 ‘H4’ 긴장해!
폴 싱어 엘리엇매니지먼트 회장과 현대차·한화·현대그룹 CI 합성.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문제는 삼성물산의 경우 이건희 회장 일가 지분이 거의 없고, 내부지분도 채 14%가 안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삼성전자 지분 4.1%를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 회장 일가가 삼성물산 지분을 매입하든가 아니면 이 회장 일가의 지분이 많은 계열사가 삼성물산을 합병하는 방법이 가장 유력했다. 삼성의 선택은 후자였는데, 엘리엇이 정확히 길목에 매복했다 기습에 나선 것이다. 합병은 발행주식의 1/3만 보유하면 무산시킬 수 있다는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 같은 점을 비춰볼 때 현대차그룹의 가장 유력한 약점은 현대엔지니어링 또는 현대차다. 정몽구 그룹 회장의 아들인 정의선 부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현대엔지니어링은 모기업인 현대건설과 합병 가능성이 있다. 정 부회장으로서는 현대엔지니어링을 상장시키거나 현대건설과 합병함으로써 후계를 위한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현대건설 주가가 최근 10년래 가장 낮은 수준이라는 점에서 삼성과 비슷하게 정 부회장에게 유리한 여건이다. 헤지펀드들이 현대건설 지분을 매입해 놓고 현대엔지니어링과 합병이 추진될 때 이에 반대하는 형식으로 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
현대차 역시 직접 공격대상이 될 수 있다. 최근 현대차 주가가 크게 하락해 지배주주인 현대모비스 지분(20.78%)의 가치는 채 6조 원이 안 된다. 순환출자 구조인 현대차그룹 지배구조에서 현대모비스의 현대차 지분은 보유비율과 시장가치가 가장 낮다. 현대모비스와 기아차의 경우 현대차그룹 특수관계자 지분율이 30%가 넘어 공격해도 승산이 낮다. 게다가 현대차는 외국인 지분율도 45%에 달해 이들과 연합만 한다면 상당한 압박을 할 수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순환출자라는 약점이 있으면서 내부 지분율이 낮은 곳, 그리고 후계승계를 빌미로 지배구조 투명성을 주장할 수 있는 곳이 헤지펀드들의 공격 대상이 되기 쉽다”고 설명했다.
현대중공업 역시 이 기준에 부합된다.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 지분율은 21.32%다. 최근 주가가 크게 하락해 시가총액은 8조 8000억 원대에 불과하다. 또 ‘현대중공업-현대삼호중공업-현대미포조선-현대중공업’의 순환출자 구조를 갖고 있다. 순환출자 구조상 어느 한 회사가 공격받더라도 다른 곳이 도와주기 어려운 구조다. 최대주주인 정몽준 전 의원 이후 후계구도도 아직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현대중공업이 후계구도를 위한 움직임을 개시할 때 이를 빌미로 경영권을 공격, 수익기회를 노릴 여지가 있다. 외국인 지분율도 현대중공업 12%, 현대미포조선 19%대다. 높지는 않지만 적잖은 헤지펀드의 잠재우호 세력이다.
한화그룹 역시 유력한 공격대상으로 주목된다. 김승연 회장은 ㈜한화 지분 22.65%를 통해 그룹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장남 김동관 씨 지분율은 4.44%, 김 씨가 지배하는 한화S&C가 2.2%를 갖고 있다. 김 씨와 한화 S&C의 지분율을 늘려야 후계가 이뤄진다. 김 회장 지분을 지분율 손실 없이 승계하든지, 한화S&C 등 김 씨가 지배하는 회사를 통해 ㈜한화 지분을 확보하는 방법이 가장 유력하다. 따라서 김 씨가 한화S&C 등을 통해 ㈜한화 지분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제동을 걸 여지가 있다. 심지어 ㈜한화의 외국인 지분율도 26.6%가 넘는다.
현대그룹 역시 한화와 비슷하다. 지주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은 현정은 회장 9.7%, 모친인 김문희 씨 6.6%, 딸인 정지이 씨 0.3%, 현대글로벌 9.7% 등이다. 총 내부지분율이 31.2%에 달하지만, 후계자로 유망한 정 씨의 지분이 너무 적다. 정 회장과 세 자녀가 지분 100%를 소유한 현대글로벌이 후계구도에서 유망한 축이다. 현대글로벌은 현대그룹 IT사업 등으로 돈을 버는 회사다. 따라서 현 회장이 현대글로벌을 이용해 현대엘리베이터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지배구조나 일감몰아주기 등을 문제 삼을 여지가 있다.
현대그룹은 이밖에도 그룹 최대주력인 현대상선의 지배구조가 안정적이지 않다. 지분율이 약 30%에 달하지만, 우호관계가 아닌 현대중공업이 여전히 15%의 지분을 보유 중이다. 현대중공업이 매각한 약 14%의 현대상선 지분은 사모펀드인 시너지파트너스로 넘어갔다. 따라서 향후 이 지분이 헤지펀드로 넘어가고, 현대중공업과 연합할 경우 현대상선의 경영권이 도전받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재계의 관계자는 “2004년 소버린이 SK그룹 경영권에 도전하는 사태 이후 헤지펀드가 대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을 한 사례는 이번이 가장 대표적이다. 많은 시간이 지난 만큼 재계에서는 이번 삼성과 엘리엇의 대결을 심도 높게 분석하고 있다. 이번 대결의 진행 과정에서 헤지펀드들의 최신 전략에 어떻게 경영권을 방어할지 전략을 수립하는 데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설명했다.
일단 재계에서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자사주와 국민연금이다. 우호세력에 자사주를 넘기는 것은 대체로 합법으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이번 제일모직의 사례에서처럼 지분관계로 얽힌 곳에도 넘길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재계 관계자는 “아무나 백기사로 영입할 수는 없다. 충분한 신뢰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우호세력이거나 지분관계가 있는 곳을 유사시 백기사로 삼을 수 있는 게 중요하다. 이번 삼성-엘리엇 대결에서 그와 관련된 명확한 기준이 수립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재벌그룹 주요 계열사에서 상당한 지분을 보유한 연기금과 기관투자자들의 움직임도 연구대상이다. 이들이 경영권 분쟁에 대응하는 자세를 분석하면 향후 이들의 움직임을 예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한 주식담당자는 “적어도 이번 삼성-엘리엇 건으로 연기금과 기관투자자 등과의 소통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번 건을 참고하겠지만 결국 주요한 회사의 의사결정에 대해 이들 기관투자자들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는 평소 충분한 소통만큼 중요한 게 없기 때문이다”라고 귀띔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삼성-엘리엇 대결에서 헤지펀드를 ‘악의 축’처럼 몰아가는 여론에 대해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다. 해외에서는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역할이 인정되는 행동주의 헤지펀드들의 행위가 한국에서는 마치 불법인 것처럼만 받아들여진다면 외국인 주주들의 한국 기업에 대한 투자심리를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투자자를 대상으로 영업활동을 했던 증권사의 한 임원은 “해외에서는 한국 기업들의 지배구조가 그리 투명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아직 팽배해 있다. 그런데 행동주의 투자를 모두 악의적으로 경영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몰아간다면 외국인 주주들의 정당한 주주권 행사도 제약되는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모 자산운용사의 주식운용담당 책임자는 “헤지펀드 등 외국자본에 대한 무차별적인 비판은 오히려 이들의 결집력을 높여주는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번 삼성-엘리엇의 대결도 자칫 외국인 주주들이 결집하는 첫 사례가 될 수 있다. 주요 대기업 가운데는 외국인 지분율이 50% 안팎인 곳도 많다. 그동안 경영진에 우호적이었던 외국인들까지 한데 묶어 적군처럼 여기는 분위기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최열희 언론인